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후 - 코소보를 둘러싼 나토의 발칸 전쟁이 남긴 것들
타리크 알리 외 지음,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 이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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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주위는 대리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TV에 비친 전쟁의 참상을 보며 마음아파하고, CNN식의 화려한 테크노전쟁 보도를 보면서 저널리즘의 무자비한 상업주의를 비난하고, 아니, 상업주의 언론을 비난하는 대의에 동의해주고, 월급의 2-3%를 가난한 아이들에게 전달되도록 복지재단에 맡기고, 코트 깃에 조지 W 부시의 얼굴이 그려진 뱃지를 다는 것으로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에 대한 추모를 대신하고,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정치적 관심을 대체시켜왔다.

그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전쟁을 비난하고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규탄해온 나에게 로베르 레데케르는 '대의 민주주의와 대리 민주주의를 혼동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정치를 없애버리는 과정'으로서의 전쟁. 더우기 인도주의라는 것을 내세운 전쟁. <인권 제국주의>라 이름붙은 전쟁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장인 타리크 알리가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 펴낸 <전쟁이 끝난 후>라는 책은 1998년의 코소보 공습과 나토의 뒤에 숨은 미국의 얼굴, 발칸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한 책이다. 짧은 글들로 구성돼 있지만 한편 한편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미셸 초스도프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노엄 촘스키, 가지 카플란. 책에 실린 <코소보: 나토팽창전쟁>을 기고한 로빈 블랙번은 페리 앤더슨의 뒤를 이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지낸 사람이다.

코소보 전쟁의 진실을 설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얼마전 <쿼크로 이뤄진 세상>에서 발견했던 그 말, '사색한다'는 말을 생각했고 다가올 이라크 전쟁을 상상했다. 언제부터인가 지식(정보)를 쌓아두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업무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명목으로 책 한권 한권을 쌓아올리듯, 위태로운 지식의 돌무더기를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사색하지 않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가치판단을 보류한 채 쌓아두는 역사지식은 기만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작은 책 한권이 너무 무거워서 부담스럽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내 머리는, 내 마음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은 책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관찰해서 이끌어낸 지적 병력(病歷)의 진단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권이냐, 주권이냐. 대리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훌륭한 지적이지만 TV영상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데 선량한 개인들이 '인도주의 이데올로기'를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또한 비아냥거리는 대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도주의는 분명 의미있는 가치 아닌가. 그동안 '사색'을 미루고 기피했던 차에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만 쏟아지지 답답해진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승리를 선언하긴 했지만 아직 평화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승자들이 코소보 협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이 관철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 폭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노엄 촘스키, <코소보 평화협정>)

촘스키의 말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앞으로 벌어질 이라크전에도 역시나 들어맞을 것이다. 코소보를 놓고 역사를 이야기한 논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일들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논자들이 던져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을 얻으면서, 사색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해본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지금 너의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네가 무관심하게 TV에서 지켜본 일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반대하고, 항의하고, 투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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