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월간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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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내전과 마약, 납치, 석유 그리고 페르난도 보떼로의 나라. 내 머리 속의 콜롬비아는 그런 곳이다. 한반도보다 다섯 배나 되는 넓은 나라, 아마존, 새들이 많이 사는 곳. 콜롬비아의 석유와 미국의 돈, 이스라엘제 무기가 합쳐져 마약상과 게릴라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나라.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가비오따쓰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동쪽에 세워진 생태공동체다. 파올로 루가리라는 사람이 꿈과 상상력만으로 만들어낸 토피아(topia). 존재하지 않는 곳(유토피아)이 아닌, 실존하는 이상향. 이 곳에 대해 더이상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에 다 나오니까.


남는 것은 궁금증 하나. 지금도 있을까? 가비오따쓰에서는 지금도 자연과의 하모니를 꿈꾸는 사람들이 소나무 숲속에서 노래를 하면서 살고 있을까?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조용하고 안전하고 깨끗한 기계들을 만들면서, 오리노꼬강의 진흙으로 제방을 쌓고 손수 만든 풍차를 돌리면서 살고 있을까.메데인 공원에 있는 보떼로의 비둘기 조각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따라 오리노꼬강, 사바나, 제비갈매기, 과이보 인디언, 풍차와 펌프, 희망과 절망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들어가는 입구는, <가비오따쓰>다.


'사막이란 상상력이 고갈된 상태일 뿐입니다. 가비오따쓰는 상상력이 만발한 오아시스입니다.'(파올로 루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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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과 약혼한 마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1
장 미셸 살망 지음, 은위영 옮김 / 시공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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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 없지만 시간이 남아서 읽다보니 내가 가장 보고듣기 싫어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처형과 고문에 대한 그림과 글이 넘쳐나는데 너무너무 싫어서 '내가 지금 이런 걸 왜 읽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이 아까워 다 읽었다.

장 미셸 살망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참 못 썼다. 시공디스커버리총서가 대부분 그렇듯이. 마녀사냥이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얼마나 잔인하게 진행됐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98%이고 역사적 맥락(이런 걸 컨텍스트라 그러던가)에 대한 설명은 1% 밖에 안 된다. 그림들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책 크기가 작다보니 그림도 작고 또 얼마나 잔인한지. 다만 <중세의 음흉함>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서는 1% 밖에 안 다루고 있지만, 낭만주의자들의 新마녀觀이 그나마 잔인한 묘사에 쪼글쪼글 오그라든 내 마음을 풀어줬다.

소득이 있다면, 덕택에 마녀사냥의 시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았던 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특히 집단이 개인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저런 적나라한 폭력이 너무 무서운데 말야. 어쩌면, 만일 내가 마녀사냥의 시기에 북동부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나는 마녀들에게 돌을 던지는 우매한 군중, 딱 그런 사람이었을지 몰라.마녀들에 대한 공포,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숲>에 대한 공포 아닌가. 나약한 인간들이 보통 그렇듯, 나는 초자연은 고사하고, 자연 자체도 무서운 사람이다. 바다도 무섭고 숲도 무섭다. 물 덩어리도 무섭고, 나무 덩어리도 무섭다. 왜냐? 말 그대로 <덩어리>이기 때문에. 덩치가 엄청나게 커진 물방울과 나뭇가지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원초적인 공포. 미셸 투르니에가 <예찬>에서 인용해놓았던 괴테의 <오리나무 숲>. 아들아 아들아...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숲을 빠져나왔을 때에 이미 아들은 싸늘하게 시신으로 변해있더라는. 가본 적도 없는 <북유럽의 숲>은 무섭다. 살망의 책은 이 숲에 대한 공포감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또 나(우리)는, 군중심리에 안주 혹은 기생하는 것에서 심지어 재미를 느끼고 있으며, 독야청청의 꿈조차 꾸지 않는 사람(들) 아닌가. 남 손가락질하면서 '이 정도 괴롭힘은 괜찮을 거야, 이건 사소한 것인데 뭐' 하면서 '괴롭힘의 시너지 효과'가 인간에게 가져올 고통을 애써 모른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그렇게 해서 우리 <어리석은 자들의 집합>은 일부의 교묘한 책략에 속아넘어간 척 하면서 약자들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거잖아. 그렇게 해서 매카시즘이니 빨갱이 사냥이니 하는 <현대판 마녀사냥>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

어쨌거나 지지부진한 마녀 이야기 중에 그나마 맘에 들었던 글 한 토막.'지옥의 가루가 그녀의 힘을 북돋아 가공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두 눈은 더욱 번득여 순결한 달빛조차 그녀의 눈빛 아래 힘없이 사그라들고 공포에 떨었다. 그녀가 사위를 천천히 둘러보았을 때 자연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나무들이 말을 하고 지나간 일들을 들려주었다. 풀잎들이 약초로 변했다.하룻밤 사이에 갈색으로 그을린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그녀가 불꽃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불꽃이 그녀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 신이니 혼탁하고 강렬한 화원(火源)인 것을!'(쥘 미슐레, <마녀> 중에서)

그럴듯한 걸. 악마의 속삭임, 그녀와 악마가 만나는 교접의 현장은 추잡한 매춘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음흉하면서 격정적인 재탄생! 그 뒤의 저 마녀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주류를 벗어나 <변방>에서이긴 하지만 추종자들도 제법 모아놓고 고고하게 살아간다. 이른바 마녀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인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마녀는 정복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변방에서 늘 만족한다? 마녀에게는 어떤 꿈이 있을까. 어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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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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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은 노엄 촘스키와 프랑스 학자들의 대담/인터뷰를 엮은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刊).정작 촘스키의 언어학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숙명의 트라이앵글>이라든가 <불량국가>, 몇해전 읽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등의 책들과 몇편의 단문들로 해서 낯설지는 않다. 사실 촘스키는 글 자체는 비비 꼬여 있지만 말하는 내용이 명확.명쾌해서 오히려 책읽는 재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저자 중의 한 명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새로운 사실(fact)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촘스키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겠지. 오히려 외신이나 사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행간읽기 연습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촘스키의 펜에서 나오는 신랄함, 그것이 주는 원초적인 배설감을 얻기 위해서 읽는다면 또 몰라도. 레바논 내전에 대한 백서 형태로 구성된 <숙명의 트라이앵글>을 제외하면 사실 촘스키를 읽으면서 나는 별다른 충격이나 감동을 받지 못했었다.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진보적, 실천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하워드 진의 글을 접하면서 세상을 오래 지켜본 老학자에게서 전해오는 강인한 시대의식에 감동 또 감동했었던 것과는 달리.

그런 면에서 보면 <누가 무엇으로...>는 오히려 괜찮았다. '드니 로베로와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가 인터뷰하고 레미 알랭그레가 삽화를 그리고 강주헌이 옮기다'라고 책 표지에 써있는데, 삽화는 맘에 안 들었지만 프랑스 학자 2명의 인터뷰 방식은 꽤 괜찮았고 번역도 좋았다. 아무래도 인터뷰 글들이다보니 에세이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촘스키의 예의 그 <비꼬기>가 아닌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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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 코소보를 둘러싼 나토의 발칸 전쟁이 남긴 것들
타리크 알리 외 지음,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 이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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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주위는 대리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TV에 비친 전쟁의 참상을 보며 마음아파하고, CNN식의 화려한 테크노전쟁 보도를 보면서 저널리즘의 무자비한 상업주의를 비난하고, 아니, 상업주의 언론을 비난하는 대의에 동의해주고, 월급의 2-3%를 가난한 아이들에게 전달되도록 복지재단에 맡기고, 코트 깃에 조지 W 부시의 얼굴이 그려진 뱃지를 다는 것으로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에 대한 추모를 대신하고,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정치적 관심을 대체시켜왔다.

그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전쟁을 비난하고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규탄해온 나에게 로베르 레데케르는 '대의 민주주의와 대리 민주주의를 혼동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정치를 없애버리는 과정'으로서의 전쟁. 더우기 인도주의라는 것을 내세운 전쟁. <인권 제국주의>라 이름붙은 전쟁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장인 타리크 알리가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 펴낸 <전쟁이 끝난 후>라는 책은 1998년의 코소보 공습과 나토의 뒤에 숨은 미국의 얼굴, 발칸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한 책이다. 짧은 글들로 구성돼 있지만 한편 한편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미셸 초스도프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노엄 촘스키, 가지 카플란. 책에 실린 <코소보: 나토팽창전쟁>을 기고한 로빈 블랙번은 페리 앤더슨의 뒤를 이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지낸 사람이다.

코소보 전쟁의 진실을 설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얼마전 <쿼크로 이뤄진 세상>에서 발견했던 그 말, '사색한다'는 말을 생각했고 다가올 이라크 전쟁을 상상했다. 언제부터인가 지식(정보)를 쌓아두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업무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명목으로 책 한권 한권을 쌓아올리듯, 위태로운 지식의 돌무더기를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사색하지 않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가치판단을 보류한 채 쌓아두는 역사지식은 기만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작은 책 한권이 너무 무거워서 부담스럽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내 머리는, 내 마음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은 책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관찰해서 이끌어낸 지적 병력(病歷)의 진단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권이냐, 주권이냐. 대리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훌륭한 지적이지만 TV영상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데 선량한 개인들이 '인도주의 이데올로기'를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또한 비아냥거리는 대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도주의는 분명 의미있는 가치 아닌가. 그동안 '사색'을 미루고 기피했던 차에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만 쏟아지지 답답해진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승리를 선언하긴 했지만 아직 평화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승자들이 코소보 협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이 관철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 폭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노엄 촘스키, <코소보 평화협정>)

촘스키의 말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앞으로 벌어질 이라크전에도 역시나 들어맞을 것이다. 코소보를 놓고 역사를 이야기한 논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일들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논자들이 던져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을 얻으면서, 사색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해본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지금 너의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네가 무관심하게 TV에서 지켜본 일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반대하고, 항의하고, 투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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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한스 그라스만 지음, 염영록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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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넬은 앙칼지지도 않고 경망스럽지도 않은 그런 평범한 소녀였다. 그렇게 평범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소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리넬은 도망자였다.'

청소년을 위한 물리학 개론서 형식으로 돼 있는데, 특이하게도 1장은 <이리넬의 도망>이라는 소설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서문 격인 이 글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는 언제나 독재자(혹은 사람의 감정을 매몰시키고 사람의 생각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가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에게 도망치려는 사람들 또한 항상 있게 마련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를 피해 물리학 공부로 <도피>해 들어왔던 이리넬이라는 소녀처럼. 저자인 한스 그라스만은 이리넬과 같은 사람이 다음번에 도망할 때 도움을 주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리넬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머리 속에 조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에 나오는 그 어린 소년의 모습이. 가아더가 그 어린 소년을 여행지로 불러들이면서 <철학>과 <자유>를 슬그머니 꺼내놓는 것처럼, 그라스만은 이리넬이라는 소녀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어느틈에 <물리학>과 <사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때문이다. 철학, 자유, 그리고 물리학과 사색.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단어들이고, 실제로 두 책 모두 철학과 자유, 물리학(세상의 법칙)과 사색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결국 물리학이건 철학이건 <사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라스만은 말하는데, 이 사색이라는 말이 계속 날 머리를 쿵쿵 때렸다. '우리로서야 그 공식이 너무나 간단해서 암소나 파리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어깨를 으쓱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물리학은 아니다. 풀밭에 서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 쉬면서, 오후가 되어 멀리 시선을 던져 그 공식에 대해서 사색에 잠긴다면, 그때서야 그것을 진정한 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색하다'라는 말은 턱을 괴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생각에 잠기다'라는 말이 훨씬 나은 표현일 것 같다.'

그렇게 사색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지혜로우면서도 관조적인 눈빛으로 볼 수 있는 비결이고,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조커 혹은 자유정신을 내쫓아버리지 않는 길 아닌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나같은 독자에게 그라스만은 학제적인 의미로서의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툭툭 던져준다. 나는 지금 왠지 모르게 신나고 두근거리면서도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던져준 화두에 뭐라고 답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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