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 그냥
오래오래/ 고맙다는 말만 하고 살자

거울 앞에서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

머리를 빗질하다 보니
평생 무거운 수건 속에
감추어져 살아온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서
떨어지며 하는 말
이젠 정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도할 시간이
길지 않아요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깨우쳐주어 고맙다고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 있다고
창밖에는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하고!
나를 부르고!

칭찬과 위로를 받을 적엔
너무 기뻐
위로 위로 잎사귀를 흔드는
노래의 나무였다가
오해와 미움을 받을 적엔
너무 슬퍼
울지도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
고독을 삼키는
침묵의 나무였다가

사랑의 비밀은
기쁨보다는
슬픔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푸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지

시간은 언제나 살아서
새 얼굴로 온다
빨리 가서 아쉽다고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고
새 얼굴로 다시 오는 거라고

아프다고 힘들다고
푸념하는 그 시간에
오늘도 조금씩
인내와 절제로 맛을 내는
희망을 키워야지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
우는 사람부터
달래야겠다

아아 이제
내 남은 시간들을
어찌 살라고

햇빛은
저리도 눈부신지!

지금껏 나는
아파도 슬퍼도
늘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꾸만 말하니
행복도 늘어나서
나는 감당을 못 하였지

평범함을 통하여 깨우치는 비범함이여
어리석음을 통하여 깨우치는 삶의 지혜여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아픔이 준 선물




아픔이 선물이란 말을
전에는 믿지 못했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

두 무릎을 한꺼번에 수술하고
집에 온 어느 날

피도 많이 빠져나간 후
뼈와 살이 한꺼번에 아프니
울지도 못하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조심스레 몸에 대는 순간

창밖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는데
아무리 아파도 나는 살고 싶었지
꽃처럼 웃고 싶었지

이제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속삭이네

아픈 만큼 철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밝아지는 게 사실이라고

힘든 수업료를 지불한 만큼
나는 행복을
보상받은 거라고!

앞으로의 남은 날들이
어느 날부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될 거라 생각하면
종일토록 우울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스스로 사물을 분간하며
내 손으로 밥을 먹고
내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을
꼭 허락해 주세요

병명 없는 통증도 순하게
받아 안을 테니
오랜 세월 길들여 온
일상의 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건강과 자유는
허락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그동안 내내
남을 위해서만 기도했으니
오늘은 좀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도 되는 거지요?

얼마나 더 사랑해야
웃어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인내해야
내가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겸손해야
떳떳할 수 있을까
수도원에서
반세기를 살며 고민했어도
시원한 답이 없네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 것
고운 말을 쓸 것
음식을 절제할 것
기도를 정성 들여 할 것
그리고 또……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 그냥
오래오래
고맙다는 말만 하고 살자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우정
평화와 기도를
시들지 않는
꽃으로 만들자
죽어서도 지지 않는
별로 뜨게 하자
사랑하는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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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다 못한 일은 다시 오늘의 짐이 되어 나의 하루를 시작부터 무겁게 한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논하는 이 대작을 집필했을 때 칼 세이건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다.

천문학만 알아서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 생물학도 알아야지, 화학도 알아야지, 그의 위트와 감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와 종교,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와 천문학계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좋은 작품이고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뭐 꼭 나까지 그렇게 같이 좋아야만 하는가 싶은 바로 그 표정 말이다.

저명한 천문학자 크리스 임피도 『우주 생명 오디세이』에서 "칼 세이건은 선동가이자 엔터테이너였다"고 썼다.

땅에 떨어져야 운석이고, 아직 떨어지기 전에 불타고 있는 건 유성이라 부른다고 대답했다.

천문학을 비롯한 많은 과학 분야가 국민이 낸 소중한 세금에서 연구비를 받고 있으며, 과학계 종사자임을 밝히면 듣는 사람은 대개 "오~"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이 직업을 존중해준다.

우린 항상 잘 모른다. 자연은 늘 예외를 품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이 언제나 어디서나 진실이다.

과학자들의 의심은 남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습격당한다.

과학자들은 그 말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다.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의심하고, 그 답을 구하려 애쓰며, 답을 찾은 뒤에도 과연 답이 하나뿐인지 또다른 측면에서의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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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추모 영상물을 보고 그가 제작한 독립영화들을 보았다. 그가 힘겹게 숨결을 모아 뱉은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형, 우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뭐 하는 사람이지??형, 우리는 감동을 줘야 하는 사람이야."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내 몸이 아직 몇년 정도, 대충 육년에서 십년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몸을 아낀다거나 마음의 동요와 이런저런 어려움을 피해갈 생각은 없다. 좀더 오래 사는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 없다. 내가 명심하고 있는 것, 그것은 수년 내에 분명한 과업 하나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십년이나 떠돌아다녔기에. 내겐 갚아야 할 부채와 완수해야 할 과업이 있으며,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는 건 오직 내가 감사의 표시로 추억거리를 하나 남기는 한에서인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조차 감사할 일은 있다는 말을 이 정도까지 밀고 나가볼 수도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 비우기’일 것이다. 무척 어려워 보이지만 자기실현은 어느정도라도 자기를 비워야만 가능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새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환상적인 힘을 준다. 그리고 이 글은 깊은 위로가 된다. 나에게 위로란 인간성의 다른 측면을 보는 것이므로.

천국은 자아가 완전히 제거되는 상태이므로.

변화가 아니라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 주목적인 고백은 말하는 사람에게 내적 해방감을 주지는 않는다.

곰브로비치는 일기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조하고 싶어서 쓴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위해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실제 삶이 얼마나 다르냐’가 아니라 ‘그녀가 무엇을 찾아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롤랑 바르트는 더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타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구조활동이라고 했다.

수전 손택은 어떤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은 상처투성이 수사학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라고 설명할 때가 아니라 ‘나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할 때가 훨씬 즐겁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살기 위한 시공간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런데 시작과 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중간 과정이 있다. 그곳이 이야기의 문제적 지점이다.

조너선 싸프란 포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이다. 삶의 이야기가 없다면 삶도 없다.

우리는 자신이 한 이야기에 영향을 받는 존재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해보라! 특히 주위 사람들에게 먹힌다고 생각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 애지중지해온 과거의 서사가 있다면 그것을 중지해보라! 진정한 급진주의는 뻔한 서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야기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름에서 겨우 해방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의 불멸이다. 우리는 불멸할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 불멸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 이야기는 나의 일부가 된다. 앞으로 될 내 모습에 보태어진다. 나는 나를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즉, 나는 어떤 이야기가 불멸하기를 원했는가? 어떤 이야기가 계속되는 데 기여했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외롭지 않냐는 말에 ‘나는 고독을 즐긴다. 당신 주위에 가장 가까이 두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우리 바로 곁에 있는 존재는 우리의 존재를 창조하는 명공이다’라고 했다.

뭔가를 하고 있다면 다른 것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무관심도 힘이고 무엇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힘이다. 어떤 때는 남들의 말을 듣지 않아야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자기창조는 무엇을 가까이 두는 것과 가까이 두지 않으려 하는 힘 사이의 긴장관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지켜야 할 것도 없는 법이란다."

"참을래. 나는 어쩐지 남들이 나 때문에 피해 보나 안 보나 그게 제일 중요하더라고."

‘이 사건 한시간 전에만 죽었어도 난 축복받았을 거예요. 지금 이 순간부터 삶에서 중요한 건 전혀 없을 테니까…… 삶의 즙은 다 빠지고 남아 있는 건 찌꺼기뿐이오.’

맥베스는 충성, 우정, 편안한 잠 같은 중요한 것을 버렸다. 그것들은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파멸했다.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자신을 창조한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권태와 추락은 시작된다.

뻬소아는 인생은 누군가 헝클어놓은 실뭉치, 실타래도 없이 실을 감는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라고 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소중하지 않은 일에는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졌다. 소중하지 않은 생각은 별로 쳐주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몇년간 나의 꿈은 삶을 나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으로 축소시켜보는 것이었다.

일본식 정원은 두가지다. 하나는 물과 다리와 나무와 꽃이 가득한 정원. 또하나는 그와 정반대. 물, 다리, 나무 꽃이 없고 오직 흰모래 위에 바위만 있는 정원.

조금 싱겁다 싶은 이곳에 전통이 나름대로 부여한 의미는 있다. 바위는 섬을, 흰모래는 우주 또는 바다를, 빗질 자국은 물의 흐름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존 케이지가 「4분 33초」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열다섯개의 돌은 다섯개, 두개, 세개, 두개, 세개씩 무리지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열다섯개 돌들의 모양과 배치는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보이고 열다섯개의 돌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돌 열다섯개를 볼 수 없는 것은 인간은 결코 모든 것을 알 수도, 손에 넣을 수도 없으니 ‘족함을 알고 살아야한다’는 불교 선종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말들이 가장 먼저 침묵이 되었다. 꼭 해야 하나 아직은 할 수 없는 말들이 가장 먼저 침묵이 되었다. 그날 나는 말의 기원이 침묵이란 것과 어느날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침묵 속에서 그 공간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차례차례 다 버리고도 네게 남게 되는 것, 너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 네게 있는가?

싸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풍경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니까.

이렇게나 서러운 마음으로도 계속 꿈꿔야 한다는 것, 계속 사랑할 수 있기를 꿈꿔야 한다는 것. 사랑이야말로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이딸리아의 한 소설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거의 전적으로 아는 바가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삶에 작별을 고하는 가장 행복한 방법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한때 사랑했고 마음을 두었던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그만큼 반갑고 힘 나고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삶을 꿋꿋하게 살다보면 어느날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시선’이란 생각이 든다. 현실을 직시하되 다른 결론에 이르는 시선.

그의 관심은 고통받는 사람의 가슴에 있는 고귀함이었다.

이딸로 깔비노는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측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열려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정답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즐기면서, 삶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약하면서 이 세상의 혼돈 위에 서 있을 줄 알았다.

두번째 시선, 그는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보다 훨씬 나은 것,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점을 내게 알려줬다.

제아무리 낡은 세상이어도 그 오래된 세상에 새로운 관계와 시간과 공간은 무한히 싱싱하게 탄생하고 있었다.

이혼은 했으나 아이들 때문에 괴롭고, 죄책감이 들지만 행복하고, 친구가 나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초라함의 원인이고, 친구를 사랑하면서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고, 자기 목소리를 갖고 해방되고 싶어하면서도 지지해줄 누군가를 애타게 필요로 하고, 잘 살아온 것 같다고 자체평가할 수 있지만 돈도 명예도 찾는 사람도 없이 늙어버리는 것이 두렵고, 자아해방과 실현을 중시하면서도 아주 형편없는 남자에게 더 형편없이 휘둘리고, 꽤 성공은 했으나 삶이 부와 신분상승을 위한 비참한 투쟁에 불과했던 것 같은…… 그는 수치심 없이 견디기 힘든 모순을 잘 파악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창조하고 주목받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나는 릴라를 사랑했다. 릴라가 잊히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릴라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신체만 노화와 죽음을 겪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 또한 노화를 겪는다. 인간관계 또한 사라지고 죽는다. 뜨겁고 강렬하다가 시들해지고 잊힌다. 그러나 이것을 견뎌내는 사랑과 우정 또한 있고 이런 사랑만이 각자의 자아마저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 이럴 때 사랑은 가장 궁극적인 자기 정의행위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조심스러워져서 진짜 우정을 나눌 기회가 참으로 적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저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여기는데, 우리의 힘은 다른 곳에, 충직함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음에도 우리는 만났다. 그렇게 만났는데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너를 구별해내고 너를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네가 없으면 세상은 허전하고 뭔가가 빠진 것 같고 삶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

줄리언 반스는 ‘이제껏 함께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을 함께하게 해보라. 그들은 각자의 개체였을 때보다 더 위대하다. 함께할 때 그들은 더 멀리, 그리고 더 선명하게 본다’

우리는 파울 첼란이 말한 것처럼 ‘내가 나일 때 나는 너다’의 관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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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는 ‘지혜를 짜내어 마지막까지 알차게 쓰는 것. - P37

DIY란 게 이렇게 무궁무진하구나 싶어 놀라웠다. 낡은 싱크대를 혼자 힘으로 더블 싱크로 바꾸고, 싱크대문 안쪽에는 행주등을 넣을 수 있도록 양철 포켓을 달았다. - P37

DIY란 게 이렇게 무궁무진하구나 싶어 놀라웠다. 낡은 싱크대를 혼자 힘으로 더블 싱크로 바꾸고, 싱크대 문 안쪽에는 행주등을 넣을 수 있도록 양철 포켓을 달았다.
주방도구도 마치 유원지에 놀러온 듯 장난스러움이 가득하다. 바지락을 넣는 조개잡이용 그물망에 양파를 넣어두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리에 잘 끼지 못하는 아이를 돌봐주는 걸좋아했어요. 유치원에서는 크레용 중에 분홍색만 금세 닳아 없어지고 빨간색은 남는 게 불쌍해서 저만 빨간색을 썼죠. 지금도낡아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이나, 망가져서 버려진 물건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가요." - P37

최근에는 이웃 사람이 먼저 "집을 헐 거니까 필요한 가구 있으면 가져 가"라고 귀띔해주기도 한다. 그러면 더는 짐을 늘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중에 발이 움직이고 만다. - P37

"물건이 절 부르는 것 같아서 무심결에 들고 와버려요."
주류에서 약간 밀려난 물건도 손을 보면 아름다워지고 온기가 되살아나는 법이다. 물건을 고르는 잣대가 확고하니까 이 부엌은 물건이 넘쳐 나는데도 갑갑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P39

2 18년간 애용 중인 화백나무 밥통, 밥을 넣어두면 시간이 지나도 말라붙지 않아 식은 밥도맛있다.
3 오랫동안 애용한 포트, 전자레인지에도 사용 가능. 실은 디즈니랜드의 익스피어리 쇼핑몰에서 구입했다. 확고한 심미안을 갖고 있다면 도쿄 디즈니랜드에서도 보물을 발견할 수있다. - P40

4 캔이나 상자의 패키지 디자인을 좋아한다. "예쁜 건 재활용해요. 몇 번이고 사용하게 만드는 디자인의 힘이 대단하죠"라고. 과연 그렇다!
5 터키 유리컵, "색감도 예쁘고 튼튼해서 쉽게 깨지지 않아 좋다"고 한다. 원래는 터키 커피를 끓일 때 물을 담는 유리컵이다. 민트티도 이것으로 마신다. - P41

"이렇게 비싼 걸 사면 아까워서라도 요리를 할 줄 알았는데, - P44

"음식에 관심이 없어서 먹는 건 아무래도 괜찮아요. 편의점음식도 상관없어요. 이상적인 집을 갖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다보니 음식에 대한 흥미가 뒷전이 된 것 같아요."
열여덟 살 무렵부터 조금만 돈이 모이면 이사를 하는 게 습관이었다. - P45

"인생의 99퍼센트는 일상의 연속이잖아요. 예를 들어 비일상을 즐기는 여행에 돈을 들이기보다, 우선 하루하루 쾌적한 삶을살고 싶어요. 볕이 잘 들고, 지면과 가깝고, 부엌이나 욕실처럼물을 쓰는 공간이 청결한 곳에서요. 조립형 욕실에 인덕션 조리도구가 딸린 흔한 셋방은 싫어요." - P47

자신이 생각하는 우선순위에 정답은 없고, 사는 방식 또한 0점도 100점도 없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P44

5 "정말로 늘 이 상태예요"라는 냉장고, 이런 경지에 오르면 오히려 홀가분하고 상쾌하다.
소분 용기는 전부 노다호로 제품으로 통일. - P49

평평한 수평 지붕의 임대주택 타입과 붉은 경사 지붕의 테라스하우스연립식 저층 주택 타입. 후자의 설계는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던 마에카와 구니오前男와 도시계획가 쓰바타 슈이치津端修一가 담당했다. 두 사람 다 체코 출신의 미국 건축가 안토닌 레이먼드Antonin Raymond의 문하생이었다. - P52

두 아이의 어머니인 그녀는 벚꽃 피는 계절이 되면 주먹밥을싸 들고 밖에 나가 먹었다. 마당에서 바비큐도 자주 했다.
"풍로도 보통 조리기구처럼 일상적으로 자주 썼어요. 꽁치도굽고 고기완자도 굽고, 오래돼서 집이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어린아이가 있는 저희한테는 최고의 집이에요. 아침부터 마치 숲속에 있는 듯 새소리가 들리고, 초록빛 식물과 하늘에 둘러싸인데다 바람이 잘 통해서 쾌적하거든요." - P54

그녀가 그저 무작정 오래되고 근사한 옛 건물이 아까워서 그랬던 건 아니다. 일본 임대주택의 역사 중에서도 드물게 ‘집합주택 안에서 시민들이 마음 편히 푸른 식물을 공유하며 서로 돕고사는 삶‘의 산물인 작은 숲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후 도착한 메일에는 "이제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가 살았던 아사가야 주택에서의 기억을 가슴에 새기고 앞을향해 걸어갈 거예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그 부엌에서 쿠키를 굽고 수프를 끓여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서 먹던 기억을 통째로 다음 인생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틀림없이.
※아사가야 주택은 2013년부터 재개발공사가 시작되었다. - P55

장국영에게 푹 빠져서 그의 출신지인 홍콩의 요리까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 P61

"홍콩은 해산물이든 고기든 모든 부위를 버리는 것 없이 다먹어요. 생선의 부레도 먹고, 돼지고기는 피까지 요리에 쓰죠.
뭐랄까, 생기가 넘쳐요."
요리에 생기가 넘친다?
"네, 잎채소 볶음 하나도 박력이 있어요." - P61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잎채소볶음과 새우 완탕면이 만들어졌다. 소량의 기름을 넣은 물에 살짝 데쳐 절묘한 식감을 살린 푸른 잎채소와 통통한 새우를 아낌없이 넣은 완탕을 입안 가득 넣자 홍콩 소울푸드의 박력이란 게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혀끝에서 이해되었다. - P63

전근을 간 오사카에서 제철 음식을 먹는 식습관을 배웠다.
자연스러운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했더니 자연스럽게건강이 따라왔다. - P67

차츰 의식적으로 식사와 생활을 개선해나갔다. 매실절임을담그고, 제철 식재료 중심의 일식을 만들고, 되도록 차가운 음료를 피했으며, 맥주는 한 잔만 마시고 그 뒤에는 레드와인을 마셨다. 도쿄에서는 샤워만 후딱 하고 끝냈는데, 꼬박꼬박 욕조에 몸 - P69

을 담그고 반신욕을 하게 되었다. 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름에도 몸과 발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런 것에 신경 썼더니 어느새 피부염과 냉증이 사라졌다. 그 후에 다시 도쿄로 전근을 왔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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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자아실현, 너의 모험이 나에게도 좋고 기쁜 일인 채로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사랑했던 방식이 우리가 내면에 간직한 힘이다.

커트 보니것의 졸업식 연설문 모음집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의 첫번째 장점은 두껍지 않다는 것이다. 두번째 장점, 커트 보니것은 예술가의 본분이 ‘사람들 기분을 전보다 좋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 책은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세번째 장점, 커트 보니것이 같은 말을 하고 또 한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건망증을 앓고 있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며칠간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1. 삶에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세요. 따뜻함과 소속감,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빼면 나머지는 다 거품입니다.

2. 지루함은 삶의 일부예요. 그걸 견디지 못하면 어린애예요.

3. 만약 예수가 자비의 메시지를 담은 산상수훈을 전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방울뱀이 되었을 거예요. 젠장, 세상의 규칙은 딱 하나, ‘친절하라’.

4. 하늘에 계시는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삼촌은 행복할 때마다 그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노력했어요. 한여름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면 그는 외쳤어요.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여러분도 남은 생애 내내 평화를 느낄 때나 일이 순조로울 때마다 외치세요!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5. 마크 트웨인은 삶의 끝자락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스스로 물었어요. ‘이웃의 좋은 평가’.

6. 아버지, 우리는 왜 태어났죠? 서로 삶을 잘 헤쳐나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순간과 장소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잘 해냅시다.

7. 어떻게 내가 이 일을 해냈지? 우리는 어떻게 이걸 해냈지? 그래, 해낸 거야.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야!"

8. 저는 여러분을 깊이 동정합니다. 졸업식과 동시에 아주 힘들 테니까요. 여러분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니까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지구 전체 땅덩어리를 주지는 않았어요. 이 행성의 작은 부분을 안전하게 잘 맡아주세요.

이른 봄의 흙냄새를 맡고 구름을 본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묘하게 더 크게 들린다. "시간아, 어린 시절의 너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구나." 괜히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정도로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사람들과 "나는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대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한 거야?" 혹은 "우리 이런 일을 하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사는 맛이 난다. 각자 자신들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낼 때 사는 맛이 난다.

나와 남의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좋은 대화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게 만든다. 나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는 생각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다음에 위 일곱번째 항목에 있는 말을 외칠 수 있다면 정말 사는 맛 날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이 너무 좋다!"

우리는 ‘사소한’을 ‘시시한, 별것 아닌, 하찮은’과 혼동하곤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일상뿐이고 ‘사소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 인생은 극히 사소한 일을 얼마나 잘했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했다.

보르헤스는 무한한 우주는 사건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필요로 하고 사랑하고 걷고 죽는 사소한 행위야말로 아주 중요하고도 영원하다고 했다.

휘트먼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아름답고 호기심에 찬 숨 쉬고 웃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그나 그녀의 목에 나의 팔을 잠시 가볍게 두르는 것(…)/나는 더이상의 기쁨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쉼보르스카는 인생을 생각하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당연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사소하게 여기는 일상의 기쁨은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성스러운 것의 소박한 모습을 아는 버지니아 울프는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날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일상적 경험의 차원이고 이건 의자이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참 좋다. 얼마든지 더 하고 싶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상을 폄하만 하고 있지 않게 만든다. 일상을 공정하게 평가하게 만든다. 하루하루를 더 신뢰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일상이다.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이 가장 되찾고 싶은 것도 일상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어떻게든 관심 끌기가 목적인 텔레비전이 우리를 받기만 하고 아무 노력도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인간형으로 바꿀까 우려했다.

삶의 본질은 사소한 사건들에서 더 잘 드러나고,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이 특별한 이유, 어느 평범한 날이 빛나는 날로 바뀌는 것, 진실한 마음으로 사소하게라도 뭔가를 변화시켜서이다.

‘오직, 내가 남기려고 결심한 것만이 남겨질 권리를 가지리라. 그런즉 선택하라, 이야기하라, 기억이여 대신 말하라.’

?오직 내게만 속한 물질인 내 몸, 내 건강, 내 생각을 지킬 수 있을까?

어째서 힘들어해?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만을 건드릴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이런 외부의 힘은 네가 스스로 헷갈리지 않는 한 네게서 아무것도 뺏어가지 못해.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시대의 사건들은 네가 거기에 동참하길 거부하는 한 네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어. 너의 체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들, 패배로 보이는 것들, 운명의 타격은 네가 그런 것들 앞에서 약해질 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야. 그런 일들에 가치와 무게를 두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냐? 너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너의 자아를 귀하거나 비천하게 만들지 못해.

타인만이 나를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온 존재가 휘청이기도 한다. 별말 아닌 말을 듣고, 그 말이 별말이 아닌 것을 알 때조차 기운을 내려고 온 힘을 써야 할 때도 있다. 그깟 일에 왜 마음을 쓰는 거야, 내 할 일이나 잘하자, 거의 자신에게 부탁을 해야 할 때가 왜 없겠는가?

나약해져버리면 자기방어, 자기비하, 자기연민의 에고를 억누를 줄도 다스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 감상적이 되지 않고는 이야기하는 법도 모르게 된다.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지나치게 타협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간다. 손쉽게 초라해져간다.

우리는 바보가 되고 싶지도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다. 리어 왕처럼 ‘결국 인간은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런 것까지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말아주시고 고귀한 분노를 갖게 해주소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솔론처럼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지금 잘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도 할 수 있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대신 자기에게 엄격해질 수 있다. 자신부터 자신을 얕잡아보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친구와 술 한잔과 믿을 만한 시가 필요하다.

당신이 더럽거나 여드름투성이라서?당신이 한때 술주정뱅이였거나 도둑놈, 병자, 류머티즘 환자, 혹은 창녀였기 때문에?혹은 지금 그렇다는 이유로?불성실함이나 무능력 때문에?아니면 당신이 학자도 아니고 인쇄물에서 당신 이름을 결코 본 적 없다고 해서…… 당신은 자신이 다소 모자란 불멸의 존재라 굴복하는가?
?월트 휘트먼 「직업을 위한 노래」 중에서

누군가 다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잘 위로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위로가 아니라 다른 것, 굳이 말하자면 용기와 품위를 말한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살아야 한다고,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세상의 주변부에 살고 있더라도 자기의식과 경험에 있어서는 중심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뻔한 미래라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것도 없다.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는 곳에서는 훗날 우리에게 좋은 의미를 가지게 될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현재 자기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기증수술로 이미 약해진 친구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부축하는 것, 서로 어깨를 끌어안는 것, 한때 서로에게 의미있었던 것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 것,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한 것,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으려 한 것, 아직 살아 있는 친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한 것. 그들은 진짜로 자신을 나누어줄 줄 알았고 어둠속에서 더 사랑할 줄 알았다. 위로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 용기와 품위가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리토스트란 무엇인가? 불현듯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이 치유책으론 사랑이 있다. 절대적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비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인간의 공통된 불완전성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리토스트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목격하는 일은 흔하며 별로 흥미롭지도 않다. 따라서 리토스트는 청춘이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장신구 같은 것이다.

리토스트는 이중 모터처럼 작용한다. 고통에 복수가 이어진다. 복수의 목표는 상대방도 나처럼 비참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복수는 진짜 동기(네가 나보다 빨리 헤엄을 쳐서)를 말하지 않고 거짓 이유(네가 익사할까봐)를 내세운다. 리토스트는 비장한 위선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초라하게 기만적인 존재들인지, 우리의 삶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이렇게 속마음은 전혀 다르면서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그것을 고치려는 자각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으로 보잘것없어져 버린다.

진실은 적어도 무엇이 거짓인지는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환상적인 해방감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다.

언어, 다시 말하면 진리를 존중함으로써(잘못을 고치려고 애쓰면서) 생명력도 강해지고 기만에서 풀려나고 더 자유로워져서 세상을 산책할 수 있었다고 끌라우디오 마그리스는 말한다.

진리를 존중하면서 기만에서 벗어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나도 그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랑하고 싶다. 진리를 존중하면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를 존중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세계는 자기애라는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보고 있다. 쿤데라가 도달한 사물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 거기엔 어떤 행복도 없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뿐이다.

쿤데라의 생각이 나의 양심을 찌르므로, 그리고 내가 결코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지의 제왕』의 골룸 같다고 느낄 때도 있으므로 지금 당장 자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진다. 결코, 우리가 다 내려놓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자아에 대해서 작가들은 어떻게 말했을까?

엘리엇은 누군가인 척하는 헛된 자아로부터 해방되면서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고 했고 곰브로비치는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고 느끼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는 자신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자의식, 실제 자신보다 더 나은 것으로 남에게 보이면서 흡족해하는 자의식, 있지도 않은 허구적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하는 가식, 허세, 위선을 실컷 경멸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다.

담장에서 자유로워진 후, 그녀와 그녀 아닌 모든 것 사이의 관계가 바뀌었다. 절대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변화. 이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의 중심이 되었다. 그녀가 아닌 모든 것이 그녀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그는 재주가 아주 많았다. 죽은 사람과 말할 줄 아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고,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서 영혼만은 꼭 남겨두었던 사람들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성스러움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곧 죽을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관대하고 용감하게 살았다.

자화상의 ‘자(self)’라는 단어는 하나의 명사이기를 그치고 전치사 ‘-를 향해(towards)’의 역동성을 획득한다.

실수하지 말자, 이 말은 자아를 매사의 중심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존 버저는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꼭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만 자아는 끝없이 뭔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자아는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나도 담장을 해체하기를 나 자신에게 허락했다. 유아론적 시스템 안에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진부한 것인지 모르지만 담벼락에 부딪히는 것은 무척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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