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인은 예순이나 예순다섯 살쯤으로 보였다. 나는 어느 현대식 건물 맨 꼭대기 층 헬스클럽의 실내 수영장 맞은편에 놓인 길쭉한
의자에서 그녀를 바라고보 있었다. (중략) 하지만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부인을 관찰했다. (중략)
나는 매혹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중략) 잠시 후 다시 그녀를 관찰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강습이 끝나 있었다. 그녀는
수영복 차림으로 풀 가장자리를 따라 수영 강사를 지나쳐 사오 미터쯤 갔을 때 문득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나의 심장이 졸아들었다. 그 미소, 그 손짓, 바로 스무 살 아가씨 같지 않은가! 그녀의 손은 눈부시도록 가볍게
날아올랐다. 마치 그녀는 장난하듯. 울긋불긋한 풍선 하나를 연인에게 날려 보낸 것 같았다. 비록 얼굴과 육신은 이미 매력을
살실했다지만, 그 미소와 손짓에는 매력이 가득했다. 그것은 매력 잃은 육신 속에 가라앉아 있던 한 몸짓의 매력이었다. 그
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는 그 순간만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중략)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몸짓 덕택에,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그녀 매력의 정수가, 그 촌각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감동했다.
밀란 쿤테라, 불멸, 김병욱 옮김, 민음사, p. 9~11
어제는 N군의 학교 공개수업이 있었는데 오늘은 H양의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다.
어떤 옷을 입고 갈까를 잠깐 고민하다가 밀란 쿤데라의 책 『불멸』 의 첫 부분이 떠올랐다.
그의 말처럼 나도 대부분 시간을 나이 없이 살다가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 내 나이를 물어보지도 않지만, 가끔 나이를 밝혀야 할 때는 내 나이를 까맣게 잊고 있어 당황할 때가 있다.
하얀색 청미니스커트를 입고 가려고 집어 들었다가 화들 짝까지는 아니라도 나이를 떠올리며 내려놓았다.
그 치마를 입고 가면 분명 딸아이에게 망신을 주는 꼴이 될 테니까.
물론 평상시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엄마를 잘 아는 딸아이는 그렇게 놀라진 않겠지만
딸아이도 이런 날 만큼은 그런 옷을 입고 오지 않으셔야지요, 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갑자기 나이가 의식되어 하얀 청미니를 내려놓고 베이지색 바지를 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