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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
유즈키 아사코 지음, 김진환 옮김 / 알토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여성 캐릭터 창조에 탁월한 능력으로 여성의 삶과 연대, 사회의 편견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유즈키 아사코가 그려낸
무력감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여자들의 이야기라 역시 유쾌했다.
우리를 위한, 우리에 의한 6편의 작지만 단단한 반격,
참지 않고 웃으며 되갚아 주는 소소하고도 통쾌한 복수였다.
특히 라벤 평론가 사절, BAKESHOP MIREY'S, 상점가 마담 숍은 왜 망하지 않을까가
인상적이었다.
라멘 무사의 여성차별적인 발언과 품평으로 낙인 찍히고
자신들의 삶을 잃고 상처받은 여성들이 의기투합하여 철저한 계획하에
내공을 기르고 라멘 무사에게 그야말로 제대로 한 방 먹이고 확실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는
속이 시원했다. 라멘 평론가로 일인자였던 라멘 무사가 업계에서 완전히 매장되는 것이
그로 인해 상처받은 여성들의 연대에 의해 가능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라멘 무사한테 당한 피해자 6명이 모여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최고의 가게를 만들고
애호가들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성공 모델이 되기 위해
만인을 위한 담백한 중화 국수를 만들고, 가게를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맛집 전문 기자로만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영어를 배우고 뉴욕에 유학 가서 라멘 붐을 지켜보는 등
각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게를 리뉴얼하다니 역시 최고의 실력이 최고의 무기이다.
<흑백요리사> 프로그램이 유행하면서 중식업계에서 여성 세프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는데, 일본에도 라멘 문화가 남성편향적인 것이 있다니 놀라웠다.
라멘은 일본 사람들의 소울 푸드라고만 생각했는데 유명한 라멘집은 남자만 득실거리고,
사장님도 꼭 남자이고 여자가 라멘을 좋아한다는 걸 용납하지 않는
복잡미묘한 라멘 문화가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자 세프는 장인으로서의 실력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냥 엄마, 애정, 노스탤지어, 치유로만 치부한다는 말에서
나 또한 무의식 중 그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기만의 베이커리를 여는 것을 꿈꾸는 미레이를 응원하고자 오븐을 선물한 히데미의 순수한 마음을
히데미가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다보니 귀족들이 평민에게 선심 쓰듯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다 1년만 일하다 떠날 사람이
이곳의 삶의 방식을 감히 바꾸려했다며, 고생 한 번 안 해본 여자가 잘난 척 설치고 다닌다고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웠다. 부유한 여성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빈곤한 여성에게 고가의 물건을 선물한 것에 자존심이 꺽여 버린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 사실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미레이도 꿈을 잃어가서 안타까웠는데,
잘난 척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미레이를 응원하고 싶었던 히데미가
오븐으로 브래드 앤 버터 푸딩을 구어 달콤하고 고소한 향을 골목에 풍기자
미레이가 그 냄새에 이끌려 자신이 진짜 꿈꾸던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일본 전국 각지의 주택지나 상점가에 갑자기 출현하는,
중장년 여성을 겨냥한 고급 잡화점은 어째서인지 결코 망하지 않는 이유가 너무 멋졌다.
손님이 자주 드나드는 것도 아니고, 상품 하나하나가 터무니 없이 비싼데다,
상품이 팔리든 팔리지 않든 상관없다는 듯 우아한 태도를 결코 잃지 않는
마담 숍의 사장님이 20년간 손님도 없이 버티는 수상한 가게.
그런 가게들이 우리 동네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상 평론가에게 허락 없이 사진 찍히고 농락당한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
꿈을 이야기했다가 꿈꿀 여유를 잃어버렸지만 꿈을 지지해주는 사람 덕분에
다시 꿈꿀 수 있게 된 우동집 딸, 이웃 남자의 독단으로 아이들의 공간을 잃어버릴 엄마들이
남이 규정해 놓은 나를 던져버리고 차별과 편견,
애정없는 비판과 무례에 맞서 투쟁하고 값진 승리를 거두는 권선징악이 속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