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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다는 말 - 진화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익숙한 세계
이수지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름답고, 자연산 재료가 몸에 더 좋고,
성형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 하고,
우리는 자연과 좋음을 연관 짓는 데 익숙하다.
자연과 비자연, 자연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별되는 어떤 경계에 관한 생각과,
그 경계를 넘어 자연스러움을 벗어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가치 판단까지 담겨 있음을
지적하며 자연스럽다는 말에 담긴 뿌리 깊은 고정관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자연에는 질서가 있다, 낳아 보지 않으면 모른다, 여자라서 그렇다, 남자라서 그렇다,
이게 사람 본성이다, 짐승이다' 등 일상에서 많이 듣는 말들이 과연 사실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편견을 발견하게 되어 섬뜩했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여전히 사냥꾼 가설로 설명한다.
수렵 채집 사회 시절 남자는 사냥, 여자는 채집을 담당하던 성역할 분담이 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냥에 주력하고 양육에는 상대적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은 남성의 공감 능력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냥꾼 가설이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며 20세기 중반 이후 다방면으로 반박되었음은
안타깝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연구 결과 사냥과 채집으로 엄격한 성역할 분담이
진화했다는 가설에 부합하는 패턴이 없었고, 성별에 따라 행동과 역할을 규정하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설령 여자가 남자보다 사냥을 덜 했다고 하더라도
사냥꾼의 역할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질 만큼 핵심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과학은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순간의 사건이 아니다.
그 자체로 옳고 그른 가설은 없다.
해당 가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합리적 의심의 무게가 달라질 뿐이다.
과학은 주어진 근거에 기대어 우리가 가진 믿음을 저울질하는 과정이다.
남자, 사냥꾼 가설은 종의 진화사를 이해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던 20세기 초
충분한 근거 없이 스토리텔링에 기대어 만들어진 그럴듯한 가설일 뿐이었다.
물론 제한된 자료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거나 제한된 자료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남자, 사냥꾼 서사가 등장하고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성차와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러한 것은 전혀 다르다.
확증 편향으로 차이를 부풀리고 각종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더욱 강화되면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지 않음을 자료를 통해 확인하니 놀라웠다.
경계에 대한 완고한 환상이 인수 공통 감염 사례가 늘어나는 근본 원인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되었다. 사람이 끝내 짐승이 아니라서, 말 없는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발상은
지속 불가능한 소비와 생산 패턴을 유지시키고 거기서 기인하는 불균형과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촘촘하게 조직된 일상이 우리를 시스템 자체에 둔감하게 만든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가 줄어들고, 박쥐와 숙주 사이의 접점이 늘어나며,
새로운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그 중간 숙주가 육류로 소비되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바이러스가 퍼지게 되자, 차단과 단절이라는 키워드로 재편성된 우리 일상이
사태의 근본 원인에 점점 무감각해져갔고, 포스트 코로나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일상을 반복한다는 말을 들으니 슬퍼졌다.
전 세계적 바이러스 유행은 많은 과학자들이 경고했던 일이고, 또 다른 바이러스 유행은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대규모 공장 사육, 서식지 파괴, 과도한 항공기 이용과 같은 지금의 시스템이
인수 공통 감염의 위험의 근본 원인임을 자각하고
사람이 자연 생태계의 온전한 일부임에 대한 행동 개시를 다 함께 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다윈처럼 비범한 과학자도 부족한 자료로 인한 증거의 한계,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살았다는 역사적 한계,
영국 중산층 남성이라는 개인적 한계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자 자신의 위치성에서 빚어진 생각의 습관을 벗어나
완전한 중립성을 가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해법은 오직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과학을 하는 데 있다고 한다.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증가가 많고 다양할수록 좋기 때문에
인종, 성 정체성, 사회 및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과학 활동에 개입되는 가정과 편견도 발견되기 쉽다.
과학적 발견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이루어진다."라고 했지만
그 거인들 또한 주어진 시기와 장소의 한계 속에서 과학을 하는 인간 과학자들일 뿐이다.
한 사람의 어깨가 아니라 여럿의 어깨를 나란히 한 위에 섰을 때,
우리는 더 많이 더 넓게 살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희망이 느껴졌다.
#자연스럽다는말 #확증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