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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문학은 요컨대 제 몸의 모든 면을 낱낱이 보여주고 어느덧 그것을 관람하던 자의 몸 안으로도 들어가 역으로 탐할 줄 아는 기묘함을 지니고 있다. 문학이 또는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냐 없냐 까지 논하는 것만 봐도 이것이 인간에게 주는 바는 무궁무진하리라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여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리가 정지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인간은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것이 주는 삶의 반추를 흥미로워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영원하다고들 말하는 것일지.

 

누구나 과거를 들추었을 때 지금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치기어린 실수 또는 언행의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땐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하는 어이없는 실소와 함께, 역으로 지금의 내가 퍽 성장했다는 의식이 들기도 한다. 소통을 배우면서 무수한 매체에 영향을 받고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어가는 과정에 사람의 나이테는 조금씩 그 무늬를 이룬다.

이는 꼭 물리적인 나이로 명확히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여든 넘은 할배라도 한 권의 책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분류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권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앎이라는 것은 평생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깨우침의 순간은 언제라도 찾아 올 수 있다. 이는 한 번 느껴본 사람만이 더 자주 그 기회를 느끼게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책이라는 사물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읽고 생각하는 행위만큼은 내가 그려낼 수 있는 원의 크기를 한없이 증폭하면서 확장시켜 주는 힘의 원천을 제공해준다. 개인의 사유는 이러한 식으로 조금씩 알고 깨달아가면서 보태지는 일이다.

 

 

조금씩 내가 성장해가고 있다는 즐거움을 알게 될 때 전혀 알지 못했던 뜻밖의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책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미세한 온도로서 감지되는 예민한 촉을 가지게 된 자만이 언어의 촉을 이해하며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힘을 지니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함께 꾸리며 꿈꾸고 살아갈 세상은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과연 책을 읽고 꿈꾼다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생산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은 자명해진다.

 

 

<책읽기 좋은날>은 저자 이다혜가 한 뼘의 나이테를 두를 수 있던 책들의 틈틈한 기록의 책이다. 여행 중 기껏 신발 한 켤레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던 공간을 벌기 위해 신발을 버리고 책을 챙겨올 만큼 그녀에게 책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말 그대로 책벌레란 별명 밖에는 달리 생각나지 않을 책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다. 저자의 특별한 리스트를 들여다보니 읽었던 책은 본대로 고개가 끄덕여 지고, 안본 책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큰 기대감을 안겨준다. 상상력이 절로 확장되는 것 같은 기대감이 절로 드는데, 결코 속단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순수한 열의가 느껴져서 더욱 좋다. 

한 방 가득 실을 잣는 거미의 움직임처럼 교묘하고 예민한 상상력의 타래들이 눈으로 펼쳐 보일 듯 눈을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서평들이다. 각각의 책에 관여한 인물들과, 때의 역사와, 사건들이 주는 낱낱의 의미들을 압축적으로 다 들여다보게 해주는 간결함이 돋보인다. 양탄자를 얻어 타고 유랑하듯 지루함 느낄 새 없이 함축적으로 증축된 세상을 구경하다보니 작가가 구획해놓은 단정함의 세계관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단 두어 페이지로 표현된 책의 감상과 평에는 그 책의 현실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이 교묘히 뒤섞여 표현된다. 어느 세계고 우리의 모습과 닮은 거미줄의 연결고리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여섯 테마로서 묶이는 의미들을 곱씹어 보면 지금 이 시대를 대변하는 ‘아픈 청춘’ ‘노력하면 누구나 된다’는 차고 넘치는 희망찬 선동적 문구와는 사뭇 다른 차분하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카테고리들로 넘실대는 것 같다. 가령 슬픈 날에는 슬픈 음악을 들으라 하고, 긍정이 뒤통수를 칠 때와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설핏 ‘왜’라는 반문이 드는 말들이지만, 상황을 처절히 몰입해본 사람이라면 이 쓸쓸한 말들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희망이란 단어가 오히려 더 큰 상실과 고통을 주는 말 일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는지.

 

 

책에 나오는 개별적 이야기들이 오히려 개인의 삶에 반추하여 들춰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이 책에서 느껴지는 향기로운 면이다. 그래서 작가가 들려주는 책의 조근 조근한 이야기들은 어스름한 저녁의 모습처럼 고요하고 쓸쓸해도 견딜만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책이야기의 목록을 옮겨 적으면서 올 겨울에는 곳간 가득히 곡식이 넘쳐나는 농부의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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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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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은 인생을 작가와 단 둘이 우주여행이라도 한들 똑같이 겪어 낸 일상의 서사가 설마 비슷해 보일 리도 만무하다. 왜냐하면 상대는 무려 ‘작가’이기 때문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행성의 일몰을 보았대도 고작 눈앞에서 소멸해가는 광경을 안타까워하는 흥분만을 몇 줄 담은 글일게 뻔한 내 글과, 일몰의 풍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가의 상상력이 같을 수가 있을까. 가령 야윈 그녀의 어깨에 슬그머니 머리를 기대어 스텝을 밟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리는 시작이라든지. 일몰을 보고 다정하게 잡힌 그녀의 콧망울의 주름을 상기하리라고는 어찌 상상이나 해보겠는가.

물론 모험심과 호기심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나라고 한껏 부풀려진 가공의 세계일랑 못만들것도 없지 않은가 으름장을 놓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력의 집채가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세상으로는 비교될 수는 없는게 자명하다. 플롯이라거나, 여운을 줄만한 결말을 만들어내는 유기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이를 실재적 의미로 실현하는 일은 그들만이 해낼 수 있는 다른 세계의 일인 것만 같다.

 

 

사람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앎과 개인사, 이상적인 바람 등 수많은 실타래와도 같은 작용과 반작용이 얽혀서 일어나는 교감일터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하루에 일어나는 생각의 양이 1g정도라면, 또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과 연상 작용으로 생각난 과거의 양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서 100g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모든 작가들이 가장 많은 생각을 해내는 사람으로 분류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인공의 세상을 끊임없이 증축해내야 하는 숙명의 과제에는 반드시 이렇게 과도한 무게가 자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일반인과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엄격한 경계가 아닐까.

 

 

 

누구든 순간에 겪어낸 그것이 잊혀지지 않을 성질의 차원의 새로움을 준다면 필시 이는 기억의 저장고에 가장 높고 깊은 곳으로 은닉될 것이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라도 생기면 발설되는 순간 휘발되는 엄살도 가득 담아서, 설명할 수 있는 온갖 비유가 신화처럼 가공되어 오래 묵혀둔 보람을 잔뜩 누릴 일이다. 사람이 본래 이야기꾼이라는 업을 등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본성을 지녔듯 조금씩이라도 덧대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이야기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내 삶의 위안을 주는 사건으로 기억이 되든 아니든 어찌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윤색되고 부풀려진 허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 기억의 창고에서 벌어지는 반복적인 일들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이고, 창조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작동되는 생각이란 작용의 윤활유는 아닐까. 받은 자극이 주는 인상들이 단순히 기억의 밀실에 고이 간직된다면 지극히 평범해 보일 뿐이지만, 이것이 창조의 주재료가 된다면 이를 가장 잘 수행하는 자는 바로 예술가들의 일일터다.

평소 애쓰고 노력하면서 삶과 대면할 때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불현 듯 스치고 지나간 사소함들이 감각을 자극할 때가 있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재료들이 새로운 창작품이 되어 이 또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예술은 '창작'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흐를수 있는 이유이다.  

 

 

책을 읽으면 작가 후기나 말머리에 대부분 자신에게 몰아친 교감의 순간을 고백하는 것으로 문을 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묘하게 행복감을 느꼈던 일, 심장이 고요히 뛰던 소리를 잊지 못해서 펜을 들었노라 고백하는 것이다. 매혹의 순간, 반드시 남기고 싶은 역사적 순간의 기록에 우리는 입을 모아 감탄하면서 동조해보곤 한다. 왜냐하면 내게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으니까.

모든 글에는 그 글을 이끌어낸 동기라는 게 존재한다.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의 탄생이 어떤 식으로 작가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그 창작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단 몇 명의 비화를 듣는 것으로도 어느 이름 모를 어느 작가에게서 듣는 창작 비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걸 상기할 수 있다. 대문호라 불리는 그들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말들을 자유롭게 주어 담아서 그 영감의 촉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자주 행간 속에 눈길이 멈출 때마다 작가란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이야기가 출발한 것일까 하고 감탄했던 순간의 답을, 이렇게 찾을 수가 있다.

 

 

어차피 세상의 속도는 제 각각 누리는 것인데 작가들이 각자 창작의 윤활유가 된 지점에는 어김없이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고 있다. 일순 시간이 정지되더니 이것이 곧 그들만의 세계를 창조하여서 한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다는 신화가 생겨 버리는 환타지다. ‘읽으면 읽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매혹적인 소설로 남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남다른 비화가 있었기 때문이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역시 고뇌했던 한 인간이었으며, 스치고 버리면 그만이었을 이야기를 여러 색으로 담아 빚어내는데 공을 들였다는 사실 여기도 새삼 상기해준다. 어쨌든 이들의 책이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새로운 해석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행운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진다.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작가가 우주에서 꼬리잡기 놀이를 하다 우연히 얻어 낸 화석처럼, 그저 평범한 돌이었던 것에 생명을 불어 넣어보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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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 공감의기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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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는 세상의 모든 말이기도, 가장 소외되거나 버려진 궁지의 말이기도 하다. 시를 읽다 보면 분명 익숙한 세상의 언어로구나 싶다가도, 매료되는 순간 마치 처음 본 눈동자에 끌리는 순간처럼 아늑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은 아마 낯설다라고 표현할 것이다. 시는 소설과 에세이에서 처럼 우리의 삶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일과 목소리, 문득 물음표가 던져지는 사사로움을 말하려 한다. 다만 응축된 언어들의 배열이 낯설어서 우리는 시를 어렵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이며 동시에 시인마다의 고유한 눈이 그 보편성을 단 하나의 언어로 변환시켜주는 혜안이 부려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는 가장 내 시야의 가장 대척점에 서서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이다. 시인은 마치 세상을 사막 위를 걷는 방랑자처럼 떠도는 자, 우주의 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모래의 무덤 위 그 세상의 가장자리를 응시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쩌면 소외된 언어를 줍는 수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부린 언어를 보고 있으면 천애 고아의 울음처럼 바람길 따라 퍼지는 울림에 그 끝을 모르고 막막함이 펼쳐지는 것 같다. 우리는 어째서 시를 사랑하는 것일까? 이리 슬픔만이 남아 떠도는데도. 물론 그렇지 않은 시도 많긴 하지만 대게 ’란 홀로 피어나고 바람결에 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이름 모를 홑씨 같은 습성이 있다. 슬픔의 대지 위에서 그 눈물의 샘을 먹고 자란 꽃, 그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의 입김에서 붉어지고 터지는 가련한 숙명이 있다. 어느새 날아가 버린 수많은 홑씨들의 언어들이 아득한 세상의 언어처럼 알알이 박히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평생 시와 연애하는 네 명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각자의 추억으로 또한 사랑만으로 이야기를 짓는다. 공통된 생각을 짚자면 이들이 생각하는 시는 변방의 풍경을 말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전형이거나 세계의 질서, 순응의 낱말과는 거리를 둔 전복적이고 일탈하며, 마구 움직이는 상상력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야 진짜 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흡사 우주의 근성과도 같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구라는 중심에서 바라보는 규칙과 질서들은 알면 알수록 얼마나 우리가 틀린 존재들인가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면서, 변화와 상상력을 모색할 때 유연한 진실이 다가오게 돼 있다. 시 역시 세상의 가장 낯설고 뜻밖의 정경을 발견할 때 비로소 교감하고 정서적인 나눔이 생겨나는 것이다.

 

 

네 명의 눈에 들어온 몇몇 시를 보고 있자니 역시 그동안 읽지 않았던 시집들에 눈이 가게 되었다. 책장에 꽂힌 많지 않은 시집들의 목록을 죽 보면서 문득 최근 들어 시집을 전혀 사지 않았다는 실감에 부끄러웠다. 아닌게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시를 사 읽는지 모르겠다. ‘전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지만, 사람들이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고 읽지를 않는다는 사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러 가지 사정이야 있겠지만 시를 읽는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럴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손에는 항시 자판과 휴대폰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여백을 지워나간다뭐라도 읽고 재미를 선사해주면 그만 아닌가 하면 또 모르지만 대개 이 매체들이 얼마만큼 유익한지는 미지수가 아닐까.

 

 

확실히 종이의 질감을 느끼면서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는 행위에는 최소한 간극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새겨질만한 순간이 포착되면 읽는 행위도 멈추게 되고 자신만의 영원한 시간이 펼쳐지게 된다. 이것이 소설을 읽든 시를 읽든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따뜻한 방법일 텐데 사람들은 이를 점점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시는 완벽한 풀이를 위한 것이 아니며, 무궁무진한 길이 펼쳐진 변화의 언어가 살아 움직일 뿐이다. 좋은 시를 읽었을 때 사람은 변화하고, 추억을 더듬기도 하는 시간을 선사 받는다. 비록 시의 언어가 우리가 말할 때와 같은 문법의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고, 전혀 가 박혀야 할 단어가 아닌데 있다는 다소 낯선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럴 때야 비로소 시가 시다워 진다는 아이러니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물론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말의 퍼즐을 맞추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고, 이 논리의 함정에서 당당히 벗어나는 읽기가 가능해질 때 진정 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시는 항상 착란하고 세상 밖을 몽상하는 일로 풍부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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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쥐어준 것, 순수하게 창작열같은 것이 피어나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게 아니라 그녀에게 이 감정이란 증오로 시작된 것이었다. 태어나 자란 시대가 꼭 그러했고 증오라도 발산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차츰 작가의 마음에는 성장의 나이테가 자라서 증오 대신 사랑의 감정이 빛을 발하게 된다. 비로소 진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라 생각했고 이는 그녀의 숱한 작품으로 진짜 세상을 담는 그릇처럼 남았다. <세상에 예쁜 것>에는 박완서 작가의 미공개 산문을 비롯한 생전에 남긴 마지막글까지 실려 있다 한다. 시대를 살아가는 것, 바라보는 것, 남길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될 것 같다.

 

 

 

 

 

 

 

이윤기, 김훈, 윤대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이름만 보아도 그윽해지는 가을 정경이 그려진다. 주제가 또 다름아닌 '사랑'이란다. 얼핏 중년 작가들에게서 상상되는 이미지는 뭉게구름처럼 저만치 있는 무게감의 사랑이다. 가령 김훈이 사랑에 대해 썼을리가 있나 의아스럽기만 한 것이. 

어쨌든 성별과 나이, 저마다의 글성향을 다 떠나 사랑을 상상하는 일은 마음이 푸짐해지고 환해지는 풍경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 사랑이 작가들의 몸을 통과해 나오면 어떤 향기를 품고 풍경을 이루는지 자못 기대가 커진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깊은 눈의 소녀를 바라보노라면 그 나이의 세계,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한번쯤 꿈꾸는 미지의 세계라는 연상이 일어난다. 언제나 비슷한 소녀 그림만을 그려오는 나라요시토모의 그림에는 이러한 매력이 있다.

<나라 48 걸스>에는 그동안의 작업 중 드로잉과 입체물을 비롯한 글쓰기가 실려있어 최근의 근황까지 알 수 있다하니 갤러리로 소풍다녀오는 기분이 들것 같다.

 

 

 

 

 

 

 

 

영국 작가 브루스체트윈 하면 여행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한다. <송라인>을 보면 전설의 방랑자라는 실감을 할 수 있을까. <파타고니아>가 처음 출간된 당시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연일 논란을 불러 일으킨 글쓰기를 시도한 모양인데, 지금의 다양한 여행기 형식이 가능해진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 책이며, 이는 송라인에 이르러 좀 더 깊이가 있어지는 모양이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채트윈이 생애 두번째이자 마지막인 송라인으로 어떤 철학적 여정을 담게 되었는지 그의 진짜 발자국을 쫓고 싶어진다.

 

 

 

 

 

 

 

 

 

 

저자 이다혜를 두고 세간의 평은 '재밌다'란 찬사로 이어진다. 씨네21를 비롯한 여러 칼럼에서 그녀의 글을 읽었을 때 단 한 문장도 그저 그냥 원고지 매수를 채우는 법 없이 알지고 참 맛깔나게 쓰는구나 생각해 왔었다. 이번 <책읽기 좋은날>은 방대한 책읽기의 놀라움 만큼이나 각각의 세계에서 끌어오는 이다혜기자만의 시각, 독자에게 전하는 독특한 삶의 방편을 제시해주어 무척 성실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모두가 그녀를 두고 재미있고 독특하다라고 부르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래서 그녀의 서가만큼의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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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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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락’ 하면 학창시절이나, 소풍, 네모난 모양의 컵라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책 <도시락의 시간>의 그것은 어딘지 경건함이 깨알처럼 뿌려진, 한 끼 식사 이상의 낱말을 지칭하는 것 같다. 들뜬 축제의 한 자락에 웃고 떠드느라 단무지만 들었어도 맛있었을 점심이 아니라, 또 어딘가 허술해보이는 엄마같은 여인이 새겨진 컵라면 속 MSG란 깊은 매력의 맛도 아닌,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먹는 흰쌀밥 그득한 네모상자를 지칭한단 소리다. 일하러 나온 사람들의 손에 들은 손수 만든 소박한 한주먹의 인생, 이것이 바로 잠시 잊었던 도시락이라는 진짜 이름이다.

 

 

사진들이 촬영물이라는걸 감안한 도시락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먹는 평소와 다르지는 않다는 걸 보면 일본인의 도시락은 참으로 정갈함이 큰 장점인 식문화란 생각이 든다. 하나같이 '이렇게 맛있어 뵈는 점심이라면 매일이라도 먹고 싶겠구나'란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지고, 두세가지만을 넉넉하게 담은 우리네 도시락이 풍경과는 사뭇 다른 조금씩 다양하게 먹는다는 인상이 들었다. 마냥 이들의 소박한 잔치를 부러워 할 수 있을것도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아 진다. 이윽고 이 작은 도시락이라도 싸오기 위해 서둘렀을 아침의 부산한 한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드는 생각은 이러한 것도 있다. ‘자영업자 아닌 이상, 아니 왜 밥도 안주는 데서 일을 해야 하나’하는 푸념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싸온 도시락에 대한 처연함이 그렁그렁 맺히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정과는 아무 상관없는듯 도시락의 매무새는 하나같이 정갈하기 그지 없어서 아이러니 한 풍경을 연출한다. 고된 삶의 첫 시작 그 쩌렁한 스타트 총소리가 절로 정신을 일깨우는 것 같아 심란하지만, 한끼 식사만큼은 부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점심이어야 한다는 듯이 이들의 도시락은 참 예쁘다.

 

 

요즘에는 그나마 점심값 챙겨주는 회사들도 물가 상승률을 따져 주는 건 아니어서 아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노동자가 부쩍 많아지긴 했다. 하물며 세계 최고 물가를 자랑하는 일본의 경우라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네보다 훨씬 전부터의 풍경이라그런지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들의 사연에는 작은 불만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 자족의 미소를 쓸쓸히 번져보이는 것 뿐, 그런 사람들의 부지런함에 놀라 자주 의아하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러한 소재의 책을 낸다면 힘겹게 살아가는 데에 대한 성토가 좀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이 편이 좀 더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세상을 향해 좀 더 발언하고 처지를 개선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부리는 한국인의 도시락이 아마 몇 배는 더 사랑스러울 것이다.

 

 

 

이 책은 각자가 싸온 도시락의 풍경과 사연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사람이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사먹는 쪽보다 건강에 더 유익하다거나, 경제사정, 개인의 취향 쪽으로 방향을 틀고 보면 도시락의 낭만을 보다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싸준 도시락이나 할머니가 추억 삼아 싼 도시락의 그것에는 분명 그런 일상의 행복따위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분명 이것 만을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저마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사정상 도시락을 들고 나와야하는 그 빠듯한 생활에 있는 것이기에.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닥 작업 환경과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로는 발언하지 않는 점이 조금 의아하다. 아닌 게 아니라 집밥이 훨씬 맛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이유로 부러 도시락을 싸온다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은가. 일단은 자족하더라도 얼마쯤은 자신의 처지를 조금씩 동정하고는 있는게 느껴진다. 알고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제 분수에 맞다고 믿는 일이 좀 더 쉬운 선택이었을 뿐인 것이다.

게다가 차분히 앉아 담소를 나누며 밥알을 씹고 한숨 돌릴 여유도 없이, 서서 대충 때우는식의 주먹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딱한 일이다. 아니 대관절 이 주먹밥은 어느 시대의 산물이란 말인가. 전쟁 때나 혹은 먼 길을 떠날 때 급히 먹던 암흑기도 아닌데 왜 이다지도 고된 식사를 해야한단 말인가.

주먹밥이 시간을 절약해주고 맛도 있다는 말은, 카모메식당 같은데서나 할 수 있는 소리겠고. 아내에게 미안해 직접 도시락을 싼다는 그이의 점심은 그래서 참으로 눈물겨운 배려로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런 것이다. 대게 서민들이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흡사 전쟁과도 같은 치열함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 시간 꼬박 땀 흘려 버는 돈이 햄버거 한개 값도 못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무표정하거나 혹은 쑥스러운 미소가 은은하게 번져 보이는 이들에게 분명 희망이 있을 테지만, 그 희망을 향하는 발걸음이 먼 길을 떠나는 자에게 느껴지는 결기마저 풍기는 것이라면 어느쪽으로 생각하더라도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밥을 푸고, 찬을 담는 일. 이 소중한 일이 작업장에서 소중한 한입으로 넘기며 또 힘내어 살아가는 인생들에는 반드시 너른 대지와도 같은 은총으로 내려지리라. 순응하고 제 일을 묵묵히 하느라 조금은 처량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일상을 만족할 줄 아는 이들의 땀에는 이래서 진솔함이 맡아지는 모양이다. 책을 보는 내내 한 장 그득히 윤기 나는 과일과 신선한 채소, 포실포실한 계란말이를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엉덩이 들이밀고 노나 먹고 싶어지는 뻔뻔함이 부려진다. 이러고도 남을 인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듭 이들의 고된 하루 중 반이 남아 있는걸 응원하고 싶어지고, 덩달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차고 넘칠만큼 상기해보고 싶어진다. 

 

 

근본적으로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무척이나 맑아서 덕분에 진짜 세상이 돌아가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책이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 우리 곁에서 여분의 젓가락을 건네며 미소를 짓는것 같다. 도시락의 시간에는 그런 따뜻한 맛이 삶을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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