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아픈 기억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그래서 긴장하고 있고, 긴장하면 소화효소가 적게 분비돼서 점점 소화가 힘들어지죠. 소화가 힘들어지기 시작하니까, 예전의 아팠던 기억이 다시 소환되고, 점점 더 불안해지고. 불안하니까 소화효소 분비가 적어지고, 그러니까 소화가 더 안 되고… 악순환이 시작되려는 거예요."

진짜 소화가 안 되려나?’
당연하다. 그걸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먹기 전부터 불안했으니 소화가 될 리 없다. 결국 소화가 안 되는 날이 하루 더 쌓이고, 이렇게 쌓인 소화불량 경험은 우리를 더 위축시키고 불안하게 만든다.

소화는 부교감신경의 담당 영역이다. 부교감신경은 그야말로 ‘부’교감신경이다. 교감신경과 경쟁하기 힘들다. 부교감신경은 오직 교감신경의 흥분이 잦아들었을 때에만 자기 역할을 슬며시 해낸다.

에너지를 써서 무언가 해야 할 때 필요한 집중, 긴장, 초조, 분노, 흥분, 불안의 신경중추가 교감신경이라면, 부교감신경은 이완, 소화, 배설의 중추이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근육이 긴장하고,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동공이 커진다. 장 운동이 멈추고 소화효소의 분비가 줄어든다. 그야말로 소화 불가! 어렵거나 낯선 사람 앞에서 꾸중을 들어가며 밥을 먹었을 때 체하고 마는 것,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교감신경이 흥분되니 소화 기능이 떨어지는 거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이거 먹고 또 체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면 소화제를 먼저 드세요. 그리고 괜찮다고, 나는 소화제를 먹었으니까 이제 잘 소화를 시킬 거라고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괜찮은 날을 하루라도 더 경험하는 게 좋아요. 오늘이 괜찮고 내일이 괜찮아야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믿을 수 있고, 그래야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어요. 불안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소화가 되기 시작할 겁니다."

심장이 멈출 것 같고 숨을 못 쉬어 죽을 것 같은 순간을 겪은 이들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순간을 다시 또 경험할까 봐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이것이 예기불안이다. 불안해질까 봐 미리 불안한 것. 그리고 이런 걱정과 불안이 결국 공황을 부른다.

"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도 이번엔 다를 수 있어요. 그러려고 약을 쓰는 것이니까요. 괜찮은 날들이 하루하루 쌓여갈수록,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내 안의 힘도 생겨날 겁니다."

근육은 뭉치면 길이가 짧아지므로 목과 어깨의 근육이 점점 짧아지는데, 이렇게 짧아진 근육이 두피의 근막을 잡아당겨, 안구 근처, 양쪽 관자놀이까지 마치 작은 헬멧이라도 쓴 듯 꽉 조이고 욱신거리는 두통이 나타난다.

엉? 이러면 나도 할 게 없는데, 어쩐다? 할 게 없으면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간 경험에서 터득한 진리다.

특히 다른 의사들이 이미 루틴한 방식대로 진료를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뭔가 모르는 게 숨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다들 실력이 좋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환자의 얘기를 더 섬세하게 들어야 한다. 무엇 때문이라고 환자가 생각하는지도 들어야 한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한 후 해부학 교과서를 꺼냈다. 목 뒤의 근육과 뼈를 보여주면서, 부딪힌 부위가 여기고, 그 아래에는 어떤 조직이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피부 밑에는 꽤 조직이 으스러진 상처가 있었을 테고, 이 조직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회복되는 바람에 지금 목 근육과 두피의 골막까지 잡아당기고 있을 수 있다고, 이것이 두통의 원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복강경 수술을 받은 환자들도 때때로 이런 종류의 복통을 호소한다. 배를 크게 가른 것도 아닌데 움직일 때마다 불편하다고 한다. 복강경 수술은 구멍을 뚫어서 카메라나 기구를 집어넣기 때문에 크게 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배를 가르는 외과 수술에서와는 달리 층층이 이어 붙일 수가 없다. 그래서 피부, 피하, 근육, 복막이 모두 한꺼번에 한 땀으로 꿰어진다. 서로 다른 복부의 여러 층들이 한데 엉겨 붙어서 흉터로 남는 것이다. 흉터는 작지만, 마치 배에 수직으로 꽂아놓은 못처럼 작용한다. 복부 각 층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니 날카롭게 당겨지는,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때는 스테로이드 주사 치료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아픔에 공감을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증의 이유를 찾아내 이름 붙이는 건, 그래서 환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건 오직 의료인만이 할 수 있다. 통증에 단순한 공감을 넘어서는 ‘적절한 진단적 공감’이 필요한 때가 있다.

신생아를 돌보는 산모들이 잘 걸리는, ‘드퀘르벵씨병’이라는 손목건초염이 있다. 아기를 들어 올리면서 손목을 자주 꺾다 보니 손목의 근육과 건초 사이에서 마찰이 생겨 염증으로 이어지는 질환이다. 드퀘르벵씨병에 걸린 아기 엄마들은 손목이 조금만 꺾여도 찌릿한 통증을 심하게 느껴, 손을 잘 쓰지 못하게 된다. 이 병은 여자들에게 잘 생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팔 근육이 약한데 아이를 주로 돌보게 되는 여자들에게 특히 잘 생긴다. 그러니까 독박 육아도 이 병의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 응급실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응급실에 산모가 오면 여러모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일단 산모들은, 증상에 관계없이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 중환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사실 본인과 태아, 두 몫이니 산모들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생식과 관련된 사망이 줄어들면서 너무 많은 것들이 ‘책임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사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아도 장애아는 태어날 수 있고, 누구도 잘못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아플 수 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사망하는 태아와 산모가 생긴다. 하지만, 이젠 그 모든 것들이 엄마들 혹은 의사들의 책임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외로워서 위태로운 그녀들과 공명하기 위해 나는 그녀들의 몸에 집중한다. 아기가 아닌 그녀들에게 집중. 아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몸을 만드세요!

재개발과 도시재생이 가장 다른 점은 원래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일 것 같다.

노인정에 가려 해도 어디인지 잘 모르겠고 모두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십상이어서, 결국 집 안에만 계셨다고 한다. 요리도, 장 보는 일도, 청소나 빨래도 굳이 할머니가 직접 할 필요가 없는 아들과 며느리의 집에서, 할머니는 잘 유지해오던 일상적인 기능을 일시에 잃어버렸다. 기억력과 판단력 등 인지 기능도 순간에 놓쳐버렸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거나 인지 기능이 떨어진 분들일수록 그런 적응이 힘들 수밖에 없다. 반평생을 살던 정든 동네에서 갑자기 쫓겨났으니, 그 상실감과 당혹감이 얼마나 컸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오래 살아오던 그 집에서 내쫓겨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치매 어르신과 함께 살기를 준비하는 일본 나고야의 한 마을에 간 적이 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인지 기능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그런 마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치매 노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알려 그 지역에서는 차들이 지나갈 때 속도를 줄이고 조심해서 운전을 하도록 캠페인을 진행하고, 길 잃은 치매 노인들을 잘 안내하고 치매의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주민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치매에 대응할 교육을 받은 주민들은 오렌지색 링을 팔찌나 목걸이로 달고 있었다. 이 링을 달고 걷는 사람들이 마을에 많아질수록 점점 더 안전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치매는 분명 뇌의 퇴행성 질환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질환이기도 하다.

나는 비혼이고 자녀가 없다. 치매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나 같은 손녀는 내게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랑하는 우리 동네가 재개발되어 싹 다 갈아엎어지지 않도록, 골목과 가게들을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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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배가 아파서 너무 오랫동안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그랬어요. 몇 년 동안 그렇게 살다가 정신과 진료 받으면서, 이제 조금씩 먹고 마시고 일상을 누리고 있었죠.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배가 아프니까, 무서웠어요. 예전처럼은 아닌데, 비슷한 느낌으로 아프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그럴까 봐 불안한 거죠. 점점 소화도 안 되고요."
환자들의 얘기는 가만히 들으면 대부분 진단명이나 해결책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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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극작가로서 체호프의 능력은 낮게 평가했지만(톨스토이는 그의 희곡들이 정적이고 도덕적 비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자네의 인물들이 자네를 어디로 데려가나?" 그는 체호프에게 따진 적이 있었다. "소파에서 폐물 창고로 데려갔다가 돌아올 뿐이야.") 체호프의 단편은 좋아했다. 더욱이, 아주 간단하게, 그는 이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고리키에게 말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인지. 소녀처럼 겸손하고 조용해. 심지어 걷는 것도 소녀 같아. 그냥 멋있어." 톨스토이는 일기에(당시에는 모두가 일기를 썼다) "기쁘게도 체호프를…… 사랑한다"고 썼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모두(인간이나 동물 모두) 하나의 원리(예를 들어 이성 또는 사랑) 속에서 계속 살 것이고 그 본질과 목표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라고 가정하고 있다…… 나에게 그런 종류의 불멸은 쓸모없다.

체호프는 톨스토이와 달리 내세를 믿지 않았고 믿은 적도 없었다. 오감 가운데 하나 또는 몇 개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절대 믿지 않았다. 그는 인생이나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관련하여 누군가에게 자신은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매달 바꾸기 때문에, 내 주인공들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죽는 방식, 또 말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것으로 내 일을 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에 이르기까지 밀고 당기는 걸 더 좋아했다.

체호프는 엄청나게 행복했다. 그는 올가를 자신의 "조랑말", 때로는 "개"나 "강아지"로 불렀다. 동시에 "귀여운 칠면조"나 그냥 "내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

이 닥터 에발트는 자신이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것에, 또 체호프가 그렇게 병든 것에 격분했다.

그의 수명은 한 달이 남지 않았다. 이제 체호프는 자신의 상태에 관해 말할 때, 올가에 따르면, "거의 무모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6월 13일, 죽기까지 석 주도 남지 않았을 때 체호프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건강이 회복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편지에서 말했다. "일주일이면 완전히 나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본인이 의사였고 자신의 상태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호텔방 발코니에 나가 앉아 기차 시간표를 읽었다. 마르세유에서 오데사로 가는 배편 정보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알았다. 이 단계에서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의 맨 마지막에 쓴 편지에서는 누이에게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어." 그는 올가에게 말했다. "작가로서 끝났다는 느낌이야. 모든 문장이 무가치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중단하지 않았다.

닥터 슈뵈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체호프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의사였고 체호프는 비록 박약한 힘이기는 했지만 생명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닥터 슈뵈러는 피하주사기를 준비하여 심장박동을 빠르게 해준다고 하는 장뇌를 주사했다. 그러나 주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물론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사는 올가에게 산소를 가지러 사람을 보내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갑자기 체호프가 정신을 차리더니 맑은 정신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게 오기 전에 나는 시체가 될 건데."

닥터 슈뵈러는 커다란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체호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작가의 뺨은 잿빛으로 우묵하게 꺼졌고 안색은 밀랍 같았다. 숨은 거칠었다. 닥터 슈뵈러는 몇 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아무 말 없이, 올가와 상의하지도 않고 전화기가 달려 있는 벽감으로 갔다. 먼저 전화기 사용법을 읽었다. 어떤 단추를 손가락으로 누른 채 전화기 옆면의 손잡이를 돌려 전화기를 작동시키면 호텔의 아래 구역, 즉 주방과 연락할 수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귀에 갖다댄 뒤 사용법에서 시킨 대로 했다. 누군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을 때 닥터 슈뵈러는 호텔에서 가장 좋은 샴페인을 한 병 주문했다. "잔은 몇 개나?" 그는 질문을 받았다. "셋!" 의사가 송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서두르쇼, 알아들었소?" 보기 드문 영감의 순간이었다. 너무나도 적절해서 불가피해 보일 정도라 나중에 보면 영감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순간.

그는 몇 마디 조의를 전했다. 올가는 고개를 숙였다. "영광이었습니다." 닥터 슈뵈러가 말했다. 그는 가방을 들더니 방을 떠났고, 나아가서 역사를 떠났다.

바로 그 순간 샴페인 병의 코르크가 펑 튀어나갔다. 테이블로 거품이 쏟아져내렸다. 올가는 체호프의 침대로 돌아갔다. 그녀는 발판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가끔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람의 목소리, 일상적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기록했다. "오직 아름다움, 평화, 그리고 죽음의 장엄뿐이었다."

그는 여자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마음에 기침을 했지만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유명한 외국인 손님들은, 그는 말했다, 원한다면 오늘 아침에는 자기 방에서 아침을 먹을 수도 있다. 젊은이(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아마도 1차대전에서 죽었을 것이다)는 기꺼이 쟁반을 하나 들고 오겠다고 말했다. 쟁반 두 개, 그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멈칫대며 다시 침실 쪽을 흘끔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프런트데스크 담당자에게 어디에 가면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의사를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기를 바랐다. 믿을 만한 사람, 자기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고 태도가 그에 어울리게 신중한 사람. 간단히 말해 위대한 예술가에게 걸맞은 장의사. 여기요, 그녀는 말하고 돈을 그의 손에 대고 눌렀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댁에게 특별히 이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세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한 독자로서 옮긴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카버는 어디에서도 카버다, 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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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난 속에서도 인간은 창조적으로 재생한다, 그것이지금 제가 와 있는 문학적 주소이며 ‘군함도』도 그 하나입니다. - P102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문서나 사진이 아니라, 제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일본을 알기 위해 상당히 깊이 가부키를 공부했고, 정식으로 일본의 다도 우라센케(裏千家)를 배웠습니다. - P107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몫이 아닌 불행과 끊임없는 불평등과 삶 그 자체를 뒤흔드는압제 속에서도 언제까지 살아가야 하는가는 오랜 의문으로남았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그런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살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때 그 싸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일어나야 하고싸워야 하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그 가치를 위해 자신을불사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는 이 소설을 썼습니다. - P109

과거사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피해자로서의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입니다. 피해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그 과거사는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세상을떠나면서 이 현재는 과거로 화석화됩니다. 사람들은 하나씩잊어가고, 지겨우니 ‘이제 좀 그만하라‘고 말하는 집단이 생겨나고, 해결이나 청산에 대한 노력은 힘을 잃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과거에 대한 ‘문화적 기억‘입니다. 그것 - P110

을 여전히 살아 있는 오늘의 문제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문화적 기억‘이 나서야 합니다. 기념관의 전시물이 아닙니다. 소설이 이야기하고 영화가 환기시켜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고 연극과 뮤지컬이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고 노래와 춤이 사라지는 이 과거가 화석화하는 것을 막으며 끊임없이 현재의 것으로 되살려놓아야 합니다. 문화적 기억만이 해낼 수있는 일입니다. - P111

게다가, 한국 사람은 이상스럽게도 사고를 당하면 ‘도와주세요‘ 하지 않고 ‘사람 살려라‘ 하고 소리칩니다. 자신을 제3자로 객관화시킵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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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기억력이 좋다. 내가 읽은 모든 글을 기억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는 이름과 날짜, 또 발명, 전투, 조약, 동맹 등을 외우는 능력 덕분에 상을 탈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우리가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은 창밖으로 날아갔어. 점차 책임들이 당신을 짓눌렀지. 당신 일은 점점 중요해졌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쥐어짜내야만 했어. 그러다 애들이 집을 떠나면서 우리가 이야기할 시간이 돌아왔지. 우리는 다시 서로를 갖게 됐어. 다만 할 이야기가 점점 줄었지.

나는 분노 대신 공황을 느끼기 시작했다. 복도를 내려다보면서 점점 두려워졌다. 모든 게 전과 같았다?거실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고 라디오는 조용한 음악을 내보냈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녀가 뜨개질하는, 박자를 맞추어 딱딱거리는 위로가 되는 그 소리,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거실 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뭐라고 해야 하나??배짱이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호기심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 순간살살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뒤에는 틀림없이 문이 조용히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나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이걸 실제 있었던 그대로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식으로 말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녀가 말했다. "여자애가 하나 있었어, 봐. 듣고 있어? 이 여자애는 이 남자애를 무척 사랑했어. 자기보다 훨씬 사랑했어. 하지만 남자애는?뭐, 성장을 했지. 남자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뭔 일이 있었겠지 뭐. 남자애는 잔인해지려는 의도는 없었는데도 잔인해졌고?"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고, 그 순간 생각이 떠올랐다.저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게 내 마음을 지나간 생각이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비틀거렸다.

"한 번도 때린 적 없습니다. 결혼생활 내내 단 한 번도. 몇 번 그럴 만한 일이 있었지만 때리지 않았어요. 저 사람이 나를 한 번 때렸죠." 내가 말했다.

"원하는 대로 부르세요," 보안관보가 말했다, "저녁 먹을 시간에 늦었다고 부르는 것만 아니라면.*"

내가 아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건 픽업의 캡에서 성냥불이 타올랐을 때였다. 나는 그녀가 담배를 물고 목장주가 내미는 불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숙이는 것을 보았다. 성냥을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빵"이나 "삐"나 "펑" 같은 단어를 더 자주 사용해야 한다?특히 대학살 이후의 심각한 상황이나 끔찍한 사건이 온 나라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울 때는. 그게 "빵" 같은 단어가 필요할 때이고 그런 단어는 황동 시대의 황금이다.

아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독일어와 화학과 물리학과 역사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알았다. 찻잔을 제대로 쥐는 법을 알았다. 요리하는 법과 사랑을 나누는 법도 알았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가령 아내를 얻는 것은 역사를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이제 역사 바깥에 있는 셈이 된다?말과 안개처럼. 또는 내 역사가 나를 떠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는 내가역사 없이 계속 가야 한다고. 또는 이제 역사는 나 없이 존재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아내가 편지를 더 쓰거나, 가령 일기를 쓰는 친구에게 말을 하지 않는 한.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 이 시기를 돌아보고 기록에 따라, 그 조각과 장광설에 따라, 그 침묵과 빈정거림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 그 순간 자서전이 이 가엾은 남자의 역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역사에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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