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1900" 특별 전시 관람회 가기 전이나
빈 레오폴트 미술관 특별 전시 관람 전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란 부제답게,
빈 모더니즘 시대를 연 클림트의 삶과 예술이 한 권에 꽉 담겨져 있다.
에로티시즘의 대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다나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을 한 번 보면
그의 화풍을 잊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몽환적이다.
기독교 모자이크를 보고 크게 감명 받은 클림트가 캔버스의 표면에
금은 장식을 콜라주 기법으로 붙이는 황금이 가득한 비잔틴 스타일은
잊기가 힘들다. 자연주의적인 요소와 넓은 면적의 추상적인 기하학 장식을
통합시켜 상징적이고 에로틱하게 표현하는 클림트만의 화풍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와
남성의 관음적 시선으로 여성을 성적 파트너로 그린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키스>가 화려한 장식적 특성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노골적이고 성적인 작품이라는 해석에 놀랐다.
포옹한 연인들의 형태가 발기된 남근을 암시하는 모습이고
여성의 공간을 관통하고 있고 그림 오른쪽 아래로 흘러내리는 금빛 장식이
정자를 희미해 절정의 황홀한 순간이 막 지나갔음을 나타낸다니 말이다.
클림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나온 작품들은
패턴, 직물, 장신구를 이용해 벌거벗은 신체를 가리기보다
오히려 강조하고 에료직한 효과를 내는데
금을 많이 사용한 탓에 여인들이 장신구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클림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 회사를 차리자 마라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은혼식 기념 행사 장식을 맡게 되면서 이례적일 정도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둔 자수성가형 예술가이다.
스케치 기술을 기초부터 철저하게 쌓는 훈련을 받아
천부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은 방식을 버리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하기까지 삼십 대 후반이 걸리긴 했지만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인정받았다.
살아 생전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생계 걱정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예술 경력에 관한 사실들은 잘 정리돼 있지만
사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모델을 포함한 수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한 바람둥이라는 소문도 있고,
매일 작업실에 출근하며 균형 잡힌 생활 방식을 고수했던
대인기피증 환자이자 독신자로도 알려져 있다.
매우 부르주아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했다는 증언과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나타난 사생아가 14명 이상 있었는데
법적으로 인정받은 건 3명이라도 하니 정조 관념이 희박했던 것 같다.
클림트는 모델들에게 매우 관대했고 모델들은 스튜디오 안을 어슬렁거리고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보내다 클림트가 아름답다 생각하는 자세나 동작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었는데, 클림트와 편안한 관계였기 때문에
관능적 쾌락에 빠져 자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까지 허락할 수 있었다.
클림트가 얼마나 독특한 화가였는지 그에겐 전임자도, 실질적인 추종자도 없었다.
실레와 코코슈카로부터 존경받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클림트는 19세기 말 과도기에 속하는 화가이고
실레와 코코슈카는 20세기 초 표현주의 사조를 연 대표적 인물들이다.
실제의 누드는 평화롭고 몽환적이고 섬세한 클림트의 누드와 달리
극심한 고통과 신경증적인 정신 상태를 반영해
성적으로 매력적인 면과 혐오스러운 면을 동시에 보여줬다.
어쨌든 클림트는 빈의 회화를 시들어가는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넓은 세계로 나가도록, 빈의 예술적 개성을 보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01년 <의학>이 공개되었을 때, 불쾌한 에로티시즘과
여성 음모의 노골적인 묘사로 인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세기에 여성의 음모는 언급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엄청난 주제여서
포르노물을 제외하면 서양의 공공 미술 작품에서 묘사된 사례가 없었다.
평생 서양 미술을 연구한 존 러스킨이 결혼식 날 밤,
여성에게도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첫날밤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정도였단다.
클림트 덕분에 1900년 이후 빈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여성의 음모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니 않게 되었으니
서양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으며 뉴욕에 처음 갔을 때 메트로폴리탄에서
<메다 프리마베시의 초상>을 보고 클림트풍이네 하고 봤다가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담긴 클림트의 이례적인 작품이란 걸 알게 된 때가 떠올랐다.
MOMA에서 <공원>을 보고 클림트가 초상화도 그렸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는데,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줄만 알았던 터라
새로운 작품 세계에 놀라웠다.
임멘도르프성에 보관돼 있던 클림트의 작품들이
나치 친위대에 의해 불태워진 것이 참 안타깝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예술 분야의 가장 큰 손실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그나마 사진 기록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클림트의 삶과 작품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클림트 전시회 도록을 소장한 느낌이라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유명인이었지만 살아 생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말을 남기지 않은
클림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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