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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버드의 노래 - 흑인, 퀴어, 우아한 탐조자로 살아온 남자의 조용한 고백
크리스천 쿠퍼 지음, 김숲 옮김 / 동녘 / 2024년 9월
평점 :
흑인, 퀴어, 우아한 탐조자로 살아온 남자의 조용한 고백이라고 해서
소수자의 삶이 녹록치 않았겠구나 하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더 극적이었다.
2020년 5월 25일 뉴욕 센트럴파크 사건 이후
크리스천 쿠퍼는 가장 유명한 흑인 탐조인으로 등극했다.
탐조를 하다 목줄을 하지 않은 반려견을 발견하고
견주인 백인 여성에게 목줄 착용을 부탁했는데,
백인 여성이 되려 의기양양하게
"여기 나를 위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있다고 신고할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부터 촬영된 69초짜리 동영상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사망했고,
쿠퍼의 영상이 SNS에서 확산되면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 영상의 흑인 남성이 탐조 중이었다,
그런데 하버드 출신이래,
마블에서 일했대, 게이래.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은 그를 수식하는 말들과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라 곧 그의 삶을
영화로 만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들었다.
지금도 탐조는 자연에 미친 덕후의 활동이나
자연친화적인 사람들의 고급 취미활동에 속하는 편이기에,
1970년대를 살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년이 백인으로만 구성된
탐조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상아부리딱따구리보다 희귀하다.
상아부리딱따구리는 딱따구리 중 세 번째로 크고 아름다워
신의 새라 불렸지만 1944년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마지막으로 관찰된 후
완전히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새이다.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되면,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생명체의 관계를 의식하게 되는데
쿠퍼가 특별히 새에 대해 매혹된 이유가 여러 가지 있다.
우선 탐조는 접근성에 있어 큰 이점이 있다.
지구 어디에 있든, 볼 수 있는 새의 종류가
동일한 지역에 있는 포유류의 숫자를 훌쩍 뛰어넘는다.
많은 종류의 포유류는 야행성이거나 땅 아래나 바닷속에서 서식해서 관찰이 어렵다.
곤충의 경우는 종류가 너무 다양해 모든 종을 파악하기 어렵고 겨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 반해 새는 연중 어느 시기에나 다양한 종을 볼 수 있는 데다,
인간과 독특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개와 많은 감정을 공유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된 감각이 다르다.
인간보다 후각 수용체가 50배나 많은 개가 감각하는 세상을 인간은 절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새는 굉장히 제한된 후각을 지니고 있어
우리와 같은 방식인 시각과 청각으로 소통한다.
특히 명금류들은 경이로운 수준의 음악적 레퍼토리를 발전시켰고
인간은 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새와 함께라면
시각과 청각이 언제나 발생한다.
도감 속의 새가 내 눈에 보일 때의 그 감동을 한 번 경험해 보면 잊을 수가 없다.
첫 뉴욕 방문이 한겨울이라서 눈에 뒤덮인 센트럴파트와 오리들도 좋긴 했지만,
초록 초록한 센트럴파크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는데
앵그리버드를 발견하고 서운함이 1도 없이 사라졌다.
앵그리버드가 그냥 귀여운 캐릭터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어서 그렇지 미국에는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새였구나를
깨달으며 분홍빛 북부 홍관조를 보며 얼마나 감탄했는지,
완전 새빨간 홍관조를 보지는 못했지만 큰 울림을 갖고
자연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센트럴파크는 사람만큼이나 하늘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모으는,
철새를 끌어들이는 덫이자 텃새들의 보금자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새는 하늘을 날 수 있다.
지상에 묶인 인간은 한계 없는 공간으로 몸을 던지는 새들을 보며 꿈을 꿀 수 있다.
그 작고 여린 도요물떼새들이 지구를 여행하는 거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 경이로움이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쿠퍼에게 탐조는 세상 속 퀴어 청소년으로서 고통받을 때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흑인이자 아웃사이더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해
자신의 괴짜 같은 근간을 다지게 해주었다.
그가 전 세계를 여행하게 만든 것도 먼 곳에 있는 새를 찾으러 가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고,
미국인들의 양심을 돌아보게 한 사건으로 이끌어 그의 삶의 궤적을 바뀌게 한 것도
새였다.
교사였던 부모님과 6학년 때 여름휴가로 미국을 횡단하는 긴 여정 동안
4명의 가족과 강아지까지 욱여넣은 작은 캠핑카에서
모든 탐조인의 성경인 로저 피터슨의 <탐조를 위한 필드 가이드>를
백 번쯤 돌려본 쿠퍼는,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운 새들의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며
실제로 그 새들을 보면 어떨지 상상했고, 여행 내내
쿠퍼는 도감 속의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모두 흡수했다.
아들의 놀라운 관찰력을 확인한 아빠는 롱아일랜드로 돌아와서
일요일에 탐조 산책을 진행하는 오듀본 협회를 발견하고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거기서 만난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자 활기 넘치는 유대인인
커트너가 흑인 청소년의 친구가 되어
모든 고통을 초월하게 만드는 새에 대한 사랑을 알려줄 수 있는
훌륭한 어른이라 다행이었다.
그때 흑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백인 우월주의자를 만났더라면
지금의 쿠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퍼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던 아빠 프란시스 쿠퍼가
브루클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과학 선생님이자 한국전쟁 참전용사,
흑인 시민권 활동가임에도 불구하고 쿠퍼가 어린 시절 아빠를 두려워하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였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잔인할 정도로 감정적이었던 아빠의 삶도
참 드라마틱 했다. 쿠퍼의 엄마와 고통스럽게 이혼하고 재혼한 이후에도,
전 아내의 어머니를 존경하며 돌본 남자가 자녀를 따뜻하게 돌보지는 못했다니 말이다.
<스타트렉>은 부모님이 양육하며 가르친
인종 평등, 평화적 협동, 더 나은 인간성에 대한 약속이 충족된 미래를 속삭였고
스타플릿에서 살아가는 스팍은 게이 소년에게
인간의 성가신 감정을 모두 걸어 잠근 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게이스로움을 억압하며 에너지를 공부로 쏟아 부운 그는
하버드에 입학했지만 변호사가 자신의 천직이 아니라고 빠르게 결론지었다.
1980년대 초 흑인이자 성소수자인 사람은 기득권과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장벽에 쌓여서 내린 결론이라서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변호사를 현대의 기사단으로 인식하며 정의가 승리하도록
언쟁을 벌이는 일이 다소 낭만적이라는 사실을 체감한
하버드대 정치학 전공 흑인은 졸업을 앞두고 미래에 대한 중대한 갈림길을 대면하는 대신
하버드 졸업생을 위한 여행 장학금으로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흑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원하는 백인들에 둘러싸이는
놀라운 사건을 겪으며 미국에서의 성장 배경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일생 동안 흑인으로서 백인보다 쓸모가 덜하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스타트렉>만큼 주목을 받은 프로그램조차도 백인이 디폴트라는 설정이
지배한 미국에서 살다 보니 똑똑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흑인이
외계인이 화이트워싱을 당했음을 깨닫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는 점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울루루에서 열기와 경이로움을, 이구아수에서 감정과 경외심을 느끼고
웅고롱고로에서 인류의 기원으로 시간을 돌려보며
비교적 성공적인 전 세계 순례길을 밟았다.
하지만 전 세계를 여행하며 그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유대인이,
호주에서는 아시아인이, 베를린에서는 터키 후손을 업신여기는 분위기를 보며,
어디를 가든 또 다른 '니거'가 있음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고,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뉴욕에서 괜찮은 저녁 한 끼를 먹을 때 쓰는 백 달러가
네팔 대학에서 공중위생학 석사 학위를 밟고 있는 짐꾼의 한 학기 학비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새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여행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 것 같다.
뉴요커들의 오아시스 센트럴파크가 그 시작부터 국가 규모의 분노를 유발하는
인종차별의 유산이 남겨져 있는 줄 처음 알았다.
88 서울 올림픽이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없앴던 것과 유사하게
센트럴파크가 조성되기 전,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지금의 웨스트 80번가와 웨스트 89번가 사이에 대부분 있었다.
19세기 초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은 위한 피난처였던 '세네카 빌리지'는
흑인들과 아일랜드 이민자 일부, 당시 미국의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백인들을 위한 곳이었다.
무허가 판자촌이 아니라,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억압받았지만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세 개의 교회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교를 포함해 자신들만의 장소를 개척해
비교적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50번가에서 100번가에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토지 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동산 매입이 시작되었다.
세네카 빌리지 주민들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1857년 세네카 빌리지는 사라졌다.
세네카 빌리지가 무허가 판자촌이었따는 거짓말은
백인으로만 구성된 체재의 지도자들이 만들어냈던 거짓말이고
그 거짓말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이 씁쓸했다.
미국에서 평생 살아온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흑인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끼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
블랙 메네스(Black Menace)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흑인에 대한 공정성과 정의, 성소수자를 위한 평등,
새들이 전해주는 순수한 기쁨, 야생동물이 사는 지역을 보호해야 하는 필요성에
맞서 싸우고 있는 크리스천 쿠퍼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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