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 자빠질 만큼 훌륭한 레스토랑 바에 앉으면 옆자리의 프랑스 노부부가 눈처럼 새하얀 미니어처 푸들을 안은 채 비프스테이크를 레어로 주문한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종업원이메뉴판에 없는 특별 요리를 주문하라고 권한다. 거의 까먹은고등학교 시절의 프랑스어 실력으로 간신히 주문한 요리가 우유를 먹인 돼지인지 우유에 재운 돼지인지 모르겠다. 뭐, 둘다 좋다. 종업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나온 요리는 평생 처음 먹어 보는 최고의 맛이었다.
P - P12

중세 수도원에서 새벽 어둠이 스러지는 마법의 10분은 아마도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드리워진 노르망디의 안개 커튼이 사라지면서 줄지어 늘어선 사과나무와 배나무에 화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잘 익은 탐스러운 과일이 수도승의 손과 요리사의 칼을 기다린다. - P13

앤과 나는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파리와 사랑에 관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함께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가 같은 것을 좋아하고 파리를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축복했다. - P14

은퇴하면 이 아름다운 나라의 도시 한쪽에 작은 거처를 마련하거나 허름한 농가를 구해 노후를 즐기고 싶다. 직업란에 ‘철학자‘라 썼던나폴레옹을 지금도 숭배하고, 미친 듯이 뻣뻣하다가도 감동스러울 만큼 우아할 수 있으며, 자식이 열네 살밖에 안 됐는데도 독립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 삶을 이해하고 싶다.
무엇보다 꿈에 보았던 그 카페의 적막한 공기를 활기찬 말소리 - P14

로 채우고 싶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면 절대 프랑스인이 될 수없다. 이제 하고 싶다는 말 따위는 집어치우고 행동으로 나설 때다. 내가 사람들이 점잖게 돌려 말하는 늦은 중년, 꽉 찬 쉰일곱인 건 사실이다. 이 나이에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내년에는 더욱 어려워지겠지. C‘est la vie.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 P15

많이 다르다. 더구나 나는 영어를 말할 때 프랑스식 발음이 묻어나는 어느 여성을 대단히 사랑한다. 바로 오드리 토투다. 만일 그녀의 발음이 평범했다면 아마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을것이다. - P21

번즈는 조지타운대학교 독일어학과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에대해 말해 주었다. 모든 수업은 ‘맥락 학습과 언어 학습을 동시에‘라는 흐름에 발맞추어 언어 자체의 학습과 그 언어를 사용하여 하려는 일을 연계시키는 데 힘쓴다. 결국 독일어라고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 학생을 받아도 4학기만 지나면 독일 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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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감정이 필요할 때 행동이 감정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균형이 잡히고 길이 보인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흔들리는 마음의 파장 끝에서 기쁨의 문양이 그려지기를 기다린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하모니는 관계다.
관계는 모두가 음악이다.

일찍 일어나 병원 갈 채비를 한다. 필요한 서류들을 가방에 넣다가 나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을 넣는다. 슈베르트 평전과 뮐러의 시 〈겨울 나그네〉. 왈칵 솟으려는 눈물을 겨우 참는다. 그래 나는 깊이 병들어도 사랑의 주체다. 울 것 없다. 그러면 됐으니까.

환자의 정신적 삶은 갈림길에 선다.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 살 것인가, 그것과 결별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인가의 양자택일. 선택은 쉽지 않고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그건 어느 쪽이든 나의 삶은 온전히 나에게 맡겨졌다는 것. 이제 나는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는 단독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침 녹즙을 과하게 먹었던 걸까. 산책 중에 구토를 했다. 드디어 증상들이 나타나는 걸까. 불안해진다. 생수로 여러 번 입가심을 하니까 침착이 돌아왔다. 안심해 괜찮을 거야, 진동이 남아 있는 배를 애인 달래듯 애무한다. 배가 좀 편해진다. 돌아와서 현미 죽을 먹었다. 된장에 무친 우렁이 맛있어서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울 수 있었다. 역시 녹즙이 조금 과했던 것이다. 위기의 증상은 아닌 것이다. 애인이 화를 내고 나를 떠나려는 건 아닌 것이다. 안도감, 고마움 그리고 어떤 사랑스러움……

길가에 차를 세우고 풍경을 바라본다. 아침 세우가 세상을 적신다. 차창을 열고 팔을 내밀어 빗방울을 느낀다. 아 너무 좋아라, 애무에 취한 애인처럼 마음이 온몸을 풀어 기지개를 켠다.

자유가 그립다. 나의 자유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자유를 빼앗긴 걸까 아니면 포기한 걸까. 지금 나의 적은 신체의 병이 아니다. 그건 내 정신의 치졸함과 비겁함이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많은 것이 그대로다. 어디에 발을 딛고 설 것인가. 답은 자명하건만 그 자명함 앞에서 매일을 서성인다. 서성임, 그건 자기연민일 뿐이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도서관의 책들과 구곡의 마음들 사이를 경계 없이 떠돌며 지적 영토들과 감성의 영역들을 정처 없이 주유했다. 항공사진으로 내가 주유했던 생의 지도를 본다면 어떨까. 줄기식물의 생태처럼 머무름과 떠남, 만남과 헤어짐이 두서없이 엇갈리는 헤맴의 족적들은 지도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평정의 장소.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는 곳.
음악이라는 고요의 세계.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의연함을 지켜야 할 것이다. 돌아보면 살아오는 내내 나는 겁쟁이였다. 불편함, 괴로움, 고통들 앞에서 늘 도피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건 모두가 착하고 친절했던 주변의 타자들 덕이었다. 이제 그런 시간은 지나갔다. 다가오는 시간들,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인내와 힘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 노래하자.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결정주의라는 선취된 오류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오류의 자리에 희망을 앉혀야 한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발생한다. 이 희망의 진실에 대한 확신이 지금 내게 절실한 미덕이다. 그러니 희망을 노래하자. 비타 노바.

혈액검사 결과가 놀랍다. AFP 수치는 전처럼 정상이다. 고마운 건 PIVKA-Ⅱ의 지표다. 한 달 전의 수치는 5700이었는데 이번에는 900이다. 무려 5000 가까이 내려앉았다.

때와 시간은 네가 알 바 아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

추녀마루의 부드러운 곡선, 혼자가 아니라 둘로 층이 나뉘어서 더 중후한 힘의 안정성, 하늘을 바라보는 지붕들의 겸손한 낮음―내가 자주 삶의 격조라고 부르기 좋아했던 어떤 자세.

잊지 말 것: 불안과 근심은 늘 잘못된 생각의 과대망상이다.

좋은 것들과 사랑들이 내게는 너무 많다. 그걸 잊지 말 것, 늘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할 것, 그리고 환대하고 응답할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이며 모든 일이다.

신속한 판단과 과감하고 빠른 행동―이제 그것이 나의 새로운 법률이고 원칙이다. 더 이상 망설임과 지연은 내 사전에 없다.

새벽에 깨어나 두 개의 비상사태를 생각한다. 하나는 적극적인 대체 치료, 다른 하나는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 밝아오는 아침부터 당장 시작할 일이다.

사이사이 지나가는 천진하고 충만한 순간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생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중립의 시간이 있다. 그 어떤 불행의 현실도 이 불연속적 순간들, 무소속의 순간들, 뉘앙스의 순간들을 장악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다. 그래서 불행의 현실들 속에서도 생은 늘 자유와 기쁨의 빛으로 빛난다.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그 사이에 지금 여기의 시간이 있다.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없다. 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지금 내가 도착해 있는 장소는 정확하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더 가야 한다.

내 안의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랑들, 미친 듯이 자기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그것들은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제 또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걸까. 무엇으로 이 텅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어제오늘 〈댈러웨이 부인의 꽃〉 칼럼을 대강 마무리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역시 옳다. 종이 울렸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불안이 심해진다. 자꾸 놀라고 쓸데없는 일들에 생각을 빼앗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낙담스럽다. 그래도 결국 지나갈 거라는 걸 안다. 조용한 날들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안다.

새벽잠을 깬다. 돌아누우며 중얼거린다.
"행복, 기쁨, 평화……"

자기연민은 치졸하고 가엾다.

운명의 한 해가 간다. 해는 가도 운명은 남는다. 나도 남는다. 나와 운명 사이에서 해야 할 일들도 남는다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기어코 돌파해야 한다. 나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가 힘들다. 그 말들이 나이건만, 그 말들이 없으면 나도 없건만.
나는 말해야 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오래된 습관의 나무를 캐어내고 토양을 비워야 하는데 질기고 깊은 과거의 뿌리를 캐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거의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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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아카데미 강연을 마쳤다. 880명.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해보기는 처음이다. 대부분 4, 50대. 나보다 더 연배가 높은 분도 계셨다. 이런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국립국어원이 ‘세꼬시’를 ‘뼈째회’로 순화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참밖에 할 말이 없었다. 국어원은 아무도 쓰지 않을 말을 잘도 만들어낸다. 이미 ‘막회’라는 말이 있는데. 또 그냥 세꼬시라고 하면 안 될 이유는 뭘까.

내 강연이나 강의가 괜찮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는 준비하지 않은 말이 나왔을 때이다. 어제 강연이나 오늘 강의가 그랬다. 그런데 어제 강연에서는 준비했던 중요한 말을 하지 못한 것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는 가죽나물장아찌가 있다. 짠맛에 가볍게 흙냄새가 나는 것이 절제된 관능을 느끼게 한다. 요즘은 구하기 어렵다. 우체국 택배로 그걸 산 적이 있는데, 후회했다. 고추장으로 범벅을 만들어놓았고 달기까지 했다.

경향신문에 실었다가 다시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실은 「인문학의 어제와 오늘」에는 오해될 여지가 많다. 옛날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잘 썼다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려는 노력이 많았는데, 지금의 논문 양산 체제에서는 그 노력조차 불가능해졌다는 말을 했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선 요리를 잘하셨지만 당신은 들지 않으셨다. 목으로 넘어갈 때의 어떤 관능을 죄스럽게 여기셨기 때문이란 걸 내가 늙어갈 때야 알았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옛날에는 자식 자랑, 마누라 자랑 같은 것을 팔불출로 쳤다. 요즘은 마누라 자리에 고양이를 넣어야 마땅할 것이다.

금성이 초저녁에 뜨면 거지별 또는 개밥바라기별이고 새벽에 뜨면 샛별이다. 좋은 시인들은 늘 거지별 노릇만 한다. 이렇게 길 열어놓으면 샛별 노릇하는 사람 따로 있다.

복거일씨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만 읽으면 편향된 지식을 얻을 위험이 있다고 했다는데, 별걱정을 다 한다 싶다. 뭐는 안 그런가.

시쓰기는 소통하기 어려운 것을 소통하려는 노력이다. 나중에라도 소통되도록 길을 여는 일.

막장 드라마에도 시는 있다. 그러나 시는 말을 생산하지만 ‘막드’는 단지 소비한다. 시에도 말을 생산하는 시와 소비하는 시가 있다. 소통 운운하는 것은 대개 말을 소비하는 시인들이다.

마누라 청소를 도와줬더니, 소파 밑 의자 밑 구석구석 먼지를 뽑아내라고 난리다. 뿌리 뽑기라는 게 얼마나 파시즘적 사고인데.

과외는 교육 제도의 문제가 아닌 게 이미 증명되었다. 제도가 어떠하건 한국 사람이 있으면 과외가 있다. 제도를 들먹이는 건 정작 중요한 문제를 가리기 위한 술책이다.

글쓰기 싫으면 번역을 하는데, 해놓은 게 제법 많아졌다. 글쓰기 싫은 적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 번역하기가 글쓰기보다 쉽지는 않지만 제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프랑스어의 ‘fee’를 뭐라고 번역해야 하나. 선녀는 너무 동양스럽다고 하고, 요정하고는 급과 성질이 다르고, 마녀는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데 이때 마녀는 무녀sorciere다. 신데렐라에게 마차를 준 것도 숲속의 미녀를 잠들게 한 것도 모두fee다.

내가 고종석의 ‘문장’을 극찬하는 것이 마땅하나 괘씸해서 안 한다. 나는 내 책을 보내주었는데 저는 안 보내줬다.

문장도 혹에 혹이 달린다. 로트레아몽의 문장은 꼭 변신 합체 로봇 같다.

김화영의 『이방인』은 씹어 먹여주는 식의 번역에서 오는 몇 가지 오류가 있지만, 좋은 번역이다. 문체가 좋고, 불어의 이런 표현은 우리말의 이런 표현으로……를 자주 가르쳐준다.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배은망덕한 것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에 "가을에 사랑하듯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젊은 육체의 욕망과 격정에서 해방되면서도 그 열기를 향기나 결실의 형식으로 간직하고 실천하는 사랑을 말하겠다. 보들레르도 요즘 같으면 겨울의 사랑을 말했을 텐데 그땐 겨울이 매우 추워서.

1990년대에 ‘W이론’이라는 것을 서울대의 어느 교수가 주창했다. 신바람 어쩌고 했는데 우리는 잘났다고 집단 최면을 걸어놓고는 정신줄을 놓고 일하라고 독려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 흥분한 머리에 IMF가 찬물을 끼얹었다.

용어 만들기도 때로는 폭력이다. 우리 정신을 자동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의 보수 패거리가 지금까지 팔아먹고 산 것은 박정희 이미지밖에 없었다. 박근혜까지 나왔을 때는 거의 떨이 수준이다. 떨이가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민 갈 필요 없다.

젊어서는 번역은 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를 때 황당하고, 늙어서는 무슨 소린지는 아는데 번역이 안 될 때 괴롭다. 번역가의 일생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는 "말을 조각처럼 한다"는 표현이 있다. 요즘 말로 엣지 있게 말한다는 말과 비슷하려나.

우리집 애들은 다래끼가 나면, 정약용의 처방에 따라, 반대편 발바닥에 天平 두 글자를 써서 그때마다 효과를 보았다. 미국에 간 애가 카톡을 보내왔다. 다래끼가 났는데 붓펜이 없다고.

머리가 굳어진 순수주의자보다 더 끔찍한 것도 드물다. 종교 문제에서도 그렇지만, 언어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어떤 시도를 해도 토론이 불가능하다.

이수열 선생은 언어순수주의자지만 매우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 내가 선생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그 맥락을 이해하고 그 논리를 존중했다. 한국어의 용법에 선생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분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부부 이야기. 남자는 전라돈데 보수고, 여자는 경상돈데 진보다. 남자가 상머리에서 뭐라고 떠든다. 여자가 말한다. 입 다물어! 계속 떠들고, 입 다물어! 그래도 떠들고, 입 다물어! 마침내 여자가 상을 엎는다. 그렇게 20년을 같이 산다.

남을 할퀴고 뒤통수치는 식으로 농담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재치라고 생각하겠지만, 재치 부족이고 병이다. 내 선배 중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망했다. 인간관계가 악화되기 전에 그 나쁜 재치가 상상력을 가로막았다.

유치원 첫날, 선생이 말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은 오른손을 드세요. 한 아이가 물었다. 그럼 안 마려워져요? 순진성이 재능을 만든다.

세상에 더 논리적이거나 덜 논리적인 언어는 없다. 프랑스 문법학자들은 불어에서 비논리적인 표현이 통용될 때,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불어는 논리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비논리적인 표현이 통용되면 그 말을 못 쓰게 한다. 참 쉽다.

문 닫고 나가요, 같은 말이 있다. 어떻게 문을 닫고 나가겠는가. 그런데 이 말은 당신이 나간 다음에 문이 닫힌 상태가 되게 하라는 말이다.

삶은 유전자와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고 누가 나에게 트윗으로 물었다. 그걸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도 중요할 것이다. 아니 그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MB는 아니지만 내가 살아봐서 안다.

사람은 불행한 시기를 잘 보내야 하는 것 같다. 불행한 시기에 늘어져 있으면 기회가 와도 잡기 어렵고, 기회가 기회인지도 모르게 되더라.

새로운 농담을 가지고 오는 사람, 천사가 따로 없다.

내 나이 또래 인간들은, 억압은 박정희한데서 받고, 분풀이는 젊은 애들한테 힌디. 그리고 박근혜를 찍는다. 생각해보면 불쌍하다.

취해서 쓰니 오자가 많구나.

이러다 유신 시대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어느 젊은 문인이 말했다. 애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한번 일어선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기지 않는다. 무릎이 자주 다치긴 하지만.

일어설 만큼 성장했다는 것은 무릎이 깨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는 말도 된다.

"배터리가 닳는다"는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항의를 들었다. 앞으로 나는 이런 항의를 아주 많이 듣게 될 것이다. 모국어와 트윗이 동시에 지닌 미덕은 문법을 넘나들면서 쓸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 미덕을 즐길 것이기에.

옛날 어느 국어학자가 ‘뛰다’는 상하 운동을 뜻하기에 ‘뛰어가다’라고 말하면 틀리고 ‘달려가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람도 무슨 자리에 들어가면 법을 만든다. 내가 왜 그런 바보들의 법을 지켜야 할까

어제는 최인석의 소설 『강철 무지개』의 출판 기념회에서 자정을 넘기고 무사히 귀가했다. 최인석은 진솔하고 정직해서, 그의 소설은 늘 한국 사회의 현재다. 최인석이 여기까지 왔네 하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빈정 상한다"는 말이 있다. 사전에 없다. 대인 관계에서 감정에 은근히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다. 카톡의 친구 찾기에서 누군지 모를 이름이 뜨면 상대가 빈정 상할까봐 함부로 지우기 어렵다. 상대가 알 리 없겠지만. 그런 이름이 30개다.

잘못된 말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법 공부는 꼰대질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한국어 제1급 사용자 운운하는 바람에 빈정 상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때로는 빈정거리며, 때로는 정색하며 공격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시비가 생산적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길고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문장 하나를 번역해놓고 보니 아무 말도 아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이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라는 말로 시작한다. 로트레아몽은 22세에 이 글을 썼다. 내가 애한테 이런 조롱을 받고 여생을 보내야 하는가.

손홍규, 「불혹의 작가들」

MB는 진심을 연출하려고 노력했으나 목소리도 얼굴도 받쳐주지 못했다. 지금은 화난 듯 멍한 듯하다가 갑자기 웃는 얼굴을 본다.

주인공들은 운이 좋았다. 공주가 아직 어렸으니까.

외래어 표기에서 ‘현지음에 충실하게’는 처음 표기를 결정할 때에 그쳐야 한다고 본다. ‘미친년 널뛰기’나 ‘전 국민 희극배우화’를 면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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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을까’ 생각한다. 그런 순간들마다 아버지가 남기신 글들이 위안과 길잡이가 된다.

조그만 스크린에서 당신이 방금 쓰신 트윗의 오타를 잡아내느라 집중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여행중에도 트위터를 도통 놓지 못하셔서 가족들이 조금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프신 후에는 트윗이 많이 올라오는 것이 되레 안심이 되곤 하였다.

아버지의 트윗들은 당신의 평소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텍스트이다. 평소에 즐겨하던 농담들, ‘비상식적인 많은 것들’에 대한 한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애정 어린 인사, 그리고 어느 곳에서 건져올렸는지 가늠할 수 없는 은유와 이야기들이 아버지의 트위터에 모두 담겨 있다. 그 문장들은 적확하고 섬세하다. 아버지는 트윗을 올리실 때도 ‘찰칵’ 소리가 날 때까지 문장을 공들여 다듬곤 하셨다.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반론을 주의 깊게 듣고, 타당하다고 여겨지면 기존 생각을 수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다. 아버지의 트윗들에서 그 유연함이 엿보여서 기쁘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극도로 비정한 삶을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것이 곧 틀린 것이 되는 것은 단 하나의 표준만이 용납될 때이다.

좀 있으면 홍어철이 되는데, 홍어는 배에 싣고 육지로 옮겨오는 동안 상해서…… 삭혀 먹게 되었다는 따위의 헛소리를 올해는 좀 안 들었으면 한다. 세상만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지……

우리에게 상쾌한 것은 더위에 바람 불어오는 것, 집 탈 때 빈대 타는 것밖에 없었던 듯.

‘연득없이 나타나서’는 ‘하필이면 꼭 그때 나타나서’로 바꿔 써도 된다.

내 살던 동네에는 ‘연득없는 영천넘’이라는 표현이 있다. 영천넘은 영철이네 엄마. 나설 때나 안 나설 때나 나서는, 일을 망치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연득’이 ‘연덕’(인연의 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꾸중에는 ‘연득없는 소리 하지 마라’가 있다. ‘괜한 말썽을 일으킬 소리’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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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것저것 정리하는 일이 귀찮지 않고 즐겁다. 뜻밖에 발견하게 되는 보물에 대한 기대도 있고.

나는 여전히 꽃지팡이를 들고 있었지. 어느 수녀가 나에게 "수녀님의 뒷모습이 멋져요!" 하기에 "앞모습은?" 하며 웃었지.

오늘 새벽 김형영(스테파노) 시인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1944년생인 그는 얼마 전 내게 보낸 문자에 "암세포가 폐에 은하수처럼 박혔다"고 하더니. 고통스러운 병상에서도 시를 짓고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바야흐로 이별의 계절. 떠나는 수녀들에게 손 흔드는 일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네. 나이 들수록 헤어짐의 슬픔이(나는 겉으로 태연한 척해도) 깊게 스며드네.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를! 옆구리에 온열기를 대고 이것저것 시도해 봐도 기묘한 아픔이 가시질 않네.

요즘의 나는 옛 추억을 소환해서 글로 기쁨을 나누는 ‘편지 수녀’가 되어가고 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문득 외로움 한 조각이 스며들었지만…… 밝게 웃으며 맞이하였지.

오늘은 ?이기적인 기도?, ?어느 날의 일기?라는 두 편의 시를 썼다. 시를 쓰는 일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늘 기쁨이 고여 있지. 내게 가장 행복한 일이지.

몸의 중심인 허리! 중심이 무너지니 일상의 중심도 무너지네. 누워야만 편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밖의 햇살은 눈부신데 나는 침대에 누워 우울만 쌓이고, 웃을 수도 없고! 통증과 친해지기 힘들어 작은 꽃 이름을 불러보네. 쑥갓꽃, 상추꽃, 냉이꽃……. 그리고 나비와 새들의 뒷모습, 기도하러 들어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시를 짓고 싶네.

아침에 일어나기 정말 힘들었으나 겨우 추스르고 일정을 소화하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엔 기쁨이 일렁이네. 앞으로도 사이좋게, 선하게 내 몸과의 싸움을 잘해야 정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나이 든다는 것은 ? 결국 망가진 몸을 힘들어하며 우울에 빠지기 쉬우니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하는 법!

어느새 하얀 라일락이 동백꽃 사이에서 웃고 있어 깜짝 놀랐네. 곧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도 피어나겠지.

모든 수녀들이 윤여정 배우의 연기를 칭찬하니 나는 그녀의 지인으로서 기분이 좋네.

"해인 엔터테인먼트 차리세요!"라고 농담으로 나를 놀리는 후배들이 귀엽다. 하도 이것저것 나누기를 잘하니 붙여준 별명!

대식당에서 수도원의 대가족이 서로서로 챙겨주며 밥을 먹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대단한 예술이다.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생생하고 아름다운 특권이다.

요즘은 옛일들이 조금씩 하나하나 떠오르네. 돌아가신 엄마, 언니, 오빠 생각도 더 많이 나네. 삼촌과 고모들 생각도.

정원을 한 바퀴 도는 일도 얼마나 행복한지! 매실은 제법 굵어졌고, 밀도 통통하게 크고 있고, 감자밭에도 근대밭에도 푸른 잎들이 나날이 무성해지고. 잠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멋진 기도가 된다.

약간은
흐린 날
나는 오늘 문득
시를 쓰고 싶네

드디어 화이자 백신을 우리 동네 문화체육센터에 가서 맞는데 순서가 어찌나 질서정연한지…… 새삼 놀라게 되었네. 75세 이상의 노인 대열에 나도 끼어서 하늘 보며 앉아 있는데 미소가 절로 피어났지. 셀카를 찍어 몇 군데 보내기도 하였지. 마음은 젊다고 느끼는 나도 이젠 77세 노인의 대열에 들어서 웃고 있다고! 아직 이렇게 살아 있음이 복되고 유쾌한 일이라고!

쉴 때는 분심 없이 편히 쉬어야 하는데 그 일이 뜻대로 되지를 않는군.

나에게도 맑고 밝은 동심이 물들어서 어린 시절 담임교사 이름들을 적어본다. 이분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지?

백경 책방의 구태경 대표가 내가 원하는 여러 권의 책들을 경비실에 맡겨놓고 가니 큰 부자가 된 것 같다. 역시 책을 읽는 즐거움은 가장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몸은 아파도
마음은
노래하는 새처럼
즐거울 수 있다고
종종 이야기한 것을
나는 지금
취소하고 싶네
온몸에 고장이 나
힘이 드는 날은 더욱!
그래도 웃어야 되는
나의 멋진 삶

아침부터
조용조용 비가 내리네
비는 조용히 내려도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오후에 잠시 보여준 햇빛이 얼마나 찬란하고 고마운지! 평소엔 고마운 줄 모르다가 장마철이 되면 새삼 더 그리운 햇빛!

뻐꾹새 소리가 조금씩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하네. 전에 비해 소리도 약해진 것 같은데……. 새들도 요즘은 인간들의 이기심 때문에 머물 곳이 마땅치가 않을 때가 많을 것 같네.

보통은 7월에 떨어지던 살구가 벌써부터 조금씩 예쁜 모습으로 익어가면서 몇 개씩 아래로 떨어지니 나는 오며 가며 줍기에 여념이 없네. 하나 먹어보니 맛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자두와는 또 다른 맛의 살구! 나는 이제 살구나무의 일생을 우리 수녀원에서 가장 자주 목격하는 살구 예찬론자가 되어가고 있다.

아침 식사 후에 글방으로 가는 길. 살구나무 아래 살구가 어찌나 많이 떨어졌는지 기쁘게 줍느라고 정신없었네. 오늘은 바람 없고 비도 안 오는데 어찌 그리 많은 살구가 떨어진 것일까. 톡! 하고 떨어지는 그 모습이 나에겐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외침으로 들린다. 싹이 나고, 꽃이 피고,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달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단무지와 몇 가지 재료가 있어 내가 꼬마김밥을 만들어 돌리니 생각보다 간도 맞고 맛이 있다고 하여 기회 있을 적마다 만들어서 주변에(김이 있으니까) 간식을 전하고 싶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수녀님들은 웃으며 묻는다.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글쎄요,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쓰다가 야금야금 실습해 보니 은근히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되네요." 나도 웃으며 대답한다. 기쁘게!

요즘은 손 편지로, e-mail로 알뜰하고 간절한 독자들의 편지도 꽤 많이 오는 편이다. 일일이 다 보관해 두고 싶을 정도로 애틋하고도 진실한 편지들! 그들은 내가 무어라고 그리도 감동하며 정성을 바치는지. 황공하기 그지없네.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온 사방에 편지만 남을 것 같네.

너무 더워서 꼼짝하기 싫더라도 쉼 없이 책은 읽어야지. 책을 손에서 놓으면 이내 속 빈 사람이 된다. 시련과 역경을 대처할 내적 힘을 잃어버린다. 자주자주 쉬고 싶어 하는 나의 몸에게도 경고를 해야 한다. ‘제발 좀 보채지 말고 가만있어 보세요. 조금만 더 견디어보세요’라고!

방이 너무도 더워 선풍기 2개를 켜두어도 크게 도움이 되질 않네. 어서어서 여름이 지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계절에게 미안해 그냥 견디어보는 쪽으로 고운 마음을 새롭게 가져보네.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안팎으로 자중하고, 이기심에서 빠져나와 함께 사는 공동선을 다시 배워가야 할 것 같다.

비 온 뒤의 푸른 하늘이 그립네. 작년보다 올해는 더 많이 피어난 백합들, 하얀 꽃들! 향기는 예전보다 덜하지만 너무 많이 줄지어 피어 있는 그 모습이 기도하는 것처럼 보여 발길을 멈추게 된다.

수국도 지고 백일홍도 지고 백합도 지고……. 꽃들이 질 때가 되니 나비들은 어디선가 더 많이 날아오네. 하양·노랑나비 아닌 호랑나비들이! 폭우에 놀라서인가 요즘 새들은 어디로 자취를 감춘 것 같네. 내가 키우는 다육이들이 천천히 자라고 때로는 꽃을 피우니 그저 신기할 뿐! 감사할 뿐! 해인글방 앞에 작은 식물원 차리길 정말 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역시 이별이 더 힘들다. 익숙한 것이 좋고 낯선 것은 두렵고……. 용기 없이 더 소심해진다. 내 마음을 지혜롭게 다스려야지!

사소한 것들이 가끔은 우울했던 나를 일으켜 세운다. 설레게 한다. 서울에서 동생이 그동안 모아둔 꽃 손수건들을 보내 엄마 생각 절로 나네. 꽃무늬 있는 것들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우리 어머니, 시인의 어머니.

작은 글방에서 여러 책들을 솎아내는 작업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즐겁게 나의 주변을 정리하는 이 기쁨은 이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누가 준 쪽지 하나도 선뜻 못 버리는 나. 그러다 보니 본인에게 돌려줄 것도 많고, 옛 잡지나 신문에 난 기사들을 다시 보면 어느 것은 소중한 추억으로 미소 짓게 만든다.

주사 맞고 쉼 없이 일을 해서인가 오늘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나는 미열도 나고 조금 아프네. 종일 쉬고 싶어도 낮 설거지 당번이라 꼭 나가긴 해야 하는 상황. "수녀님 없으니까 그 자리의 정리가 안 되어서……" 이 말을 들으니 나는 기쁘기도 하였지.

살아갈수록 오랜 연륜을 함께해 온 우리 수녀님들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

잠은 역시 중요한 보약! 어서 밀린 숙제들을 마치고 침대 곁에 잔뜩 쌓인 좋은 책들과 마주해야지.

기쁨! 하고 부르면 기쁨이 온다! 그래그래 자꾸자꾸 불러야만 온다. 부르기 싫어도 불러주어야 해. 기쁨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끝이 없는 길. 마침내는 짝사랑을 온 사랑으로 만들리라.

순간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할 땐 용감하게 해야 되는데, 늘 망설이는 것에 길들어지면 곤란한 일!

요즘은 왜 그리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나는지! 엄마가 그토록 큰 그리움일 줄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새롭게 살아오네.

무엇이든 나누길 좋아하는 나를 보고 어떤 선배님은 할 일도 많은데 그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집 안에 있는 이들까지 그리 챙기는 건 오히려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 기쁨이고 취미라고 대답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나도 조금 절제를 해야겠구나. 청하지도 않는데 계속 일방적으로 챙기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 더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사니 ‘아쉬운 것’이 없기에 더욱 그러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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