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물결. ‘은파’는 그런 뜻이다. 푸른 여름의 밤바다 위로 밝은 보름달이 고요히 떠오르면 연인들은 그 달빛 아래에 앉아 달이 아름답다고 서로에게 속삭이겠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주고받으면서.
먼 곳에서 날아온 커다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달이 생겨났다. 날아온 소행성도 거기에 부딪힌 지구의 일부도 산산조각이 났다. 조각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지구 주위를 맴돌다가 서로 얽히고설켜 달의 씨앗이 되었다. 굴릴수록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씨앗은 남은 조각들을 주워 삼키며 커다란 달로 자라났다. 이번에는 또다른 소행성이 날아와 달에 부딪혔다. 한 개, 두 개, 열 개…… 수없이 이어진 충격으로 달은 온통 불덩이가 되었다. 여러 개의 화산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것처럼 땅 밑 여기저기에서 용암이 흘러나왔다. 소행성들의 대습격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달은 천천히 식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산허리를 가득 메운 메밀밭에 소금을 뿌린 듯 흐뭇한 달빛……
1969년엔 달에 첫걸음을 내딛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주 탐사의 커다란 상징이었다면, 21세기의 달 방문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중력이 지구에서보다 여섯 배나 작으니까 더 적은 에너지로도 달의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향할 수 있다. 어쩌면 멀고 먼 화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지구에서 화성을 향해 바로 출발하는 것보다 달 기지에서 환승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고 경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완성되어서다. 달의 뒷면에 없는 것은 또 있다. 지구다.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이, 달의 뒷면에서도 지구가 보이지 않는다.
달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속에도 어지러이, 신화에서부터 휴대전화 부품에 이르기까지, 달에 대한 수만 가지의 생각이 싹틀 것이다. 보라,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도 벌써 달 생각 새싹이 쏘옥 고개를 내밀었다.
화성에서 물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질문은 대학 행성천문학 기말시험의 단골 문제인데, 정답부터 말하자면 극지방이다. 물과 이산화탄소의 얼음으로 된 거대한 극관이 있으니 그 얼음을 녹여 물을 뽑아내는 것이다.
선곡 과정에서 지구인들의 추천도 받았는데, 가히 지구 최강이라 할 만한 팬덤을 보유한 BTS의 곡이 일찌감치 우주 디제이의 목록에 올랐다. 단순히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아니었다. 많은 후보곡 가운데 〈소우주〉와 〈134340〉, 그리고 멤버 RM의 〈문차일드〉. 이렇게 우주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선택되었다.
어린 시절, 태양계 행성의 이름 앞글자만 따서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순으로 외웠던 사람들에게 마지막의 ‘명’을 묵음으로 처리해야 하는 당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분명 행성이라고 배웠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지를 않나,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황도 12궁이 13궁으로 변해서 생일 별자리가 바뀔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지를 않나, 하늘에 있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줄 알고 이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며 갖은 맹세를 다 했건만 천상의 세계도 변한다니 이 무슨 변고인가.
태양 주위를 돌면 행성, 그 행성의 주위를 돌면 위성, 위성은 아니지만 행성보다 많이 작으면 소행성, 때때로 태양 주위로 다가와 먼지와 연기를 흩뿌리며 지나가면 혜성이었다.
태양 주위를 도는 둥근 천체 중 궤도를 독점하면 행성, 궤도에 이웃이 있으면 왜소행성으로 정하면서 자연스럽게 명왕성은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었다. 명왕성을 발견한 게 미국의 연구팀이라는 사실에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불만을 품고 행성 명단에서 끌어내렸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때때로 전 지구인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기도 한다. 명왕성의 영어 명칭인 플루토Pluto라는 이름도 공모전 당선작이다. 영국의 한 소녀가 로마 신화 속 저승 신의 이름을 제안했던 것이다. 내가 지구 밖 우주에 이름을 붙이다니, 그 이름을 전 세계인들이 영구히 부르게 된다니, 과학자들의 논문에도 그 이름이 사용된다니, 그것 참 근사하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동Udon’과 ‘소바Soba’도 있었다. 방 조명이 어두워서 알파벳을 잘못 읽었나 하고 잠시 먼 데를 보며 눈을 두어 번 깜박깜박해본 뒤 다시 보아도 우동, 소바였다. 그렇다. 어떤 나라,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것이 하늘에 붙일 가치가 충분한 중요 단어일 수도 있다.
지금 우주를 논하고 있는데 이 작은 지구에서 그런 일로 깜짝 놀라다니, 그건 내가 부덕한 탓일 뿐. 민주적 지구인답게 다른 후보에 한 표 보태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행히(?) 최종적으로 확정된 외계행성 이름에 음식 이름은 없었다.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만 원짜리 한 장은 가지고 다니도록 하자.
우리가 명왕성을 행성이라 부르든 왜소행성이라 부르든 134340이라 부르든,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따돌림받고 소외당하며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자의 심정을 명왕성에 이입시키려 하든 말든 명왕성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 멀고 어둡고 추운 곳에서, 하트 무늬처럼 보여 지구인에게만큼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얼음평원 스푸트니크를 소중히 품은 채 태양으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을 잡고 있을 뿐이다.
팟캐스트에서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말한다. 경유지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을 기다리는 동안 읽을 것도, 쓸 것도 없어 눈멀도록 바다만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셨노라고. 그러다보니 계절이 지나가는 게 느껴지더라고.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 들었다.
하늘의 별은 하루에 한 바퀴, 그러니까 한 시간에 15도 움직인다. 그래서 아주 희미한 별이나 은하, 성운의 사진을 찍으려면, 망원경을 받친 가대를 천체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도록 하는 추적 모드로 두고 장시간 노출을 준다.
인공위성은 얼마나 높이 떠 있느냐에 따라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건 여간 숨막히는 일이 아니다. 망원경의 시야는 대단히 좁아서, 살짝만 건드려도 망원경 속 하늘은 저멀리 달아난다.
당신이 건드리지 않아도 지구는 돌고 행성은 별 사이를 돌아다니며, 담당자는 수시로 망원경 시야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다.
숨이 막힌 이유는 또하나 있었는데, 배율이 아주 높아서 내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쌍안경 속에서 배우의 얼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계속 보려면 계속 숨을 참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옆자리 관객은 내 몫의 산소까지 한껏 들이마셨다. 그러려고 빌려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 돈다고 교과서에서 배우긴 했다. 동심원을 그리는 별의 궤적이 찍힌 일주 사진도 여럿 보았다. 별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니 그 속도는 하루에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으로 나누면 한 시간에 15도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순한 계산. 천문학을 책으로 배운 내게는 그저 단위 환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돌고래가 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기 전까지는.
밤도 흐르는데, 계절도 흐르겠지. 나도 이렇게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인생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겠지. 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도 밤은 흐르고 계절은 지나간다. 견디기 힘든 삶의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물 아래 납작 엎드려 버티고 버텼던 내 몸을 달래며, 적도의 해변에 앉아 커피 한잔 놓고 눈멀도록 바다만 바라보고 싶다.
한낮의 열기가 다 사위고 나면, 여름밤의 돌고래가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아주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라고. 잠시 멈췄대도, 다 괜찮다고.
처음에는 자기 노래 순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그러다 서로의 취향이 만나기도 한다. 큰애가 요청한 레드벨벳의 중독성이 강한 노래 〈짐살라빔〉의 후렴구는 동생이 더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큰애는 내가 넣어놓은 보아 노래 중 〈내가 돌아〉의 순서가 돌아오기를 함께 기다린다. 차가 막히면 형돈이와 대준이의 〈올림픽대로〉를 따라 부르고, 신나게 달릴 때는 인큐버스의 〈Anna Molly〉를, 뒷자리의 아이들이 잠들면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Girl from Iphanema〉를 듣는다.
음악이 없다면 낯선 타지에서의 두려움과 떨림, 떠나서 머무르고 되돌아오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그 피로를 어찌 덜어낼 수 있을까.
시차의 피로, 발표할 자료 중 행여나 뭐라도 빼먹은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 서로 다른 나라에 살기에 학회에서나 만나게 되는 공저자들과의 회의를 앞둔 긴장감, 향후 함께 일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를 잠정적 공동연구자를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감 따위와 맞서려면 이어폰이 꼭 있어야 한다.
처음 와보는 도시, 혹은 여러 번 와봤지만 여전히 낯선 도시의 출퇴근길에, 내 핸드폰에 어느 나라의 유심 카드가 꽂혀 있든 간에 ‘멜론’이나 ‘지니’ ‘벅스’가 음악을 내 귀에 꽂아준다는 이 기적이야말로 신께서는 전형적 집순이요, 내향성 인물인 나까지도 애써 굽어살피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신의 가호 아래 나는 이번 출장도 잘해내리라, 작은 성공이라도 얻으리라, 스트레스와 시차로 인한 불면의 밤도, 없던 감기도 만들어주는 호텔 방의 건조함도 이겨내고 집까지 무사히 돌아가리라. 여비 정산에 필요한 영수증을 단 한 장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약은 약사에게, 과학은 과학자에게, 그리고 탐험은 탐험가에게 맡깁시다. 저의 지구력은 지구에서만 발휘할 수 있거든요.
우주에 관한 수많은 노래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은 메이비의 〈어 레터 프롬 에이벨 1689〉라는 곡이다. 에이벨은 은하단을 조사하고 목록으로 만들었던 천문학자의 이름으로, 그가 남겨둔 은하단 목록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에이벨 1689는 에이벨 목록에 올라 있는 1689번째 은하단을 뜻한다. 처녀자리 부근에 있는 이 은하단은 지구로부터 대략 22억 광년 떨어져 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이고,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신호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에이벨 1689의 사진은 사실 22억 년 전의 모습이고 지금쯤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같은 지구상에 있어도 문자를 보낼 수 없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에이벨 1689만큼 떨어져 있다면 어떨까. 아득히 먼 그곳에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편지는 아무리 일찍 부쳐도 이미 늦었다. 그래서 가슴이 아리다.
래퍼 학생께서는 명왕성에 깊은 영감을 받았는지 평가상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며 꼭 받아달라고 했다. 하지 말라는 과제를 해왔으니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었지만, 나는 명왕성을 생각할 때마다 그 학생의 과제가 떠오른다. 지금쯤은 괜찮은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을까? 행성으로 인정받지 못한 명왕성과는 달리, 음악인으로 분류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그의 길은 어떤 음악으로 채워져 있을까?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달에 꼭 달 과학자를 보내야 한다면, 행성에 꼭 행성과학자를 보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게 나여야만 한다면, 나는 우주 디제이에게 래퍼 학생이 과제로 제출했던 음악 파일을 틀어달라고 부탁하겠다. 행성이 아니지만 행성이었던 명왕성처럼 과제로 인정받지 못한 과제였던 그 노래를 들으며, 우주 항해의 괴로움을 과제 채점의 괴로움으로 잊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처럼 우리 역시 지구라는 최고로 멋진 우주선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생이 그토록 찬란한 것일까. 여행길에서 만나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 보이니까. 손에 무엇 하나 쥔 게 없어도 콧노래가 흘러나오니까.
수십 년 만에 다시 달에 사람을 보내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를 위해 미항공우주국은 여러 가지 음악을 골라두었다.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면서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곳의 환경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낯선 땅의 흙과 돌을 채집한 두 사람은 다시 달 궤도로 올라와 사령선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고, 세 사람 모두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한국에 행성과학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그러면 나는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 원래 세 명인데 이번 주엔 다 여기 학회에 와 있어서 지금은 한 명도 없다고. 그들은 나의 그런 농담을 우습다고 좋아했지만, 사실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능청도, 그다지 엄청난 과장도 아니었다.
‘우리’가 사람을 달에 보내서 기뻤다고 했단다. ‘우리’는 미국인도, 미항공우주국 관계자도 아닌, 인류 전체였다. 이번엔 내가 조금 놀랐다. 과연 못난 자격지심이었구나.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우리나라도 이제 달 탐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한국형 달 탐사선이 얻은 관측자료를 전 세계와 나눌 차례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성과는 우리나라가 혼자서만 잘해서 얻은 것은 아님을 생각한다. 유사 이래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교육받고 서로의 연구를 공유하고 참조해가며 쌓아온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지구상의 전 인류에게 ‘우리’ 관측자료를 내어놓을 그날을 기다린다.
과학자가 하는 일 중에 내가 아직 잘 모르는 것이 또하나 있다. 과학자도 에세이를 쓰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도 있지만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책을 쓰더라도 대개는 전문적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책이나 대학의 교재를 집필한다. 하지만 그런 책을 쓰기에는 스스로가 아직 너무 초짜라고 여기는 일종의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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