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엄청난 구매력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신용카드라는 걸, 업자의 입장에서 고맙게 생각했다. 만일 현금으로 그 많은 물건 값을 받는다면 은행까지 운반하려고 해도 돈을 가마니에다 넣고 꾹꾹 발로 눌러 담아 트럭에 실어야 할 것 같았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이 축재한 돈의 액수를 부피로 환산해서 말하는 걸 들을 때의 혐오감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돈과 사람과 물건이 넘치는 세상이었다. 뭐가 없거나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단지 돈을 주체 못 해 쇼핑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 손자라고 없는 게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깬 듯 부수수한 얼굴이었다. 내가 먼저 사과를 했다. 자고 있었다면 깨워서 미안하지만, 졸리면 집에 가서 편히 자야지 그런 불편한 자세로 자면 쓰느냐고 말하다 말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암말 안 했지만 참 별꼴 다 본다는 불손한 표정이 역력해서이기도 했지만, 소녀에게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어서였다.
소녀의 옷차림은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거였고, 머리 모양도 약간의 멋을 낸 티가 귀여운, 그 나이의 평균치의 머리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정말이지 딴 소리는 한마디도 안 하고 간간이 "뻥까지 마, 쌔끼야"라는 같은 소리로만 일관하는 통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평소에 편리하게 느꼈던 전화카드라는 게 다 원망스러웠다. 용건 없이 긴 통화가 다 그놈의 전화카드 때문인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같은 소리의 반복 때문에 더 길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내용인지 엿들을 수만 있어도 한결 지루하지 않게 기다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게 거두어주는 집은 있을지 모르지만 타인과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가족이 있는 집은 없는 아이처럼 보였고, 괜히 백화점 안을 쏘다니는 소년 소녀들의 태반이 완전한 집은 못 가진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연결이 된 손자와의 통화도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만들기가 복잡하고 어려운 조립을 사 달라고 했다. 나는 손자가 완성된 장난감보다 조립을 좋아하는 걸 예쁘게 여겼기 때문에 쾌히 승낙을 했다. 그러나 덧붙이는 말이 이왕이면 일제로 사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국산은 부품끼리 잘 맞지를 않고, 완성된 후에도 작동이 제대로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어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산타 할머니도 못 해 먹을 노릇이었다. 우울한 날이었다.
남보다 아이를 많이 낳아 늘 집안이 시끌시끌하고 유쾌한 사건과 잔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늘 그렇게 살 줄만 알았더니 하나둘 짝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고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식구가 허룩하게 줄고 슬하가 적막하게 되었다.
딸애들이 한창 혼기에 있을 땐 어떤 사위를 얻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도 화제는 주로 시집보낼 걱정이었다. 큰 욕심은 처음부터 안 부렸다. 보통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 보통 사람이지 보통 사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대라면 그때부터 차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살기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을 것, 식구끼리는 화목하되 가끔 의견 충돌쯤 있어도 무방함, 부모가 생존해 계시되 인품이 보통 정도로 무던하여 자식에게 보통 정도의 예절과 공중도덕을 가르쳤을 것, 학력은 내 자식이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은 나와야겠지만 일류냐 이류냐까지는 안 따지기로 하고 그 대신 적성에 안 맞는 엉뚱한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나마나이면 절대로 안 되고, 용모나 키도 보통 정도만 되면 되지만 건강할 것, 돈 귀한 줄 알고 인색하지 않을 것, 등등이었다.
나는 그만하면 욕심도 너무 안 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윗감은 쌔고 쌨으려니 했다. 그러나 웬걸, 막상 나서는 혼처는 하나같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으면 처졌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내세운 조건은 어쩌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인지도 몰랐다.
그러면 내 집은 남이 보기에 보통일까? 거기 생각이 미치자 그것조차 자신이 없는 게 아닌가. 우선 주부가 글을 쓴다고 툭하면 이름 석 자가 내걸리고, 살림은 건성건성 엉터리로 하는 가정이 어디 보통 가정인가. 나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생활 정도나 학벌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훨씬 밑돌았지만 그는 보통 이상 날카로운 사회적 안목과 비판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통 사람다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큰 욕심 안 부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좀더 잘살고 자식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르치고 싶다는 건전하고 소박한 꿈이었다.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에서 노력한 만큼만 잘살기를 바라고 딴 욕심이 없다면 그건 보통 사람을 훨씬 넘은 성인의 경지이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아마 나의 가장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만 내세워 자식들의 배우자를 골랐더라면 생전 시집 장가 못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 마음에 드는 짝을 제각기 찾아내서 부모의 승낙을 받고 슬하를 떠났으니 큰 효도한 셈이다. 아직도 보내야 할 자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을 찾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 지 오래다.
서른둘이 되도록 시집을 안 가고 있는 딸을 둔 내 친구는 보는 사람마다 붙들고 중매 서라고 조르는 버릇이 있다. "바지만 입었으면 돼." 그게 내 친구의 사윗감에 대한 간단명료한 조건이다. 그러나 서른두 살 먹은 그 처녀는 치마 입은 총각이나 나타나면 시집을 갈까, 바지 입은 총각들한테는 흥미 없다는 낙천주의자다. 나는 그렇게 초조해하는 친구보다 그의 딸의 느긋한 여유가 한결 보기 좋아서 친구한테, 그 애는 결혼 안 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애니 제발 좀 내버려두라고 충고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사람 노릇도 못 하고 나서 행복 불행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담 내 친구는 행불행 이전의 최소한 사람 노릇을 보통 사람의 전형으로 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과도, 신문사에서 뽑은 보통 사람과도 다른 또 하나의 보통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통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다가는 내가 보통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정말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모르겠다. 지금 누가 나에게 보통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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