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우리가 여기서 겪는 고통을 아는 그대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우리를 잊지 마오.’

"하와트는 스스로를 벌할 거다. 우리 둘이 그에게 아무리 분노를 퍼붓는다 해도, 그가 자기에게 쏟아붓는 분노가 더 클 거야."

이윽고 그는 조용하고 유능한 지휘관다운 표정을 가면처럼 뒤집어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기 위해 탁자를 똑똑 두드렸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단 한 명의 노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어.’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폴은 그가 침착함을 가장하며 흥분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죽은 우리 친구의 이름은 투록이었소. 그의 영혼을 놓아줄 때가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을 잊지 마시오. 당신들은 이제 투록의 친구요."

"언젠가 저 친구가 인용문을 읊어대지 못하게 되는 걸 한번 보고 싶군. 그럼 저 친구는 벌거벗은 사람 같은 몰골이 될 거야." 공작이 말했다.

폴은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이 방은 아버지가 나가기 전에도 텅 빈 곳처럼 느껴졌었다. 대모의 경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네 아버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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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의무




내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 많이
나를 아프게 하네요

보이지 않게
서로 어긋나 고통스러운
몸 안의 뼈들처럼
우린 왜 이리
다르게 어긋나는지

너무 오래되니
편안해서 어긋나는 사랑
다시 맞추려는 노력은
언제나
아름다운 의무입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서 13, 8).

"멀리 있는 이들 챙겨주고 사랑하는 일은 잘되는데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에는 끝없는 인내와 용기가 요구된다니까요."

"가까운 이들에게 쉽게 상처받고 온전히 용서 못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적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지요."

"가까운 이들에게 느낀 서운함은 그 뒤끝이 오래가서 괴롭다니까요."

노년의 여정에 있다 보니 쉽게 외로움을 타서인가 수십 년간 공들여 온 우정의 관계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로 서운해하는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부담 없이 즐거운 이야길 나누고 싶은데 듣는 이가 계속 거룩하고 종교적인 말만 하거나, 친구니까 슬쩍 내 자랑 좀 해도 되겠지 싶어 어떤 경험담을 말할 때 정색을 하고 ‘겸손’에 대한 훈계조의 레슨을시작하면 ‘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나?’ 생각하면서 벗으로서의 따뜻한 말 한마디, 응원의 눈길이 더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드러내놓고 표현은 못 하지만, 때로는 서운한 뒤끝이 생각보다 오래가서 스스로 반성하곤 합니다.

‘너무 오래되니 편안해서 어긋나는 사랑’을 ‘다시 맞추려는’ 힘들지만 꼭 필요한 노력을 더욱 열심히 기쁘게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
오늘이란 선물에
숨어 있는 행복!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에 새롭게 감사하기, 함께 사는 이들이 때로는 좀 힘들게 해도 절대로 막말을 하거나 날카롭게 대하지 않기, 나만을 향한 이기적인 관심을 이타적인 관심으로 돌려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기쁘게 할 궁리를 하기, 산책을 하다 발견한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의 이름을 모르면 꼭 찾아서 알아두려는 노력을 하기, 바빠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감동받은 구절은 혼자서만 좋아하지 말고 친지들과도 나누기, 극히 사소한 일을 목숨 걸고 따지는 소인배가 되지 말고 웬만한 일은 ‘넘어가는’ 대인배가 되겠다고 다짐하기,소인이 되지 말고 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마음 돌보기에 도움이 되는 《논어》를 다시 탐독하기 등등.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 한 개라도 켜는 것이 더 낫다.(중국 격언)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김종삼의 시 〈어부〉 중에서)

삶은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법정 스님)

몸에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정신에는 책이라는 약을 기도처럼 먹다 보면 힘든 중에도 살아갈 힘이 생기고 어느새 슬며시 행복이 찾아올 것을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속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잘 읽어내려 애쓰는 인생 공부를 부지런히 하다 보면 말입니다.

말을 많이 해서
죄를 많이 지었던 날들
잠시 잊어버리고
맑음으로 맑음으로
깊어지고 싶으면
오늘도 고요히
침묵이란 우물 앞에 서자

마더 데레사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쓸데없는 말들을 삼가는 혀의 침묵뿐 아니라 눈과 마음 그리고 지성의 침묵도 잘 지키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결점 찾기를 멈추는 눈의 침묵, 험담과 소문을 실어 나르는 소리를 막는 귀의 침묵, 이기심·미움·질투·탐욕을 피하는 마음의 침묵, 거짓됨과 파괴적인 생각, 의심과 복수심을 차단하는 지성의 침묵을 지키도록 늘 깨어 있으라고 강조합니다.

수도자들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얼마쯤은 알아야 구체적인 기도에 도움이 되기에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지역 신문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신문을 골고루 찾아 읽는데, 크게 실어도 좋을 미담은 아주 작게 나오고 부각시키지 않아도 좋을 기사들은 너무 크게 나와 아침부터 마음에 부담이 될 때가 많습니다.

좀 더 유익하고 정화된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침묵이란 우물 속에 들어가 마음을 헹구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만과 독선으로 경직된 차가운 침묵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침묵의 주인공이 되는 기쁨으로 말입니다.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왜 조금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왜 자꾸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걸까
언젠가는 세상 소임 마치고
떠나갈 나의 뒷모습도
미리 생각하면서

‘글쎄요? 그저 순간순간을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세요’, ‘사랑할 시간이 생각보단 길지 않으니 더 많이 사랑하고 용서를 미루지 마세요’라고 충고하는 것 같습니다.

‘몸의 아픔은 나를 겸손으로 길들이고 맘의 아픔은 나를 고독으로 초대하였지’

인내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면 상처도 화를 내서 그 덧난 상처로 인해 다시 고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마음으로 순하게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함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막상 아픔이 오면 일단은 피하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프다고 할 적엔 그저 그런가 보다 건성으로 넘기다가도 정작 나 자신이 아프니 그 아픔이 한층 절실하고 크게 다가오는 현실적인 이기심을 못내 부끄러워하면서 말입니다.

도무지 이유와 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종류의 마음의 통증까지 시시로 겪다 보면 어느 순간 담대해지고 의연해진 자신의 모습에 조금은 놀라기도 합니다.

목숨까지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하나는 《단순한 기쁨》의 저자 아베 피에르 신부가 남긴 말 "삶이란 사랑하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 시간이다"이고, 또 하나는 중국 격언으로 알려져 있는 "촛불 한 개라도 켜는 것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미움도 더러 받았습니다. 이해도 많이 받았지만 오해도 더러 받았습니다. 기쁜 일도 많았지만 슬픈 일도 많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소중하고 필요했습니다." 선뜻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 왜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요.

늘 빠른 택배나 속달 편지에 익숙한 요즘, 저도 이젠 좀 천천히 가는 손 편지를 써야지 생각하며 빙그레 웃어봅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단순한 용서에도 때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일로 제 쪽에서 억울하게 생각되어 용서가 잘 안 되는 대상을 만났을 때도 왜 그랬느냐고 힘주어 따지기보다는 그냥 한 번 심호흡을 하고 "그 일로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라고 말해봅니다. 혹시 누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일단 원인 제공은 제가 한 것이니 저도 죄송하지요"라고 말해봅니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용서일 것이고, 용서 없는 사랑은 거짓일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거의 날마다 크고 작게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일, 용서해야 할 일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남에게 누구를 용서해야 한다고 섣불리 강요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그 대신 나 자신이 누구를 용서하는 일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용서의 실천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용서에서 온다. ……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욕심을 버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
문득 아름다운 오늘의 삶
눈물 나도록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견디고 싶은 마음이
고마움이 앞서네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야 내일의 밝은 해를 밝게 볼 수 있다고
지는 해는 넌지시 일러주며 작별 인사를 하네

1)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예의를 차리지 않고 함부로 말했으며 때로는 농담이나 유머를 섞어 그의 약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음을 용서하십시오.

2) ?우울과 자조 섞인 한탄과 푸념의 말을 필요 이상 반복함으로써 듣는 이를 불편하게 했음을 용서하십시오.

3) ?어떤 일로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 불평의 표현들을 거칠고 극단적인 언어로 내뱉음으로써 자신과 이웃의 평화를 깨뜨렸음을 용서하십시오.

4) ?뒷담화의 영향력을 모르지 않으면서 쉽게 합류하며 이를 멈추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용서하십시오.

5)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인내와 정성이 부족해 번번이 가로막고 자신의 말만 함으로써 그를 서운하고 외롭게 했음을 용서하십시오.

6) ?떠돌아다니는 어떤 소문을 들었을 때 검증도 안 된 상태에서 성급히 받아들이고 남에게 전달까지 했던 경솔함을 용서하십시오.

7)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주제로 대화를 이끌고 험담 섞인 비교급의 말을 자주 함으로써 듣는 이의 마음을 언짢게 했음을 용서하십시오.

8) ?두 사람 사이에 현명한 중간 역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체면에 매이고 용기가 부족해 할 말을 채 못하고 비겁하게 숨었음을 용서하십시오.

9) ?누가 제게 신중하게 충고하는 말을 겸손히 받아들이기보다 섣부른 합리화와 분노의 표현으로 상대방을 실망시켰음을 용서하십시오.

10) ?위로가 필요해서 일부러 찾아온 이들에게 바쁜 것을 핑계로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메마르게 겉도는 말로 그를 더 쓸쓸하게 만들었음을 용서하십시오.

11) ?자신의 실수로 누가 제게 용서를 청했을 때 이를 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잔소리와 훈계로 상대방을 더 무안하게 만들었음을 용서하십시오.

12) ?때로는 저 스스로 말을 잘못한 걸 알면서도 부끄러움이 앞서 즉시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내내 미루기만 하거나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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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겪은 성숙한 사람들은 남들의 고통을 보기 시작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 마틴 루터 킹은 ‘나는 무슨 일을 당할까?’에서 ‘그들은 무슨 일을 당할까?’로 질문을 바꾸었다.

자신의 고통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고통에 놀라는 대신 그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했는지에 놀라는 것이 맞는다는 것과 고통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장 큰 실망감을 주었던 일도 그 일 없이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배웠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에게 단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을 나온 오스카 와일드는 종말을 향해 갔고 도스또옙스끼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누군가는 끝이라고 생각할 때 누군가는 시작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딱 한번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인간이 두번 죽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진지하고 진실해질까 상상을 해봅니다. 가령 한번 죽고 두번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우리의 삶을 에워싼 그 많은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받은 것입니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이죠.’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자식의 가치는 자기 자식의 가치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휘트먼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건강을 줄 것이다
?「나 자신의 노래」 중에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개인은 하나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고 자체평가하면서 아무런 기쁨과 위안을 주지 않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평온하게 안착할 수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생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나의 하루는 습관과 타성으로 계속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내가 매일 하는 일과 매일 겪는 즐거움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절망감을 잊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아무 할 일 없이 있을 때는 나는 내 삶이 목적이 없고 나머지 생애를 바칠 만한 새로운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감출 길이 없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독, 마지막 거짓은 울고 싶은데 울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무슨 숭고한 이유 때문이 아니고 남들이 어찌 생각할까 두려워서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스스로 심문관이 되어서 자신을 취조한다.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삶을 다시 본다. 고상하고 즐거운 삶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것이 아님’이었다.

지혜로웠다기보다는 관습적이었고 그의 고상함이란 것도 자기의 삶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누리는 것에 불과했다.

일평생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 외에는 관심도 없었고 자신을 남보다 우위에 두는 얄팍한 자기만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아는 깊이가 없고 이상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예의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떤 곳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을 깊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는 유흥거리들로 만족하게 하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세상에 맞춰 잘 처신한 것이 아니라 작별을 고했다. 고상함과 품위는 거기서 나왔다. 그들은 그렇게 브레이트가 말한 것처럼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꼭 와야 할 세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마틴 루터 킹은 칼날로 공격당해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자 이렇게 말했다. 그때 죽었더라면 내 꿈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우리가 다 죽은 후, 미래 세대의 눈으로 삶을 보려고 했다. 그녀는 지구가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데 몸매 관리에만 신경 쓰는 우리를 보고 미래세대는 우리를 미쳤다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우리도 여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가끔 당신은 마치 남은 시간을 다 가진 것처럼
행동하죠. 당신이 그럴 때 난 걱정이 돼요.
(…)
난 당신이 마음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난 당신이 남은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이라도 하기를 바랍니다.
자매애로,

에이드리언이
?「모순들, 그 흔적을 따라」 중에서

순수한 영혼에 대한 최고의 반응은 순수한 영혼이 되는 것이므로 나도 잠시 순수해진다. 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나를 찾고 싶어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아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는 자연이란 작은 것에도 큰 상처를 입는 강하면서도 약한 것,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사진과 글은 항상 두가지가 함께 있다. 고독, 그리고 온기. 그 둘이 합해져서 다시 못 볼 각각의 생명이 된다.

아무리 다른 환경에서 살아도, 인간은 한가지 공통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꼭 한번만 산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다다르게 되는 종착점은 자기 생명, 살아 있다는 것의 신비일 터이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워져 사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바라보고 싶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느끼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소중히 사랑하고 싶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숨 쉬는 조건을 조금 더 밀고 나가보는 것,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라고 에이드리언 리치는 읊었다.

덧없는 삶을 기적이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필요없다. 믿고 사랑하라. 상대방의 호흡을 느껴라,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했다.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이를테면 나는 에르메스 백을 색깔별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넌 알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넌 알아? 어떻게 사야 하는지?’

휘트먼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조지 오웰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까뮈는 왜 살아야 하는가, 토니 모리슨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남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질문을 구하고 대답에 따라 살려 하지만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리되 질문에 따라 살라고 했다.

세상을 작동시키는 원리가 아니라 세상을 작동시키지 않는 원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자, 자기 상처에는 펄쩍 뛰어오르면서 왜 다른 생명이 무의미하게 파괴되는 것은 무시하는지 묻는 자가 된다.

위험한 불과 마주친 개미들이 둘씩 짝을 짓더니 서로 바짝 붙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작 씽어는 떨어지는 낙엽, 죽은 나비를 위해서도 장송곡을 불러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토노프의 구덩이에서 한 남자는 낙엽을 가방에 넣으면서 아무도 너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기억해줄게!라고 말한다.

누군가 착한 척이라고 부르는 것이 한때는 선한 행동, 사랑이라고 불렸음을 잊지 말자.

1. 가치를 충실히 지키려는 자(과거의 가치이긴 하지만)
2. 가치가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구별을 못하는 자
3.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완전히 적응하는 자

모리스 블랑쇼의 말처럼 이제 인간들은 성격 차이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사건들 때문에 격돌하는 것도 아니고 가치들 때문에 싸운다.

성공이 지배하는 세계 내부에 철저히 속해 있으면,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이야기도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릴 일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로, 사리와 논리에 맞는 일로, 효율적인 일로, 세상의 이치에 맞는 일로 변모한다. 그 세계에는 그 세계의 합리성과 논리가 있는 것이다.

(스땅달이 『적과 흑』을 쓰던 시대만 해도 싫어하는 세상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음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가장 치열한 전투의 주제였다.)

한때 인간은 사라져도 가치가 남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가치는 사라지고 인간만이 남았다.

언제나 말에 깊이를 주는 것은 행동이다.

야나체크는 거절했다. 천박한 절정에 이를 때 필연적으로 유치해지는 경향, 그것은 야나체크에게는 참을 수 없는 미학적 악이었다.

영원한 젊음은 없다. 현실에 대한 미화된 시각 일체를 거부하는 위대한 몸짓이 있을 뿐이다. 절정이 아니라 일상적 상황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지쳐서 잠든 남자의 늙은 몸 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음악이 흐를 뿐이다. 지치도록 일하다가 잠든 우리들의 어제보다 늙은 얼굴 위로 천상의 음악이 흐를 뿐이다.

분노, 역겨움, 슬픔, 답답함, 짜증, 실망, 저항하고 싶은 마음, 그래도 어딘가에는 마음을 주고 나누고 보태고 싶은 마음, 삶에 대한 갈구……
그 말은 바로 이것이다.
"기다려봐, 내가 갈게."

두 사람은 서로를 숨결 같은 사이라고 느꼈었다. 도대체 어떤 사이가 숨결 같은 사이란 말인가? 고 백남기 농민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네가 힘들면 나에게 손을 내밀어. 내가 그 손을 잡을게."

우리 인생은 짧으므로 감탄할 만한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한다. 나도 지금, ‘비수기의 전문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나는 책을 거울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을 거울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인이 쓴 글에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발견하고 그 미래로 날아가 볼 수 있다는 것, 문학은 결국 한 사람의 운명을 말하는 언어라는 것도 그 무렵 알게 되었다.

독자들은 맨땅에 헤딩하지 않아도 된다. 독자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고 책으로부터 출발해서 무엇인가를 창조한다.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는구나. 상실과 용기를 요하는 일을 겪고 난 뒤에야. 일곱째 날이 되어도 쉬기는커녕 정신을 추슬러야 하는구나.’ 슬프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거나 비난으로 깎아내리지 말길/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하느님의 훌륭한 아이러니/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

‘이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잃어버렸으니, 다른 것을 만들어야 해. 나는 미래를 만들어야 해. 내가 정말로 잃어버린 가시적인 세상을 이어받을 미래를 말이야.’

살기 위해서는 살게 만드는 진실한 열정이 필요하다.

(싸뮈엘 베께뜨는 몇몇 진리와 함께하고 그 진리와 함께 시험대에 오를 줄 안다면 행복이 가능함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하다.)

보르헤스는 삶에서 시작해서 기억으로 인용으로 지성으로 삶을 구축하는 극도로 아름다운 삶의 한 ‘형식’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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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부터 준비해가야 하는 연료와 에너지원, 그리고 여행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절약할 수 있는 궤도, 176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는 그 최적의 경로를 따라 보이저는 질주했다.

위성 이오의 화산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우주 공간에 유황을 뿜어대고 있었다. 토성의 고리가 몇 겹인지 알게 되었고, 고리를 이루는 물질이 흩어지지 않게 질서를 유지하는 ‘양치기’ 위성들을 발견했다.

캐럴린 포코와 칼 세이건이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했을 때, 미항공우주국의 결정권자들과 보이저 담당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를 설득하기까지 7~8년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보이저와 지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마침내 보이저의 모든 과학 탐사가 끝난 후에야 고향을 잠시 돌아보는 위험한 응시가 허락되었다. 너무 멀어지기 직전에 건진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찍혔다.

프로게이머 페이커의 할머니께서 손주의 경기 생중계를 즐겨 보시며 게임 용어를 줄줄 꿰고 계신다는 인터뷰를 보고 흠칫 놀랐다. 모두가 그런 판타스틱 할머니를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릴 땐 숙제하다 잘 모르면 부모님께 물어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요즘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부모님은 각자 나름의 인생에서 대가이시지만, 내가 가는 길은 그 방향이 아니다. 지구를 떠난 탐사선처럼, 내가 나의 삶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갈수록 부모님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것이다.

독립한다고 손바닥만한 집을 얻어 나간 뒤 숙제는커녕 어떤 조언도 구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게 되면 내 집에 남아 있던 제 짐을 마지막 하나까지 가져다 자기 보금자리에 옮겨두고는, 나더러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으라는 둥 아프면 병원에 좀 가라는 둥 타박을 할 것이다.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법정께서는 『어린 왕자』를 무척 좋아해 주위 사람들에게 서른 권도 넘게 선물하셨다고 한다. 한때 나는 스님 흉내를 내느라 『무소유』를 여러 권 사다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그 숭고한 ‘연쇄 선물마’를 따라 하기에는 나의 인간관계가 턱없이 빈약했다.

책이라는 것은 선물하기가 은근히 까다로운 물건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있고,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책 좀 읽으라는 뜻이냐며 발끈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해 지는 광경이 좋다고 했다. 나도 좋아한다. 특히 여름철 지루한 장마 끝의 노을을 사랑한다. 마치 솜사탕을 여기저기 헤쳐놓은 듯 색깔도 높이도 서로 다른 구름층이 여러 갈래로 휘몰아치다 갑자기 멈춘 듯한 하늘. 그 역동적인 하늘에 내려앉는 노을은 어찌나 붉고 또 어찌나 강렬한 황금색인지. 그렇게 황홀한 황혼은 태양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지구에서 태어난 나를 칭찬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집중력을 잃고 만다. 나도 법정 스님만큼이나 『어린 왕자』를 사랑하지만, 책 읽기를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어 다른 데를 봐야 한다. 문학의 범주에서 직업병의 영역으로 하릴없이 흘러가버리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서다. 그게 잘되는 날은 숨을 크게 몇 번 쉰 다음 책을 마저 읽고, 안 되는 날은 책을 덮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태양과 소행성과 어린 왕자의 개략도槪略圖다. 천체와 관측자의 크기 및 거리는 실제 비례와 다름에 유의.

나의 소행성이 자전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려 있는 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을 속으로. 더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어떤 번역본에서는 어린 왕자가 의자를 뒤로 물리지 않고 ‘당겨’ 앉는다. ‘옆으로 옮겨’ 앉는 어린 왕자도 있고,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의자를 ‘움직이는’ 어린 왕자도 있다. 영어판에서도, 일어판에서도, 어린 왕자가 의자를 움직이는 것은 몇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실 『어린 왕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쟁점이 알려져 있다.

결론만 말하자면 프랑스어판의 어린 왕자는 ‘의자를 당겨’ 해 지는 것을 볼 뿐, 어느 쪽으로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 의자를 움직이는 대신 해가 스스로 저물도록 명령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때도, 가로등 켜는 사람에게 ‘쉬고 싶을 땐 계속 걸어가면 된다’고 일러줄 때도 어린 왕자는 방향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생텍쥐페리가 지구를 누비며 대륙 간 항로를 개척하던 조종사였음을 상기할 때, 나는 그가 제대로 된 방향을 알았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거대한 태양의 아래쪽 끝이 지평선에 닿을 때부터 위쪽 끝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열여섯 시간. 지구에서는 해 지는 시간이 불과 2분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일지 모른다.

게으름뱅이는 아니지만 슬플 때면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에게 수성을 추천해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해가 하루에 두 번 지는 명당이 있기 때문이다.

적도를 따라 펼쳐진 루거스평원Lugus Plantia, 그 한편에 라트비아의 시인 라이니스Rajnis의 이름을 딴, 80킬로미터 크기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다. 크레이터 둘레의 언덕에 올라 일몰을 기다리면, 놀랍게도 해가 지는 듯하다가 다시 빼꼼 올라올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다니! 태양은 한동안 가던 길을 되짚어 올라오다가 다시 원래 방향으로 순행한다. 두번째 일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재미있는 일은 일출 무렵에도 일어난다. 해가 동쪽에서 뜨다 말고 도로 졌다가 재차 떠오른다.

지구는 공전 주기 1년에 비해 자전 주기 1일이 현저히 짧아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자전 주기의 몫이다.

경도가 결정한다. 서경 90도 혹은 동경 90도 근처가 명당이다. 여기서 멀어지면 태양이 역행하는 시점이 점차 바뀌어서, 하루 두 차례의 역행 중 한 번만 볼 수 있다. 경도 0도나 180도에 가까워지면 해가 오던 길을 잠시 되짚는 시점이 정오에 가까워진다. 이곳의 한낮은 그야말로 뜨겁다.

내려오다보니 사방이 캄캄해서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있는 곳이 등산로의 바위인지 마른 계곡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낙엽을 밟는 내 발소리가 나를 위협해올 무렵, 두 개의 불빛이 보였다. 하산길에 내가 올라가는 걸 보셨다는 등산객 부부였다. 곧 어두워질 텐테 아무 장비도 없이 혼자 휘적휘적 산에 올라가는 나를 보시고 혹시나 하고 산 중턱에서 기다리셨다고 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해 있는 일시적인 존재"를 위해 어두운 산속에서 랜턴을 들고 기다려주시다니. 나누어주신 랜턴을 들고 앞서가는 어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산에서 내려오는 그 저녁은 참으로 따뜻했다.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지상에서라면 속력을 높이거나 늦추는 방식으로 다른 물체를 따라잡을 수 있지만, 우주에서는 속력을 바꾸면 궤도의 높낮이도 같이 변하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달에 착륙했다가 돌아오려면, 달 상공을 맴돌며 기다리던 사령선과 다시 만나야만 한다. 달 표면에서 이륙한 뒤에 사령선과의 랑데부에 실패한다면 영영 지구로 돌아올 수 없다.

서로 다른 두 궤도의 절묘한 발맞춤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의 발현, 인류의 관심을 지구 밖으로 넓혀나가겠다는 의지, 우주와의 랑데부는 그 모든 것을 내포하는 교향곡이다.

친구의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캐스팅된 배우나 세찬 장맛비에 우산을 빌려주었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커플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랑데부가 있었을 것이다.

혹여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별에서 태어나 우주 먼지로 떠돌던 우리가 이 지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으니까.

난 원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에 내는 ‘희망직업’란에 ‘드러머’가 없었다. 난 엔지니어라고 썼고 손에는 스틱 대신 펜이 주어졌다. 그리고 공부도 음악도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국 난 고장난 스피커나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되겠지.

신세한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들렸다.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으면 덜 성공한 경우를 상상할 때조차 음악에 관련된 장비를 다루는 자신을 떠올리는 것일까? ‘고장난 스피커’를 고치는 사람이라니, 음악을 사랑하며 실천하는 실로 멋진 방법이다.

후배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애초에 대학원에서부터 화성 탐사 임무에 참여하고 있는 지도교수를 사사하거나, 천문학의 다른 분야로 일단 졸업을 한 뒤 박사학위와 좋은 논문 실적을 들고 화성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주 탐사 선진국이 발견했던 것을 그저 재확인하는 것보다는,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우리가 찾아내면 얼마나 좋을까.

개별 관측기기들이 부착될 탐사선 자체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공학 기술이 실현되어야 한다. 좋은 내비게이션을 써먹으려면 잘 굴러가는 차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 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그믐달은 밤을 꼴딱 샌 사람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는 그런 달이다.

『종이달』의 리카가 처음으로 일생일대의 일탈을 저지르고 나온 날, 앞으로 도저히 되돌릴 수 없으며 스스로는 멈출 수도 없는 범죄의 눈덩이를 굴리게 될 미래의 기운을 막연히 감지하는 그 순간은 그믐달이어야 한다. 거대한 밤이 지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돌아온 일상의 아침을 맞이하는 달이 초승달이라고 잘못 불리운 것은 아무래도 서운한 일이다. 그믐달이 그런 달이다. 다행히도 『종이달』의 우리말 번역본 표지에는 그믐달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초승달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상현달과 보름달도 꽤나 사랑받는다. 그러나 밤하늘에 하현달이 보이는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일제 강점기의 작가 나도향은 『조선 문단』이라는 문예지에 발표한 「그믐달」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달을 노래한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믐달은 해보다 조금 앞서 지평선 위로 올라와 잠시 보였다가 해가 뜨고 나면 밝은 햇빛 때문에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달은 차오르고, 뜨고 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오후에 반달이 보인다면 해와 한참 떨어진 동남쪽이다.

보름달은 해가 없는 동안 내내 밤을 지키다 해 뜰 무렵 서쪽으로 진다.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은 매일 대략 50분씩 늦어진다. 보름에서 며칠이 지나 이제 왼쪽만 볼록한 하현달은 한밤중에야 잠깐 떴다가 낮에 진다.

오른손 방향으로 볼록한 상현달이다. 보름이면 서쪽으로 해가 질 무렵에야 동쪽에 달이 떠오른다.

남향 창문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곳은 또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 대륙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해가 잘 드는 곳에 살고 싶다면 북향집을 찾아야 한다.

초승달은 해를 바짝 뒤쫓느라 초저녁에나 잠시 보였다가 이내 지평선 아래로 가버린다.

우주에 갈 때도 지구상의 미생물이 다른 천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대비를 한다. 지구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미생물이라도 다른 공간에서는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며, 지구에서부터 무임승차한 미생물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지구 밖에서 외계 생명체를 만났다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구도 한때는 황량한 곳이었다. 물도, 생명을 만드는 유기물질도 없이, 금속이 깊이 가라앉아 핵을 만들고, 그 위로 금속보다는 가벼운 암석의 맨틀이, 가장 표면에는 용암과 돌덩어리들이, 그리고 지구 밖 우주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유성 때문에 만들어진 운석 구덩이만이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의도로 지구에서 생명이 시작된 건 아니다. 수분도 유기물질도 없는 메마른 흙으로는 아담도, 아담을 빚을 질퍽한 반죽도 만들 수 없다. 우주라는 거대한 자연의 순리였다.

우리가 수십 년째 외계 생명체를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것은 오로지 우주에 대한 궁금증,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탐구심 때문이다.

우리는 관찰자일 뿐, 바깥 천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다. 생태계를 위해 어떤 잔인한 포식자 종을 절멸시키거나 가여운 피식자를 집중적으로 키워낼 권리가 우리 인류에게는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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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이 이소연으로 교체된 사건은, 남자의 자리를 여자가 대신한다는 충격으로 퍼져나갔다. 이소연이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주정거장에서의 실험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전문가라는 점은 쉽게 무시되었다.

우주정거장에서는 지구에서보다 얼굴이 붓는다. 다리 쪽으로 피를 잡아당겨주는 중력이 없는데도 심장은 지구에서의 제 역할을 다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소연은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열여덟 가지의 실험을 수행해냈고,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실험을 두고는 몇 날을 고민했다. 러시아 측에서 실험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요청할 정도로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런 일을 새내기 우주인이 완수해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목소리 높여 칭찬해주지 않았다.

이소연이 탄 귀환 캡슐은 궤도를 이탈했고, 화염에 휩싸이는 바람에 통신조차 끊어진 채, 거의 수직으로 카자흐스탄의 평원에 메다꽂혔다.

우주인 프로젝트는 일회성 사업이었고, 앞으로도 우주인 이소연이 할 만한 일은 11일간의 비행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후 4년간 그랬듯이. 그렇다고 몇 년 만에 다시 DNA를 다루는 공학박사 이소연의 길로 돌아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나가는 분야다. 수년간 손놓았던 사람이 다시 그 급류 속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물살을 타는 일이 어디 쉬울까.

규정 위반으로 우주 비행에 참여하지 못한 고산도 연구원과의 의무계약기간을 마친 뒤 미국에 갔다. 역시 우주인으로서의 정체성과는 별 접점이 없는 분야로 유학길을 떠났지만,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간절한 구직자의 슬픈 순발력으로, 다른 여성 지원자들보다 우위에 서보겠다고, 이미 아이들이 다 커서 육아휴직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다고 답변했다. 면접관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로부터 스무 날 가까이 지독한 불면과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했다. 면접 결과는 낙방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애가 아파서……"라며 휴가 내는 남사원을 상상해보면, 그런 말을 꺼냈을 때 받는 첫번째 질문은 "어디가 아픈데?"가 아니라 "애 엄마는?"일 것이다. 남직원도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만, 내 남편이 그 제도를 활용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쪽 직장의 분위기는 ‘이 회사의 역사에 길이 기록되고 싶으면 어디 신청해봐라’였다.

나는 어느 여자 교수님을 혼자 몰래 존경하고 있다. 분야가 달라서 직접 뵙고 말씀 나눌 기회는 흔치 않았지만, 언젠가 그 학과 대학원생을 우연히 만나 "그 교수님 어떠세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남초사회에서 자리잡은 여성 과학자는 언제나 호기심과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떤 성향이실까, 연구 스타일은 어떨까, 강의는 어떻게 하실까, 요즘은 주로 뭘 연구하실까, 그런 게 궁금했다. 그런데 내게 돌아온 대답은 "글쎄요. 애가 아프다고 학교 안 오실 때도 있고 그래요"였다. 내가 보기에는 정년을 앞두고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자신의 대학원생들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멋진 교수님인데, 고작 그런 시선이라니. 그것도 아직 젊은 대학원생의 시야가 그렇게 구태의연하다니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을 바꿨다는 이유로 그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싶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세금을 ‘먹튀’하려는 자다.

나는 내심 더러운 속옷을 손으로 빨게 만든 게 너무나 미안해서 한마디 말도 못하고 빨래하는 엄마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건지, 미안한 건지, 고마운 건지, 당시의 내 지적 능력과 어휘력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범벅되었던 그날. 아마 나는 한층 자랐던 것 같다.

어떤 수험생이 메모지에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라고 써서 책상에 붙여놓자 이과생이 와서 속도에는 이미 방향 개념이 들어 있다며 ‘속력’으로 바꿔 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남의 일이 아니다.

아는 교사가 환경 교육 자료를 공들여 만들면서 ‘초록별 지구’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고 했다가 이래서 이과생은 안 된다며 의절당할 뻔했다.

거의 모든 별이 행성을 거느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반세기 전에 달에 탐사선을 보냈던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달은 밤하늘에 떠 있는 천체가 아닌 ‘지질학적 대상’인 지 오래다.

나를 더욱 곤란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대단한 계기로 천문학을 선택한 것도, 어릴 때부터 오매불망 천문학자가 되기만을 그리다 마침내 꿈을 이룬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를 집중 조명하고 싶어한다. 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여럿 키워서 그중 한 사람이라도 대단해지는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세계적 과학자가 어디서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날 리 없는데.

유학을 가지 않은 국내파도, 맞벌이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다 괜찮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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