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아카데미 강연을 마쳤다. 880명.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해보기는 처음이다. 대부분 4, 50대. 나보다 더 연배가 높은 분도 계셨다. 이런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국립국어원이 ‘세꼬시’를 ‘뼈째회’로 순화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참밖에 할 말이 없었다. 국어원은 아무도 쓰지 않을 말을 잘도 만들어낸다. 이미 ‘막회’라는 말이 있는데. 또 그냥 세꼬시라고 하면 안 될 이유는 뭘까.
내 강연이나 강의가 괜찮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는 준비하지 않은 말이 나왔을 때이다. 어제 강연이나 오늘 강의가 그랬다. 그런데 어제 강연에서는 준비했던 중요한 말을 하지 못한 것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는 가죽나물장아찌가 있다. 짠맛에 가볍게 흙냄새가 나는 것이 절제된 관능을 느끼게 한다. 요즘은 구하기 어렵다. 우체국 택배로 그걸 산 적이 있는데, 후회했다. 고추장으로 범벅을 만들어놓았고 달기까지 했다.
경향신문에 실었다가 다시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실은 「인문학의 어제와 오늘」에는 오해될 여지가 많다. 옛날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잘 썼다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려는 노력이 많았는데, 지금의 논문 양산 체제에서는 그 노력조차 불가능해졌다는 말을 했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선 요리를 잘하셨지만 당신은 들지 않으셨다. 목으로 넘어갈 때의 어떤 관능을 죄스럽게 여기셨기 때문이란 걸 내가 늙어갈 때야 알았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옛날에는 자식 자랑, 마누라 자랑 같은 것을 팔불출로 쳤다. 요즘은 마누라 자리에 고양이를 넣어야 마땅할 것이다.
금성이 초저녁에 뜨면 거지별 또는 개밥바라기별이고 새벽에 뜨면 샛별이다. 좋은 시인들은 늘 거지별 노릇만 한다. 이렇게 길 열어놓으면 샛별 노릇하는 사람 따로 있다.
복거일씨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만 읽으면 편향된 지식을 얻을 위험이 있다고 했다는데, 별걱정을 다 한다 싶다. 뭐는 안 그런가.
시쓰기는 소통하기 어려운 것을 소통하려는 노력이다. 나중에라도 소통되도록 길을 여는 일.
막장 드라마에도 시는 있다. 그러나 시는 말을 생산하지만 ‘막드’는 단지 소비한다. 시에도 말을 생산하는 시와 소비하는 시가 있다. 소통 운운하는 것은 대개 말을 소비하는 시인들이다.
마누라 청소를 도와줬더니, 소파 밑 의자 밑 구석구석 먼지를 뽑아내라고 난리다. 뿌리 뽑기라는 게 얼마나 파시즘적 사고인데.
과외는 교육 제도의 문제가 아닌 게 이미 증명되었다. 제도가 어떠하건 한국 사람이 있으면 과외가 있다. 제도를 들먹이는 건 정작 중요한 문제를 가리기 위한 술책이다.
글쓰기 싫으면 번역을 하는데, 해놓은 게 제법 많아졌다. 글쓰기 싫은 적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 번역하기가 글쓰기보다 쉽지는 않지만 제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프랑스어의 ‘fee’를 뭐라고 번역해야 하나. 선녀는 너무 동양스럽다고 하고, 요정하고는 급과 성질이 다르고, 마녀는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데 이때 마녀는 무녀sorciere다. 신데렐라에게 마차를 준 것도 숲속의 미녀를 잠들게 한 것도 모두fee다.
내가 고종석의 ‘문장’을 극찬하는 것이 마땅하나 괘씸해서 안 한다. 나는 내 책을 보내주었는데 저는 안 보내줬다.
문장도 혹에 혹이 달린다. 로트레아몽의 문장은 꼭 변신 합체 로봇 같다.
김화영의 『이방인』은 씹어 먹여주는 식의 번역에서 오는 몇 가지 오류가 있지만, 좋은 번역이다. 문체가 좋고, 불어의 이런 표현은 우리말의 이런 표현으로……를 자주 가르쳐준다.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배은망덕한 것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에 "가을에 사랑하듯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젊은 육체의 욕망과 격정에서 해방되면서도 그 열기를 향기나 결실의 형식으로 간직하고 실천하는 사랑을 말하겠다. 보들레르도 요즘 같으면 겨울의 사랑을 말했을 텐데 그땐 겨울이 매우 추워서.
1990년대에 ‘W이론’이라는 것을 서울대의 어느 교수가 주창했다. 신바람 어쩌고 했는데 우리는 잘났다고 집단 최면을 걸어놓고는 정신줄을 놓고 일하라고 독려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 흥분한 머리에 IMF가 찬물을 끼얹었다.
용어 만들기도 때로는 폭력이다. 우리 정신을 자동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의 보수 패거리가 지금까지 팔아먹고 산 것은 박정희 이미지밖에 없었다. 박근혜까지 나왔을 때는 거의 떨이 수준이다. 떨이가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민 갈 필요 없다.
젊어서는 번역은 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를 때 황당하고, 늙어서는 무슨 소린지는 아는데 번역이 안 될 때 괴롭다. 번역가의 일생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는 "말을 조각처럼 한다"는 표현이 있다. 요즘 말로 엣지 있게 말한다는 말과 비슷하려나.
우리집 애들은 다래끼가 나면, 정약용의 처방에 따라, 반대편 발바닥에 天平 두 글자를 써서 그때마다 효과를 보았다. 미국에 간 애가 카톡을 보내왔다. 다래끼가 났는데 붓펜이 없다고.
머리가 굳어진 순수주의자보다 더 끔찍한 것도 드물다. 종교 문제에서도 그렇지만, 언어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어떤 시도를 해도 토론이 불가능하다.
이수열 선생은 언어순수주의자지만 매우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 내가 선생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그 맥락을 이해하고 그 논리를 존중했다. 한국어의 용법에 선생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분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부부 이야기. 남자는 전라돈데 보수고, 여자는 경상돈데 진보다. 남자가 상머리에서 뭐라고 떠든다. 여자가 말한다. 입 다물어! 계속 떠들고, 입 다물어! 그래도 떠들고, 입 다물어! 마침내 여자가 상을 엎는다. 그렇게 20년을 같이 산다.
남을 할퀴고 뒤통수치는 식으로 농담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재치라고 생각하겠지만, 재치 부족이고 병이다. 내 선배 중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망했다. 인간관계가 악화되기 전에 그 나쁜 재치가 상상력을 가로막았다.
유치원 첫날, 선생이 말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은 오른손을 드세요. 한 아이가 물었다. 그럼 안 마려워져요? 순진성이 재능을 만든다.
세상에 더 논리적이거나 덜 논리적인 언어는 없다. 프랑스 문법학자들은 불어에서 비논리적인 표현이 통용될 때,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불어는 논리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비논리적인 표현이 통용되면 그 말을 못 쓰게 한다. 참 쉽다.
문 닫고 나가요, 같은 말이 있다. 어떻게 문을 닫고 나가겠는가. 그런데 이 말은 당신이 나간 다음에 문이 닫힌 상태가 되게 하라는 말이다.
삶은 유전자와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고 누가 나에게 트윗으로 물었다. 그걸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도 중요할 것이다. 아니 그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MB는 아니지만 내가 살아봐서 안다.
사람은 불행한 시기를 잘 보내야 하는 것 같다. 불행한 시기에 늘어져 있으면 기회가 와도 잡기 어렵고, 기회가 기회인지도 모르게 되더라.
새로운 농담을 가지고 오는 사람, 천사가 따로 없다.
내 나이 또래 인간들은, 억압은 박정희한데서 받고, 분풀이는 젊은 애들한테 힌디. 그리고 박근혜를 찍는다. 생각해보면 불쌍하다.
이러다 유신 시대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어느 젊은 문인이 말했다. 애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한번 일어선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기지 않는다. 무릎이 자주 다치긴 하지만.
일어설 만큼 성장했다는 것은 무릎이 깨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는 말도 된다.
"배터리가 닳는다"는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항의를 들었다. 앞으로 나는 이런 항의를 아주 많이 듣게 될 것이다. 모국어와 트윗이 동시에 지닌 미덕은 문법을 넘나들면서 쓸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 미덕을 즐길 것이기에.
옛날 어느 국어학자가 ‘뛰다’는 상하 운동을 뜻하기에 ‘뛰어가다’라고 말하면 틀리고 ‘달려가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람도 무슨 자리에 들어가면 법을 만든다. 내가 왜 그런 바보들의 법을 지켜야 할까
어제는 최인석의 소설 『강철 무지개』의 출판 기념회에서 자정을 넘기고 무사히 귀가했다. 최인석은 진솔하고 정직해서, 그의 소설은 늘 한국 사회의 현재다. 최인석이 여기까지 왔네 하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빈정 상한다"는 말이 있다. 사전에 없다. 대인 관계에서 감정에 은근히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다. 카톡의 친구 찾기에서 누군지 모를 이름이 뜨면 상대가 빈정 상할까봐 함부로 지우기 어렵다. 상대가 알 리 없겠지만. 그런 이름이 30개다.
잘못된 말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법 공부는 꼰대질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한국어 제1급 사용자 운운하는 바람에 빈정 상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때로는 빈정거리며, 때로는 정색하며 공격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시비가 생산적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길고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문장 하나를 번역해놓고 보니 아무 말도 아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이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라는 말로 시작한다. 로트레아몽은 22세에 이 글을 썼다. 내가 애한테 이런 조롱을 받고 여생을 보내야 하는가.
MB는 진심을 연출하려고 노력했으나 목소리도 얼굴도 받쳐주지 못했다. 지금은 화난 듯 멍한 듯하다가 갑자기 웃는 얼굴을 본다.
주인공들은 운이 좋았다. 공주가 아직 어렸으니까.
외래어 표기에서 ‘현지음에 충실하게’는 처음 표기를 결정할 때에 그쳐야 한다고 본다. ‘미친년 널뛰기’나 ‘전 국민 희극배우화’를 면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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