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멋진 할머니 시인이라고 <침대와 책>에서 정헤윤씨가 극찬한
폴란드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을
읽으면서 사각형인 내 머리가 동그랗게 변하는 걸 느낀다.
어떤 불완전함도 조금씩 꺼내놓으면 견디기가 쉬워질것도 같고...

어제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을 보면서 애쉬튼 커쳐의 어떤 대사 때문에
이 영화는 남편과 절대 같이 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참 순진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끝과 시작>에 있는 -작은 별 아래서-라는 시가 기억에 남아
긴데도 불구하고 옮겨 적어본다.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시간이여, 매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다섯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는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덤덤하게 하루를 보냈다.
잘난척도 했다.
물론 바쁜척도 했고,
약간의 거짓말도 했다.
내가 우회전을 해야하는데 맞은편에서 좌회전을 하는 차에게 빵빵거렸더니
좌회전을 한 뒤 내 앞을 가로막는다.
화가났지만 그 전에 두려웠다.
내가 잘 못한 것도 없데도 불구하고,,
아니,,,오히려 잘못은 그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내가 우선이라는 걸 모르고 화가 났을까?
아니면 내가 우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을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했다는 얘기가 생각이 나서 감정을 진정 시킬 수 있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대강 이런 내용있던듯,,,
"자네가 도둑을 만났다고 해, 그런데 그 도둑이 자네를 칼로 찔렀어,
그러면 자네는 그 칼을 빼서 깨끗이 닦은 뒤 돌려주면서
"감사합니다, 고생 하셨습니다."라고 해야해,,거기까지 가야 하는거야.(물론 가진것도 다 주라고 했었던 듯)",,,

나도 쉼보르스카의 흉내를 잠깐 내본다,

촛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여, 미안하구나, 용서해라. 그대들이 피땀흘려 쟁취할 자유를
블로그에 촛불 하나 달랑 켜논 걸로, 집앞에 현수막 하나 걸어둔 걸로 묻어가려고 하는 비겁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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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8-06-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을 읽으니..시골에서 바쁘게 일하는 옆지기 누나를 두고 괌으로 떠나는 제가,갑자기.좀 그런거 있죠....음..
저도 님 같은 일 당한 적 있어요..
아침 출근 길에..신호가 바꿔도 차가 꿈쩍도 않구 있기에...빵빵 눌렀거던요..
그랬더니..창문을 열더니...손가락으로 욕을 하구..안가요........그러더니..노랑불로 바뀌니깐,,저만 휙 가버리드라구요..기가막혀서...
암튼 장일순선생님같은 마음은 저는 죽었다 깨도 못먹을 듯...ㅎㅎㅎ
푸하님 서재도 글쿠..님 서재도 글쿠,,참 알차요~~~때로 이렇게 들어올 수 있게 인연 터주셔서..감사~~~

라로 2008-06-06 01:41   좋아요 0 | URL
정말 기막히는 사람들이 많아요,ㅠㅠ
전 그래서 요즘 운전하면서 회의를 많이 느낀다니까요!!!ㅠㅠ~
장일순선생님같은 분이 정치에 참여하셨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알차다'라고 하신 말씀 그 어떤 칭찬보다 좋은걸요!!!^^

보석 2008-06-0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에 찔렸을 때는 섯불리 뽑으면 과다출혈이 일어날 수 있으니 건드리지 마세요..ㅎㅎ;(어쩐지 섬뜩하다)
나비님 덕분에 오늘 좋은 시 하나 읽게 되네요.

라로 2008-06-06 01:43   좋아요 0 | URL
하하하
맞아요~. 잘못 거드리면,,,ㅠㅠ
그나저나 저런 경지까지 오르려면 어찌해야 하는건데요????ㅠ
죽었다 깨나도 그 경지엔 못이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