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처럼 모방을 못하는 사람은상상력이 부족한 거죠, 우리 방식 외에는, 그 바깥 것은보질 못하잖습니까………… 우리 모두 고약하고 좀스런 내셔널리스트예요. 그에 비해 외국인은, 이방인은, 자기를 위조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자신을 받아 준 사회의 문화를 모방해야만 하죠. 우린 말로는 독창성과 오리지널리티를 높이 평가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닮고 싶어 하죠. 심지어 서로의 차이조차 고만고만한 차이이길 바라고요. 내 말 알아듣겠어요, 베넷? - P51
나는 배우가 단 두 단어만으로도 실로 많은 걸 전달할 수 있단 사실을 배운 터였다. - P51
인생이 고될 때는 글도 안 써지고 무엇에든 열려 있는 자세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다고 모든 걸 차단해 버리면 소재도 못 건지게 된다. 나는 주요 저서만 열 권 추려 헛간에 가져가기로 마음먹었고, 거기엔 기욤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실비아플라스, (그날 밤 벌들을 통해 내게로 그 영이 날아들었던)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인체 해부에 관한 책, 그리고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신화에 대해 쓴 책이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 헛간 선반이 거의 비어 있었던 셈인데, 실리아의먼지 날리는 헛간에 과거 내 질서정연하던 서재의 한 버전을 재현하고픈 마음은 어차피 없었다. - P51
"모두가 타인이며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이 아니다." 으음, 네. 이건 내 초창기 각본에서 라벨리가 베넷에게 전달하고자 한 내용이기도 하다. 헛간에 앉아 하이데거를 읽을 때마다, 나는내가 베넷임을 깨달았다. - P52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도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도 없이 오히려 그 중간 어디께 있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경계에서 서성이며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 P52
그래, 전기 자전거에 올라타는순간 운전 중에 분노하는 단계로 진급하고 만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난 삶에서 쌓인 분노가 도로 위에서 분출되기에 이른 셈이었다. - P53
나무 뒤에도 안 된다. 잠시 세워 두는 것도 안 된다. 다정하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속아아기 염소들이 순순히 문을 열어 주거든 들이닥쳐 잡아먹을 속셈으로 사납고 거친 목소리를 숨기는 늑대의음성이었다. 어미 염소는 어디 가고? - P54
진은 자기가 내 힘든 인생을더 힘들게 만드는 이유가 화보다도 설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리려 부단히도 애썼다. - P55
코미디 영화 속 한 장면만 같았다. "어휴, 어쩜매번 이리 바쁘실까." 진이 말했다. "볼 때마다 바빠 바빠바빠예요." 진은 시간이 많은 모양이었다. 진은 히스테리컬한 희열감에 들떠 있는 반면 나는 침착한 와중에도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섯 개나 되는 장바구니를 주섬주섬 들어 올리기 시작하는데 목에서 진주 목걸이가 툭 끊어졌고, 차르르 쏟아진 진주알이진의 실용화 주위로 흩어졌다. - P55
"후면 주차장에서부터 끌고 오려니 좀 무거워야죠, 게다가 알다시피 나도 이젠 나이를 못 속이잖아요." 내입에서 이런 단어들이 이리도 사근사근하고 이해심 많은음성을 타고 흘러나온 게 놀라웠다. 진은 눈을 깜박이며속으로 꿀단지를 다섯 개쯤 더 삼키는 눈치였다. 그러고선한다는 말. "글쎄, 만날 그리 바빠 바빠 바빠 하면서 슈퍼마켓 배달 서비스 써볼 생각도 안해봤어요?" - P58
내가 평소 자랑스레 여기는 팁도 있었다. 멜론이나 파파야류의 과일이 익었는지 확인할 때 과일 양 끝을 동시에눌러 보는 방법이었다. 이때 과육이 손상되지 않도록 아주 살며시 눌러야 했는데, 과일이 익었다면 손끝에 닿는느낌이 단단한 귓불 정도의 촉감이어야 했다. 어지간해선 틀리는 적이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아니요, 냉장 배달 차로 주문한 과일을 배송받을 생각일랑 없습니다. 온라인으로 구매한 과일을 인간 귀와 비교해 봐 달라고 운전사에게 부탁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 P59
아이들과 전기 자전거가 어쩌면 내 유일한 행복인지도 몰랐다. - P60
질문 하나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이남자가 원하는 건 아무래도 자기에게 열중하는 매혹적인 여자인 듯했다. 자기 옆을 지키며 저 대신 카나페를 날라 주고 자기가 유일한 화젯거리여야 함을 이해해 주는여자. 머리도 눈썹도 은발인 남자에게 나는 속으로 빅실버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 P61
1960년대에 스터즈 터클과 한 인터뷰에서 볼드윈은 미국 내 인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런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다. "본인의 이름을 배우기 위해 당신은 내 이름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나는 생각했다. 빅실버한테 내가 정말로 해야 할 말도 이비슷한 말이야. "당신은 내 이름을 배워야 해요, 그래야내가 당신 이름을 배우니까요." - P62
여자를 억압하기 원하는 것부터가 수수께끼다. 여자가 여자를 억압하고 싶어 하는 건 그보다도 더 수수께끼다. 그만큼 우리 여성들 힘이 막강하고 그렇기에 항시 억압하려 들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짐작할밖에. - P62
"흠, 어디 보자." 내가 대답했다. "오늘 오후엔 쉼표를쓰느냐 마느냐를 두고 내 원고의 교열을 본 편집자와 옥신각신했어요. 교열자는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 내 글에쉼표를 더 집어넣었으면 해요. 쉼표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쉼표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해요. 사방에 쉼표를삽입하려 들어요. 비아그라라도 삼킨 쉼표랑 같이 일하는 기분이라니까." - P63
나는 긴장해 손이 조금씩 떨리는 사람들을 믿는다. - P67
사실 난 침착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여성성의구태의연한 정의에 따르면, 침착함은 여성성이라는 문화적 인성 중에서도 주인공 격에 해당하는 특성이다. 그녀는 침착하고 그녀는 인내한다. 그래, 견디고 고통받는데 소질이 있다 못해 실은 인내와 고통이 그녀 이야기의진짜 주인공인 건지도. - P76
주인공들의 삶속에억압되어있던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영화의 문법으로 드러낸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는 유난히 큰 빚을 졌다. 뒤라스는 인간 주관성의 최대 극한까지 바짝 밀어붙인 언어를 영화를 통해 창조해 냈다. - P78
나는 70대에 접어든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캘리포니아 집에 딸린 수영장옆에 앉아 타자를 치는 나. 햇빛에 피부가 상한, 내로라하는 시네마의 귀재다. 대본을 타이핑할 때조차 수영복차림을 고집하기로 유명하며, 언제고 파릇파릇한 열대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열대 식물은 마음을 활짝 열어 주고새로운 가능성을 부른다. 점심때면 스태프진이 칵테일을 흔들어 잔에 따르고, 싱싱한 오징어를 바비큐 그릴에얹어 요리해 준다. - P79
그럼 내 아이들은 어디 가고? 아이들은 무슨! 이미 클 만큼 커서 저마다의 삶을 사느라 바쁘고, 엄마한테 전화라도 걸려 올까 조마조마해하고 있을 텐데. 엄마야, 캘리포니아에 있대. ו - P80
"젖은 옷은 벗고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하고오지 그러니?"라고 말해 줄 어른이 주위에 없었다. 나는혼자였고 나는 자유였다. 관리되는 것도 거의 없고 수도나 전기 같은 기본 시설마저 수시로 끊기는 집에 따라붙는 막대한 관리비를 지불할 자유가 내게 있었다. 식구를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다해 가는 컴퓨터에 글을 쓸 자유가 내게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조연과 주연에 해당하는인물 명단을 작성해 영화사 중역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야 했다. - P81
아이들은 큼직한링 귀고리를 하고 입에는 립글로스를 바르고 있었다. 삶에 미치고 삶에 열광하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하는말은 흥미롭고 예리하고 배꼽 잡게 웃겼다. 얘네라면 세계를 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른 건 모두 잊었다. 딸과 딸 친구들과 릴리와 내가 남김없이 먹어 치운 차에 치인 통닭살처럼, 모두 사라졌다. - P82
사랑과 거리를 둔다는 건 위험 부담이 없는 삶을 산다는의미다. 그런 삶을 살아 뭐 해? - P83
사랑 없이 사는 건 시간 낭비다. 나는 글쓰기 공화국이자어린이 공화국에 살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아니니까. 그래, 난 그와는 다른 정거장(결혼)에서 하차해 역시나 다른 승강장(자녀)으로 이동했다고봐야 했다. 그는 내 뮤즈였지만 나는 명백히 그의 뮤즈가아니었다. - P83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랑 없는 삶이 시간 낭비임을 알았다. 사르트르를 향한 그의 꾸준한 사랑은 호텔에서 생활할 것, 사르트르와 가정을 꾸리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를 전제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은데, 1950년대만 해도 이런 선택은 지극히, 어쩌면 보부아르 본인이 자각한것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서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보부아르는 51년에 걸쳐 사르트르를 자기인생에 있어 필수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에 헌신했다. 보부아르는 자기가 자녀를 원치 않으며, 사르트르의 아침 식사를 차린다거나 여타 심부름을 할 마음도없고, 그에게 더 사랑스럽게 보이고자 세계와 지적으로공감하고 교류하고 있지 않은 양 시늉할 생각 또한 추호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 P84
"나는 삶의 모든 걸 누리고 싶어. 여자이고 싶고 남자이고 싶고, 친구가 많은 동시에 외로움을 누리고 싶고, 많이 일하고 좋은 책을 쓰고 여행을 하고 즐기며 지내고 싶어 .…" - P85
호텔에서 눈뜨지 않는 기분이 어땠을까? 연인의 집에서 손님으로 지내는 기분이? 짐작건대 올그런이 가구 몇점과 전구 정도는 집에 장만해 두었을 테니 말이다. 보부아르를 초대한 건 올그런이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둘 사이의 연애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는 보부아르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바라는 것을 진솔히 밝혔다. "나만의 주거 공간과 그곳에서 나와 함께 지낼 나만의 여자, 그리고 어쩌면 나만의 아이까지도. 이런 걸 바라는 게 유별난 건 아니지." 그래, 그런 좋은 것들은 하나도 유별나지 않다. 다만 자기가 치러야 할 대가가 올그런이 치러야 할 대가보다 크단 걸 보부아르는 알았다. - P86
제발 파리를 버리고 시카고로 와 함께 살자고 올그런이 사정했을 때, 보부아르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난 행복과 사랑만을 위해살 수 없어. 내 글쓰기와 일이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곳일지도 모를 이곳에서 계속 글을 쓰고 일을 하는 걸 단념할 순 없어." - P86
얼마 후 남자는 여자의 샌들, 팔찌, 선글라스와 가방, 자기 카메라와 선크림 그리고 휴대폰을챙겨 그늘진 테이블로 뒤따라 자리를 옮겼다. 남자의 삶속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그로 하여금 모든 짐을 짊어지고 모든 입맞춤을 자진할 만큼의 용기를 준 것이다. 이렇듯 남자가 그를 더 원하는 상황에서 여자는 남자의용기를 꺾지 않으면서도 그런 대화의 운을 떼기 위해 어떤 방안을 모색해야 할까? - P87
진심이 담긴 내용을썼다 싶으면 곧바로 자기를 비하하는 농담을 적어 애써매듭을 풀어 얻어 낸 진실을 폄하하고 있었다. 이건 혹시인정받거나 사랑받기 위한 시도려나? 그런데 재능을 숨기라고 요구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이기는 한가? 이 제자가 자기에게 영감을 주는 이들로 꼽은 작가 중에는 루시슈오브란 이름으로 태어난 시인, 예술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가 클로드 카엉Claude Cahun도 있었고, 옆구리엔 늘 정신의학자이자 혁명가이며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에서 태어난 프란츠 파농이 쓴 『검은피부, 하얀 가면들』을 끼고 다녔다. - P88
"아,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천재라는사실을 알려 줬다고 나한테 선물을 줄 필요는 없어요." - P90
엄마가 된 여성들이 배우는 "치명적인 인내심"이 그들스스로를 해치는 길임을 보부아르가 앞서 바르게 짚어내기도 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겐 이런 인내심이없었다. - P90
우리의욕망을 주장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차라리 그런 욕망들을 조롱하는 게 더 마음 편하기 마련이니까. - P90
오히려 한겨울에도 자기 안엔 불굴의 여름이 깃들어 있노라 선언했던 카뮈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 P91
우리가 알기를 꺼리는 것들이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너무 면밀히 바라보려 들지는 않는 것들이 아닐까추측했다. 프로이트는 아는 것을 알지 않으려 하는 이런소망을 동기화된 망각motivated forgetting이라 불렀다. - P95
시몬 드보부아르가 일러 주었듯 힘과 성공을 남자 몫으로 간주하는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를 능가해서는 안 된다. 남자가 여자의 재능에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그리고 여자들에 관해 역사적으로 행사해 온 길고 긴 지배의 특권을 (현대적인 요소를첨가해) 수월히 이어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동시에 여자는 자기의 힘을 숨겨야만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치명적인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 - P98
여자란 바라보이는 대상이어야지 바라보는 주체여서는 안 된다는 게 통설이니까. - P100
노년에 들어 어머니는 "물에 몸을 맡기는" 수영법을 터득했다. 요컨대 물속에서 뒤로 드러누워 "생각을 비우는" 동시에 "흐름에 항복하는" 기법이었다. 햄스테드 히스에 있는 수영 연못에서 내게 이 기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오리와 잡초, 낙엽이 부유하는 검은 수면에 오필리아처럼 드러누운 채로. - P102
꿈에 젖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라고? 우리는 우리 너머를 바라보며 다른 곳에 있기를 갈망하는 어머니를 원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발 디딘, 활기차고 능력 있고 우리의 필요와 요구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 P103
내가 보기에 어머니란 존재는 언제나, 또는 거의 언제나, 즉 어린 시절과 어린 시절 뒤에 오는 생애 전체에 걸쳐, 광기를 상징한다. 우리의 어머니란 우리가 만난 사람 중에서 언제나 가장 희한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살림살이』La Vie matérielle - P105
때로 우리는 소속되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소속되지 않기를 바라기 마련이다. - P106
잡히상상으로나마 자유롭다고 여기지 못한다면, 우리는스스로에게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P106
죽음은 또한 언제나 부조리하다는 점을 마침내 시인하자, 그 공포의 손아귀에서 죽이는 기분이었다. 가게 바닥에는 것은 신발에 리튬이 상하지 말라고 판지 상자가 깔려 있었다. 함께 웃는 사이 축축하고 얼룩진 판지가 우리 발밑에서 미끌거렸다. 터키계 형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어떤 면에서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도 더 자세히 설명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P112
아주 어린 나이부터 우리는 자기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 적당한 언어를 찾는 것 못잖게 중요한 순간들도 있다. - P115
나딘 고디머 옆에 앉았어. 아주왜소하고 말랐는데 새처럼 총기가 넘치더구나.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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