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예방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고 한다.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발생을 차단하는 것을 1차 예방이라고 하고,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을 2차 예방이라고 한다. 생긴 후에 빨리 발견하는 것보다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터이다. 따라서 나는 갑상선암과 갑상선기능저하증의 예방을 위해서라도 노후된 핵발전소는 점진적으로 폐쇄해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지극히 예방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처음엔 트랜스젠더들이 한 명 한 명 구별되지 않고 그저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여성’, ‘트랜스남성’으로만 보였다고 한다. 몇 명 만나지 않았을 때는 ‘트랜스여성은 이렇군, 트랜스남성은 저렇군’ 하고 생각했다고. 이를테면 ‘어머, 트랜스여성들은 일반 여자들보다 더 예쁘게 꾸미고 다니네’, ‘트랜스남성들은 완전 아저씨잖아’같이 말이다.
특정 조건을 가진 사람을 단 몇 사람 만나보았을 땐 선입관이 생기기 쉽지만, 오히려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보면 선입관이 사라지게 되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다운증후군은 선천적으로 지니는 공통점이 있다. 심장 기형이 많다. 관절이 약해서 무릎, 발목, 손목에 퇴행성관절염이 잘 생기고, 얼굴 피부와 두피에 지루성 피부염이 잘 생긴다. 이 지루성 피부염이 외이도에도 생겨, 귀지의 양이 많고 끈적한 편인 데다 외이도가 곧지 않고 꺾여 있어 귀지가 잘 빠져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분비적으로는 갑상선이 약해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잘 생기는 편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신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대체로 온화한 편이고 사회성이 좋아 종종 ‘천사’라고 불린다. 신이 이 땅에 천사를 내려보내실 수 없어, 다운증후군 아기들을 보내주셨다는 것.
다운증후군인 명운 씨는 욕을 잘 한다. 자기 이름은 읽고 쓸 줄 모르면서 육두문자는 아주 구수하게 날리는데, 발음이 불명확한 탓에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잘 안 들린다. 대체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하자고 할 때, 이를테면 "명운 씨, 치아를 닦읍시다"라고 할 때, 명운 씨의 ‘안 해, 싫어, 이쒸’에 이어지는 길고 긴 욕을 들을 수 있다.
누가 다운증후군이 천사라 했던가. 누가 지적장애인들은 똑같은 단순노동을 반복해도 지루함을 덜 느낀다고 했던가. 의천 씨는 직장에 가기 귀찮고 지루해 꾀병이 생긴 거였다. 일상에 자극이 될 만한 것이 생길 때까지 복통은 낫지 않고 있었다.
의천 씨의 꾀병이나 명운 씨의 자해 아닌 자해 소동을 비롯하여 한 명 한 명의 개성을 알게 되자, ‘다운증후군은 천사’라는 말보다 매력적이고 생생한 캐릭터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훨씬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촉탁의 생활이 내게 열렸다. 장애인 시설의 촉탁의 경험 덕분에 너무 다정한 치료 방법들을 배웠다.
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는 나라 미국에선, 민간의료보험이 없는 학생이 혹시라도 다칠까 봐 공립 고등학교 체육 수업 시간을 줄인다고 한다. 민간의료보험이 없는데 골절이라도 생기면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공립 고등학교 학생들의 가정경제 전체가 휘청거리게 되니까, 미식축구니 농구니 하다가 격렬한 부딪힘 끝에 다칠까 봐 아예 학교에서 운동을 못 하게 하고 체육관을 폐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덜 다치면 이게 더 건강한 건가? 사실 이것이야말로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더 심한 학대가 아닌가?
만약 진짜 시설 내에서 학대가 있었다면, 우선은 다치는 위치가 다르다. 법의학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처럼, 자해와 타해의 흔적이 다르다. 자해 시에는 주저흔이 생기고 타해 시에는 방어흔이 생긴다.
큰 소리가 날 때나 생활교사들이 가까이 다가갈 때 깜짝 놀라거나 몸을 움츠리는 행동이 여러 장애인들에게 패턴화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학대를 의심해야 한다.
학대가 있는 시설이라면 이렇게까지 실습 학생에게 개방적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외부인인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외부인인 의대 실습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기껍지 않을 수 있다. 이곳은 시설에 있는 장애인의 가족, 지역 자원활동가, 학교 선생님 들이 적절한 허가를 받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이다. 그렇다면 학대나 방임이 이뤄지고 있는 장소일 가능성은 극히 낮다.
요즘 장애인 인권운동의 화두는 탈시설이다. 장애인들끼리만 고립되어 생활하는 장애인 시설에 평생 사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로 나와 다른 주민들과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시설을 떠나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는 길도 필요하고 발달장애인이 등록할 수 있는 운동센터도 필요하다. 장애인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러 갈 수 있는 카페도 필요하고 식당도 도서관도 필요하다. 집들과 골목도 장애인이 살 수 있도록 수리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려면 동네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폭력과 학대를 예방하는 것도, 탈시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모두 지역사회 시민의 힘인 것이다.
두부 외상의 흔적은 없었지만, 의식 상태를 평가할 수 없으면 응급실에서는 머리 CT를 찍어야 한다. 문제는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종종 의대생 후배들이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멘토링을 부탁해올 때가 있다. 나는 사실 의대에서 요구받는 공부를 따라가는 것만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기에 뭘 더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무엇을 배워도 다 써먹을 데가 있다는 얘기는 들려주곤 한다.
의사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사회 상류층에 속한다. 그런데 비슷하게 상류층에 속하는 직업군 중에서는, 가난하고 힘없고 아픈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하는 직업이다. 고위 공무원이나 대학 교수, 회계사, 변리사, 변호사에 비해 사회적 약자들을 평균적으로 더 많이 만나게 된다. 만나는 절대 숫자 자체가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일하면서 움직이는 범위는 아마도 의사가 가장 좁을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학과 공부에 치여 다른 과 친구들을 거의 사귀지 못하고, 직업을 가진 후에도 거의 좁은 진료실과 병원 안만 종종거리고 돌아다니게 되어, 인간관계와 경험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좋지 않을까.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 국가, 인종, 성별, 성별 정체성, 종교, 장애 등의 면에서 나와는 다른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여러 친구들을 사귀라고 조언하고 싶다. 의사는 정말 다양한 사람의 삶과 마주치게 되고, 그래서 무엇을 배우더라도 다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인지 재활을 위해 말을 걸어드리고 음악과 라디오를 들려드리는 일, 무엇보다 고립되어 있는 보호자를 위로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지지하는 일도 주민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국의 경우 왕진 시 온라인으로 전자 차트를 작성하고, 역시 온라인으로 처방전을 발행하면 약국으로 바로 전송되어, 약사님이 약을 조제하여 직접 배달하고 복약지도를 하는 방식으로 방문 약료가 이뤄지는 곳도 있다.
왕진이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들을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이다. 어쩔 수 없이 왕진 후 다시 살림의원으로 돌아가 처방전을 발행하면, 인쇄된 처방전을 누군가 들고 약국으로 가서 약을 조제하여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환자 곁을 떠날 수 없는 보호자가 이 일을 어찌 해낼까.
"제가 어차피 집이 이 근처예요. 주치의 선생님과 같이 살림의원으로 돌아가서, 처방전 내주시면 그거 받아서 약국 들러 조제해서 배달해드리면 어떨까요? 보호자분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운동하는 셈치고 동네 한 바퀴 더 돌지요."
순간 보호자분은 크게 안심되고 위안이 되어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도 든든했다. 이런 왕진이라니…. 여러 규제로 기술 도입이 늦어져도, 그 간극을 메워주는 이런 멋진 동네 친구들이 있다면…!
며칠 후 그 보호자분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그날 풀꽃 님이 약을 배달해주시면서 보호자를 위한 샌드위치도 같이 배달해주셨다고,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달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왕진 시에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를 함께 지원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왕진을 나가면 환자분 상태에 신경을 빼앗겨 보호자 지원은 뒤로 밀리고 만다. 그런데 나와 같이 그 집을 방문한 졔졔 샘, 봉봉 님, 풀꽃 님은 보호자에게 훨씬 더 신경을 쓰고 계셨던 거다.
나는 동네 주치의로서 우리 동네 주민들이 건강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도, 또 이럴 때 한없이 배운다.
예전 야학에서 선생님을 강학으로, 학생을 학강으로 불렀다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이기에 강학, 배우면서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학강이라고. 우리는 동네 안에서 이렇게 서로에게 배워간다.
수영장에서든 동네 술집에서든, 여튼 진료실 밖에서 환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진료실 안에서만, 환자와 의사로만 만나서는 다양한 관계를 상상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진짜 에너지를 알 수 없다. 진료실을 찾을 때 사람은 가장 아프고 힘든 상태이자 위로가 필요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료실을 벗어나 동네에서 살아가는 그 사람은 주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역할이 있고 당당하고 밝고 긍정적이다.
세상에! 나에게 항상 찌푸린 표정으로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소연하던 이가 거리에서는 그렇게 밝고 청명하게 웃고 다닐 줄은 몰랐네. 처음엔 배신감도 느꼈다. 왜 나한테만 와서 징징대는 거야! 하지만 그게 내 일이지. 언제고 찾아와서 힘들다고 얘기해도 되는 사람, 아프다고 위로를 구해도 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주치의라 부르니까.
내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의대 본과 1학년 때였다. 의료협동조합은 의사가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주민들과 의료인들이 돈과 힘을 합쳐 함께 만드는 병원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단박에 꽂히고 말았다.
시스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환자에게 검사와 치료 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의사·병원이 돈을 버는 행위별수가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환자의 바람은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는 환자가 아프면 아플수록,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더 많은 행위를 하게 되고 또 이것이 수익으로 직결되니, 환자와 의사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소신 있게 진료하는 의사도 많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더 많은 검사, 더 비싼 치료가 의사의 수익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사를 전적으로 믿기가 어렵다. 의사가 돈을 벌려고 나에게 저 검사를 하자고 하는 건지, 아니면 꼭 필요하고 내가 걱정되어서 저 검사를 하자고 하는 건지 매번 의심하게 된다. 환자들이 큰 비용을 의료비로 지출하면서도, 이 치료와 검사가 꼭 필요한 것인지, 나의 건강에 최선인지, 비용 대비 가장 합리적 결정인지 등을 확신하기 어려우니, 진료를 받을수록 신뢰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긴가민가한 경험이 쌓인다. 이렇게 의사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면 의료 소송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의료 소송이 증가할수록 환자에 대한 의사의 불신도 늘어나, 소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더 많은 검사를 하는 방어적인 진료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료비의 상승, 특정 전공과목 수련에 대한 젊은 의사들의 기피(주로 의료 분쟁이 많이 생기는 외과 계열이나 산부인과를 기피한다), 결국에는 더 많은 의료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것 없는 악순환의 고리다.
신뢰받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가 사실은 소박하지 않은 어마어마한 목표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나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힘들다는 것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이니까.
비싼 의대 학비를 알아서 마련해서 다니고, 저임금의 수련의·전공의 기간을 알아서 잘 보내고, 의원을 개원하여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것이 지금의 제도이다. 의원이 망하면? 의사 각자의 책임이다. 의원이 망하면 그 의원에 다니던 환자의 기록과 진료의 연속성이 사라지게 되는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 의원이 폐업하면 진료기록이 보건소에 보존된다고는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그 의료기관이 하던 역할을 진정 책임지는 곳은 없다.
환자의 불건강이 의사·병원의 수익으로 연결되는 시스템, 공적 역할이 기대되는 1차 의료에 공적 자원은 전혀 투입되지 않는 시스템에서 어떻게 신뢰받는 동네 주치의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이 고민의 해답을 의료협동조합에서 찾고자 했다.
만약 환자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의사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구조라면(그 보상이 금전적인 보상이든 심리적인 보상이든 관계적인 보상이든 간에), 시민들이 건강할수록 의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구조라면 상황은 다르지 않을까? 그런 구조라면, 환자는 의사를 불신하기보다는 건강의 안내자로, 동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의사가 의원을 개원하기 위해 목돈을 은행에서 빌려서 허덕이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개원에 필요한 자금을 공동으로 모아서 마련하는 구조라면 어떨까? 주민들이 의원의 경영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책임지는 구조라면?
나는 의료협동조합에 꽂혔고, 페미니즘(여성주의)에 꽂혔다. 여성주의적으로 운영되는 병원을 의료협동조합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라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병원 만들 돈을 다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 의료기관을 원하는 사람들이 직접 돈을 모으고 운영에 참여하는 것. 그래야 내가 일하더라도, 다른 어떤 의료인과 직원들이 일하더라도 여성주의 원칙에 맞게 운영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성주의 의료기관은 여성들만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성별, 성별 정체성, 직업, 계급, 인종, 나이, 학력 등에 관계없이 차별 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이다. 진료실 안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지식 차이로 인한 권력 차이가 생기지 않게, 환자가 자신의 몸에 대한 충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의사가 적절한 조언자이자 동료로 관계를 맺는 곳이다. 여성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 무시당하지 않는 곳이다. 직원들도 누구나 존중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다.
준비 기간부터 하면 10년 이상을 해온 지금, 그래서 ‘이상적인 의료기관’이 되었느냐 하면, 그건 직접 와서 경험해보시라.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도 좋다. 아니, 완성형이 아니라서 좋다. 새로운 조합원, 직원의 들고 남과 함께 매일 달라질 수 있는 조직이 의료협동조합이니까. 의료협동조합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 좋겠다. 그래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이 뿌리 깊은 불신을 함께 해결해나갈 실마리가 생기지 않을까.
문득 깨달았다. 아하,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이럴 수 있겠구나. 지식의 차이는 가끔 불신을 만든다. 어떤 환자분이 우리 진료실을 찾아와서 그러셨다. 무릎이 아파 정형외과에 갔더니 이런 치료를 받으라 하고, 재활의학과에 갔더니 저런 치료를 받으라 하고, 통증의학과에 갔더니 또 다른 치료를 받으라 한다고. 의사들 말이 다 다르니 누구 말도 믿을 수 없다고 말이다. 또 다른 환자분은 토로하시길, 어떤 의사는 운동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하고 또 다른 의사는 재활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니,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 거냐고 하셨다. 이 렇듯 병원마다 다른 치료를 권유한다며 투덜거리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가 들어봤을 때 그것은 용어만 다를 뿐 사실은 같은 내용의 치료법이었던 적도 있다.
의학은 원래 정답이 딱 하나밖에 없는 그런 학문이 아니다. 특히 통증이나 만성 질환과 같은 문제들에는 여러 치료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의사들마다 가장 자신 있고 환자에게 잘 맞을 것 같은 치료 방법을 권하게 된다. 고혈압약이나 당뇨약만 해도 얼마나 다양한가. 중요한 건, 치료나 약을 의학적 근거 있게, 환자에 맞게 추천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미용사에게 품었던 의심과 오해도 풀렸다.
당장 의료 시스템이 바뀌지 못하더라도, 의료 전문가와 일반인 환자 사이에 믿을 수 있는 통역자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나는 동네 주치의로서 때로는 통역자, 때로는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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