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자아실현, 너의 모험이 나에게도 좋고 기쁜 일인 채로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사랑했던 방식이 우리가 내면에 간직한 힘이다.
커트 보니것의 졸업식 연설문 모음집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의 첫번째 장점은 두껍지 않다는 것이다. 두번째 장점, 커트 보니것은 예술가의 본분이 ‘사람들 기분을 전보다 좋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 책은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세번째 장점, 커트 보니것이 같은 말을 하고 또 한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건망증을 앓고 있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며칠간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1. 삶에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세요. 따뜻함과 소속감,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빼면 나머지는 다 거품입니다.
2. 지루함은 삶의 일부예요. 그걸 견디지 못하면 어린애예요.
3. 만약 예수가 자비의 메시지를 담은 산상수훈을 전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방울뱀이 되었을 거예요. 젠장, 세상의 규칙은 딱 하나, ‘친절하라’.
4. 하늘에 계시는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삼촌은 행복할 때마다 그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노력했어요. 한여름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면 그는 외쳤어요.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여러분도 남은 생애 내내 평화를 느낄 때나 일이 순조로울 때마다 외치세요!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5. 마크 트웨인은 삶의 끝자락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스스로 물었어요. ‘이웃의 좋은 평가’.
6. 아버지, 우리는 왜 태어났죠? 서로 삶을 잘 헤쳐나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순간과 장소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잘 해냅시다.
7. 어떻게 내가 이 일을 해냈지? 우리는 어떻게 이걸 해냈지? 그래, 해낸 거야.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야!"
8. 저는 여러분을 깊이 동정합니다. 졸업식과 동시에 아주 힘들 테니까요. 여러분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니까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지구 전체 땅덩어리를 주지는 않았어요. 이 행성의 작은 부분을 안전하게 잘 맡아주세요.
이른 봄의 흙냄새를 맡고 구름을 본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묘하게 더 크게 들린다. "시간아, 어린 시절의 너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구나." 괜히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정도로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사람들과 "나는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대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한 거야?" 혹은 "우리 이런 일을 하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사는 맛이 난다. 각자 자신들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낼 때 사는 맛이 난다.
나와 남의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좋은 대화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게 만든다. 나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는 생각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다음에 위 일곱번째 항목에 있는 말을 외칠 수 있다면 정말 사는 맛 날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이 너무 좋다!"
우리는 ‘사소한’을 ‘시시한, 별것 아닌, 하찮은’과 혼동하곤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일상뿐이고 ‘사소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 인생은 극히 사소한 일을 얼마나 잘했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했다.
보르헤스는 무한한 우주는 사건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필요로 하고 사랑하고 걷고 죽는 사소한 행위야말로 아주 중요하고도 영원하다고 했다.
휘트먼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아름답고 호기심에 찬 숨 쉬고 웃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그나 그녀의 목에 나의 팔을 잠시 가볍게 두르는 것(…)/나는 더이상의 기쁨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쉼보르스카는 인생을 생각하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당연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사소하게 여기는 일상의 기쁨은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성스러운 것의 소박한 모습을 아는 버지니아 울프는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날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일상적 경험의 차원이고 이건 의자이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참 좋다. 얼마든지 더 하고 싶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상을 폄하만 하고 있지 않게 만든다. 일상을 공정하게 평가하게 만든다. 하루하루를 더 신뢰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일상이다.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이 가장 되찾고 싶은 것도 일상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어떻게든 관심 끌기가 목적인 텔레비전이 우리를 받기만 하고 아무 노력도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인간형으로 바꿀까 우려했다.
삶의 본질은 사소한 사건들에서 더 잘 드러나고,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이 특별한 이유, 어느 평범한 날이 빛나는 날로 바뀌는 것, 진실한 마음으로 사소하게라도 뭔가를 변화시켜서이다.
‘오직, 내가 남기려고 결심한 것만이 남겨질 권리를 가지리라. 그런즉 선택하라, 이야기하라, 기억이여 대신 말하라.’
?오직 내게만 속한 물질인 내 몸, 내 건강, 내 생각을 지킬 수 있을까?
어째서 힘들어해?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만을 건드릴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이런 외부의 힘은 네가 스스로 헷갈리지 않는 한 네게서 아무것도 뺏어가지 못해.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시대의 사건들은 네가 거기에 동참하길 거부하는 한 네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어. 너의 체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들, 패배로 보이는 것들, 운명의 타격은 네가 그런 것들 앞에서 약해질 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야. 그런 일들에 가치와 무게를 두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냐? 너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너의 자아를 귀하거나 비천하게 만들지 못해.
타인만이 나를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온 존재가 휘청이기도 한다. 별말 아닌 말을 듣고, 그 말이 별말이 아닌 것을 알 때조차 기운을 내려고 온 힘을 써야 할 때도 있다. 그깟 일에 왜 마음을 쓰는 거야, 내 할 일이나 잘하자, 거의 자신에게 부탁을 해야 할 때가 왜 없겠는가?
나약해져버리면 자기방어, 자기비하, 자기연민의 에고를 억누를 줄도 다스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 감상적이 되지 않고는 이야기하는 법도 모르게 된다.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지나치게 타협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간다. 손쉽게 초라해져간다.
우리는 바보가 되고 싶지도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다. 리어 왕처럼 ‘결국 인간은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런 것까지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말아주시고 고귀한 분노를 갖게 해주소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솔론처럼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지금 잘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도 할 수 있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대신 자기에게 엄격해질 수 있다. 자신부터 자신을 얕잡아보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친구와 술 한잔과 믿을 만한 시가 필요하다.
당신이 더럽거나 여드름투성이라서?당신이 한때 술주정뱅이였거나 도둑놈, 병자, 류머티즘 환자, 혹은 창녀였기 때문에?혹은 지금 그렇다는 이유로?불성실함이나 무능력 때문에?아니면 당신이 학자도 아니고 인쇄물에서 당신 이름을 결코 본 적 없다고 해서…… 당신은 자신이 다소 모자란 불멸의 존재라 굴복하는가? ?월트 휘트먼 「직업을 위한 노래」 중에서
누군가 다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잘 위로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위로가 아니라 다른 것, 굳이 말하자면 용기와 품위를 말한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살아야 한다고,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세상의 주변부에 살고 있더라도 자기의식과 경험에 있어서는 중심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뻔한 미래라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것도 없다.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는 곳에서는 훗날 우리에게 좋은 의미를 가지게 될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현재 자기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기증수술로 이미 약해진 친구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부축하는 것, 서로 어깨를 끌어안는 것, 한때 서로에게 의미있었던 것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 것,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한 것,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으려 한 것, 아직 살아 있는 친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한 것. 그들은 진짜로 자신을 나누어줄 줄 알았고 어둠속에서 더 사랑할 줄 알았다. 위로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 용기와 품위가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리토스트란 무엇인가? 불현듯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이 치유책으론 사랑이 있다. 절대적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비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인간의 공통된 불완전성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리토스트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목격하는 일은 흔하며 별로 흥미롭지도 않다. 따라서 리토스트는 청춘이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장신구 같은 것이다.
리토스트는 이중 모터처럼 작용한다. 고통에 복수가 이어진다. 복수의 목표는 상대방도 나처럼 비참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복수는 진짜 동기(네가 나보다 빨리 헤엄을 쳐서)를 말하지 않고 거짓 이유(네가 익사할까봐)를 내세운다. 리토스트는 비장한 위선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초라하게 기만적인 존재들인지, 우리의 삶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이렇게 속마음은 전혀 다르면서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그것을 고치려는 자각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으로 보잘것없어져 버린다.
진실은 적어도 무엇이 거짓인지는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환상적인 해방감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다.
언어, 다시 말하면 진리를 존중함으로써(잘못을 고치려고 애쓰면서) 생명력도 강해지고 기만에서 풀려나고 더 자유로워져서 세상을 산책할 수 있었다고 끌라우디오 마그리스는 말한다.
진리를 존중하면서 기만에서 벗어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나도 그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랑하고 싶다. 진리를 존중하면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를 존중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세계는 자기애라는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보고 있다. 쿤데라가 도달한 사물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 거기엔 어떤 행복도 없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뿐이다.
쿤데라의 생각이 나의 양심을 찌르므로, 그리고 내가 결코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지의 제왕』의 골룸 같다고 느낄 때도 있으므로 지금 당장 자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진다. 결코, 우리가 다 내려놓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자아에 대해서 작가들은 어떻게 말했을까?
엘리엇은 누군가인 척하는 헛된 자아로부터 해방되면서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고 했고 곰브로비치는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고 느끼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는 자신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자의식, 실제 자신보다 더 나은 것으로 남에게 보이면서 흡족해하는 자의식, 있지도 않은 허구적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하는 가식, 허세, 위선을 실컷 경멸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다.
담장에서 자유로워진 후, 그녀와 그녀 아닌 모든 것 사이의 관계가 바뀌었다. 절대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변화. 이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의 중심이 되었다. 그녀가 아닌 모든 것이 그녀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그는 재주가 아주 많았다. 죽은 사람과 말할 줄 아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고,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서 영혼만은 꼭 남겨두었던 사람들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성스러움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곧 죽을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관대하고 용감하게 살았다.
자화상의 ‘자(self)’라는 단어는 하나의 명사이기를 그치고 전치사 ‘-를 향해(towards)’의 역동성을 획득한다.
실수하지 말자, 이 말은 자아를 매사의 중심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존 버저는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꼭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만 자아는 끝없이 뭔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자아는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나도 담장을 해체하기를 나 자신에게 허락했다. 유아론적 시스템 안에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진부한 것인지 모르지만 담벼락에 부딪히는 것은 무척 아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