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부터 준비해가야 하는 연료와 에너지원, 그리고 여행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절약할 수 있는 궤도, 176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는 그 최적의 경로를 따라 보이저는 질주했다.
위성 이오의 화산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우주 공간에 유황을 뿜어대고 있었다. 토성의 고리가 몇 겹인지 알게 되었고, 고리를 이루는 물질이 흩어지지 않게 질서를 유지하는 ‘양치기’ 위성들을 발견했다.
캐럴린 포코와 칼 세이건이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했을 때, 미항공우주국의 결정권자들과 보이저 담당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를 설득하기까지 7~8년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보이저와 지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마침내 보이저의 모든 과학 탐사가 끝난 후에야 고향을 잠시 돌아보는 위험한 응시가 허락되었다. 너무 멀어지기 직전에 건진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찍혔다.
프로게이머 페이커의 할머니께서 손주의 경기 생중계를 즐겨 보시며 게임 용어를 줄줄 꿰고 계신다는 인터뷰를 보고 흠칫 놀랐다. 모두가 그런 판타스틱 할머니를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릴 땐 숙제하다 잘 모르면 부모님께 물어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요즘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부모님은 각자 나름의 인생에서 대가이시지만, 내가 가는 길은 그 방향이 아니다. 지구를 떠난 탐사선처럼, 내가 나의 삶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갈수록 부모님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것이다.
독립한다고 손바닥만한 집을 얻어 나간 뒤 숙제는커녕 어떤 조언도 구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게 되면 내 집에 남아 있던 제 짐을 마지막 하나까지 가져다 자기 보금자리에 옮겨두고는, 나더러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으라는 둥 아프면 병원에 좀 가라는 둥 타박을 할 것이다.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법정께서는 『어린 왕자』를 무척 좋아해 주위 사람들에게 서른 권도 넘게 선물하셨다고 한다. 한때 나는 스님 흉내를 내느라 『무소유』를 여러 권 사다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그 숭고한 ‘연쇄 선물마’를 따라 하기에는 나의 인간관계가 턱없이 빈약했다.
책이라는 것은 선물하기가 은근히 까다로운 물건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있고,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책 좀 읽으라는 뜻이냐며 발끈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해 지는 광경이 좋다고 했다. 나도 좋아한다. 특히 여름철 지루한 장마 끝의 노을을 사랑한다. 마치 솜사탕을 여기저기 헤쳐놓은 듯 색깔도 높이도 서로 다른 구름층이 여러 갈래로 휘몰아치다 갑자기 멈춘 듯한 하늘. 그 역동적인 하늘에 내려앉는 노을은 어찌나 붉고 또 어찌나 강렬한 황금색인지. 그렇게 황홀한 황혼은 태양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지구에서 태어난 나를 칭찬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집중력을 잃고 만다. 나도 법정 스님만큼이나 『어린 왕자』를 사랑하지만, 책 읽기를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어 다른 데를 봐야 한다. 문학의 범주에서 직업병의 영역으로 하릴없이 흘러가버리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서다. 그게 잘되는 날은 숨을 크게 몇 번 쉰 다음 책을 마저 읽고, 안 되는 날은 책을 덮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태양과 소행성과 어린 왕자의 개략도槪略圖다. 천체와 관측자의 크기 및 거리는 실제 비례와 다름에 유의.
나의 소행성이 자전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려 있는 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을 속으로. 더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어떤 번역본에서는 어린 왕자가 의자를 뒤로 물리지 않고 ‘당겨’ 앉는다. ‘옆으로 옮겨’ 앉는 어린 왕자도 있고,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의자를 ‘움직이는’ 어린 왕자도 있다. 영어판에서도, 일어판에서도, 어린 왕자가 의자를 움직이는 것은 몇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실 『어린 왕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쟁점이 알려져 있다.
결론만 말하자면 프랑스어판의 어린 왕자는 ‘의자를 당겨’ 해 지는 것을 볼 뿐, 어느 쪽으로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 의자를 움직이는 대신 해가 스스로 저물도록 명령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때도, 가로등 켜는 사람에게 ‘쉬고 싶을 땐 계속 걸어가면 된다’고 일러줄 때도 어린 왕자는 방향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생텍쥐페리가 지구를 누비며 대륙 간 항로를 개척하던 조종사였음을 상기할 때, 나는 그가 제대로 된 방향을 알았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거대한 태양의 아래쪽 끝이 지평선에 닿을 때부터 위쪽 끝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열여섯 시간. 지구에서는 해 지는 시간이 불과 2분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일지 모른다.
게으름뱅이는 아니지만 슬플 때면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에게 수성을 추천해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해가 하루에 두 번 지는 명당이 있기 때문이다.
적도를 따라 펼쳐진 루거스평원Lugus Plantia, 그 한편에 라트비아의 시인 라이니스Rajnis의 이름을 딴, 80킬로미터 크기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다. 크레이터 둘레의 언덕에 올라 일몰을 기다리면, 놀랍게도 해가 지는 듯하다가 다시 빼꼼 올라올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다니! 태양은 한동안 가던 길을 되짚어 올라오다가 다시 원래 방향으로 순행한다. 두번째 일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재미있는 일은 일출 무렵에도 일어난다. 해가 동쪽에서 뜨다 말고 도로 졌다가 재차 떠오른다.
지구는 공전 주기 1년에 비해 자전 주기 1일이 현저히 짧아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자전 주기의 몫이다.
경도가 결정한다. 서경 90도 혹은 동경 90도 근처가 명당이다. 여기서 멀어지면 태양이 역행하는 시점이 점차 바뀌어서, 하루 두 차례의 역행 중 한 번만 볼 수 있다. 경도 0도나 180도에 가까워지면 해가 오던 길을 잠시 되짚는 시점이 정오에 가까워진다. 이곳의 한낮은 그야말로 뜨겁다.
내려오다보니 사방이 캄캄해서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있는 곳이 등산로의 바위인지 마른 계곡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낙엽을 밟는 내 발소리가 나를 위협해올 무렵, 두 개의 불빛이 보였다. 하산길에 내가 올라가는 걸 보셨다는 등산객 부부였다. 곧 어두워질 텐테 아무 장비도 없이 혼자 휘적휘적 산에 올라가는 나를 보시고 혹시나 하고 산 중턱에서 기다리셨다고 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해 있는 일시적인 존재"를 위해 어두운 산속에서 랜턴을 들고 기다려주시다니. 나누어주신 랜턴을 들고 앞서가는 어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산에서 내려오는 그 저녁은 참으로 따뜻했다.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지상에서라면 속력을 높이거나 늦추는 방식으로 다른 물체를 따라잡을 수 있지만, 우주에서는 속력을 바꾸면 궤도의 높낮이도 같이 변하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달에 착륙했다가 돌아오려면, 달 상공을 맴돌며 기다리던 사령선과 다시 만나야만 한다. 달 표면에서 이륙한 뒤에 사령선과의 랑데부에 실패한다면 영영 지구로 돌아올 수 없다.
서로 다른 두 궤도의 절묘한 발맞춤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의 발현, 인류의 관심을 지구 밖으로 넓혀나가겠다는 의지, 우주와의 랑데부는 그 모든 것을 내포하는 교향곡이다.
친구의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캐스팅된 배우나 세찬 장맛비에 우산을 빌려주었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커플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랑데부가 있었을 것이다.
혹여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별에서 태어나 우주 먼지로 떠돌던 우리가 이 지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으니까.
난 원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에 내는 ‘희망직업’란에 ‘드러머’가 없었다. 난 엔지니어라고 썼고 손에는 스틱 대신 펜이 주어졌다. 그리고 공부도 음악도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국 난 고장난 스피커나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되겠지.
신세한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들렸다.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으면 덜 성공한 경우를 상상할 때조차 음악에 관련된 장비를 다루는 자신을 떠올리는 것일까? ‘고장난 스피커’를 고치는 사람이라니, 음악을 사랑하며 실천하는 실로 멋진 방법이다.
후배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애초에 대학원에서부터 화성 탐사 임무에 참여하고 있는 지도교수를 사사하거나, 천문학의 다른 분야로 일단 졸업을 한 뒤 박사학위와 좋은 논문 실적을 들고 화성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주 탐사 선진국이 발견했던 것을 그저 재확인하는 것보다는,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우리가 찾아내면 얼마나 좋을까.
개별 관측기기들이 부착될 탐사선 자체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공학 기술이 실현되어야 한다. 좋은 내비게이션을 써먹으려면 잘 굴러가는 차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 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그믐달은 밤을 꼴딱 샌 사람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는 그런 달이다.
『종이달』의 리카가 처음으로 일생일대의 일탈을 저지르고 나온 날, 앞으로 도저히 되돌릴 수 없으며 스스로는 멈출 수도 없는 범죄의 눈덩이를 굴리게 될 미래의 기운을 막연히 감지하는 그 순간은 그믐달이어야 한다. 거대한 밤이 지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돌아온 일상의 아침을 맞이하는 달이 초승달이라고 잘못 불리운 것은 아무래도 서운한 일이다. 그믐달이 그런 달이다. 다행히도 『종이달』의 우리말 번역본 표지에는 그믐달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초승달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상현달과 보름달도 꽤나 사랑받는다. 그러나 밤하늘에 하현달이 보이는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일제 강점기의 작가 나도향은 『조선 문단』이라는 문예지에 발표한 「그믐달」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달을 노래한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믐달은 해보다 조금 앞서 지평선 위로 올라와 잠시 보였다가 해가 뜨고 나면 밝은 햇빛 때문에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달은 차오르고, 뜨고 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오후에 반달이 보인다면 해와 한참 떨어진 동남쪽이다.
보름달은 해가 없는 동안 내내 밤을 지키다 해 뜰 무렵 서쪽으로 진다.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은 매일 대략 50분씩 늦어진다. 보름에서 며칠이 지나 이제 왼쪽만 볼록한 하현달은 한밤중에야 잠깐 떴다가 낮에 진다.
오른손 방향으로 볼록한 상현달이다. 보름이면 서쪽으로 해가 질 무렵에야 동쪽에 달이 떠오른다.
남향 창문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곳은 또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 대륙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해가 잘 드는 곳에 살고 싶다면 북향집을 찾아야 한다.
초승달은 해를 바짝 뒤쫓느라 초저녁에나 잠시 보였다가 이내 지평선 아래로 가버린다.
우주에 갈 때도 지구상의 미생물이 다른 천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대비를 한다. 지구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미생물이라도 다른 공간에서는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며, 지구에서부터 무임승차한 미생물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지구 밖에서 외계 생명체를 만났다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구도 한때는 황량한 곳이었다. 물도, 생명을 만드는 유기물질도 없이, 금속이 깊이 가라앉아 핵을 만들고, 그 위로 금속보다는 가벼운 암석의 맨틀이, 가장 표면에는 용암과 돌덩어리들이, 그리고 지구 밖 우주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유성 때문에 만들어진 운석 구덩이만이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의도로 지구에서 생명이 시작된 건 아니다. 수분도 유기물질도 없는 메마른 흙으로는 아담도, 아담을 빚을 질퍽한 반죽도 만들 수 없다. 우주라는 거대한 자연의 순리였다.
우리가 수십 년째 외계 생명체를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것은 오로지 우주에 대한 궁금증,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탐구심 때문이다.
우리는 관찰자일 뿐, 바깥 천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다. 생태계를 위해 어떤 잔인한 포식자 종을 절멸시키거나 가여운 피식자를 집중적으로 키워낼 권리가 우리 인류에게는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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