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럽던 이의 눈 앞으로
이걸 썼던 손길에게로―
언젠가 뜨거운 갈망으로
기다리고 받던 것
그것들이 솟구쳤던 가슴에로
이 종이들은 돌아가거라.
늘 사랑에 가득차 거기 있던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의 증인들.

번역을 하는 동안, 또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열려 오는 듯했습니다.

그런 온갖 헤메임들 덕분에, 그 귀한 글의 번역을 조금은 더 자신을 가지고 마무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한 공을 들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물을 떠나서 무엇보다 저 자신이 배운 게 너무 많았지요. 극동과 유럽 사이, 특히 조금은 아는 듯도 한 인도와 유럽 사이, 완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던 거대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문학 등등이 갑자기 동영상처럼 살아나 움직였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번역만 공들여 한 게 아니고 그에 관한 연구서를 그사이 한국에서 한 권, 독일에서 한 권, 그렇게 두 권이나 펴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 한 권의 책이 있었으니, 그 책이 바로 『서·동 시집』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그 많은 사연이 얽힌 귀한 책, 『서·동 시집』 초판본은 지금 제가 지키는 여백서원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 그 고마운 책을 위해 나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동 시집』을 옮겼고, 수없이 다듬었고, 연구서들을 펴냈고, 지금 여러분들을 위해 이 글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꿈을 가지라는 그런 추상적인 말 대신, 뜻을 가지면 사람이 어떤 높이와 넓이에 이를 수 있는지, 또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물 예 하나를 젊은이들을 위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해왔습니다.

제아무리 아쉬울 때도 어디다 손 벌려보지 못하면서 평생 살아온 제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순간이 여럿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귀한 뜻이 그렇게 저절로 모이는데, 제가 물러설 수는 없어서, 요즘은 아주 작은 숲속 마을을 만드는 일을 차츰차츰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큰 생애 하나가 보는 이에게 선명해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오는 시설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는 아주 작은 숲속 ‘책 오두막’ 몇 채가 그 내용입니다.

가끔씩 통장을 볼 때마다 놀라는데, 얼마 전부터는 보낸 이가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 입금내역이 통장에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입금자 칸에는 이름 대신 ‘건축의 경험’ ‘타인의 해석’ ‘백 년의 고독’ 같은 단어들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수소문해봤으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누가 알 리 없었습니다. 궁금해하던 중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천사의 자발적인 실토가 있었습니다.
"통장에 찍힌 것은 제가 읽은 책의 제목들입니다. 그다지 활발히 활동하지도 못하고, 여백서원에 자주 가서 뵙지도 못하지만, 많은 분들의 기여로 더 멋진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그곳에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도 당연히 큰 액수를 쾌척하고 싶지만 그럴 형편은 아닌 만큼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읽은 책의 가격만큼이라도 꾸준히 송금을 해보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직장생활하고, 결혼하고 "어떻게 보면 안정적이고, 어떻게 보면 따분할, 크게 변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는 게 공허하다거나 재미가 없지는 않다"면서, 20년 전에 제게 들은 수업에서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 같은 가치를 찾아내는 방법을 터득한" 덕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순간들의 특별한 의미에 감동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여백서원과 같은 공간이 번창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에서,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읽은 책 정가만큼이라도 송금하고, 독후감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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