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자신에 대한 통찰이 담긴데다가 쌓인 경험으로 깊이가 더해져서 촌철살인의 묘가 있는 시구들이지요. 때로는 노년답게 구애받음이 없는 직설, 무엇보다 무르익은 삶의 지혜가 시적 이미지에 응결되어 있어 여느 잠언들과는 다른, 시의 아름다움이 더해져 있습니다.

그런 글귀들을 살피면서 그사이 읽어오며 갈무리한 "괴테"의 모습을 조금 펼쳐보고자 합니다. 제가 읽은 괴테이니, 괴테의 시구에 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괴테라는 인물, 그의 삶과 문학, 철학이 배어 있을 것이며 또한 그를 읽는 저에게 비쳐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일 것이고 또한 그를 읽고 있는 저 자신의 모습도 간간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니, 다시 읽어보니 괴테를 빙자하여 때로 저 자신이 너무 많이 드러나버린 듯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 갖가지 호기심을 그렇게 자기 발로 모험을 하며 찾아와서 해결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요.
사실 그 나이에 해봐야 할 일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해보고, 가보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발로 꼭꼭 디디며 깨쳐나간 세계니 얼마나 탄탄할 것이며 얼마나 확실한 자신의 영토일까요.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그렇게 스스로 키우고 있는 소년도 예쁘거니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녀를 믿어주는 부모가 있어 참 든든한 마음이었습니다.

아마도 혼자서는 처음 나섰을 먼 길을 오며 이 작은 소년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어느 순간에는 방향을 잃어 혼란스럽고, 혹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올 곳이 있었고, 그곳에 닿기 위해서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방황할 일도 없겠지만, 새로운 경험으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 또한 없겠지요. 예전에야 그 나이에 공부를 하러 아주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동화 같기만 한 이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여정처럼 느껴져서, 가만히 곱씹어 생각하며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어떤 법칙을 찾아내어 정리로 귀납시키는 논리적 사유나 과학의 공식의 문장을 복숭아의 씨에 비유한다면, 문학작품이란 달고 신 온갖 맛이 배어 있는 과육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어내지 않는다면, 그 다채로운 맛을 절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한 편의 시詩인 「헌사」는, 벌써 중년이 된 괴테가 친구 쉴러의 간곡한 당부 덕에 생애 세번째로 집중해서 『파우스트』 집필에 매달렸던 시기에 젊은 날 『파우스트』를 쓰던 때를 돌아보며 느껴지는 소회를 담은 인트로입니다.

「천상의 서곡」에서 천사들은 우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쓰인 것이 까마득한 오래전인데,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시각입니다!), 튀어나온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온갖 "거름더미에 코를 처박고" 천상의 빛인 이성理性을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데나 쓰는 인간의 가엾은 꼴을 한없이 비아냥거립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방황해도 괜찮아. 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언젠가 어디인가에 닿아. 그런 쉬운 말보다, 말이 될 듯 말 듯한 이 위로가 주는 여운이 큽니다. 참으로 정교한 비문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이 부연의 문장에서는 비문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함이 있을 수 있고,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 선의 알맹이가 있기에 그에게는 바른 길의 의식도 선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해하라, 용서하자가 아닙니다. 이 비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참으로 큰 포용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잊히지 않는 커다란 껴안음인지요.

괴테가 만들어낸 그 하나의 장치는 바로 ‘24년의 한시적 계약’을, 더는 바랄 바가 없어서 어떤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까지의 ‘내기’로 바꾼 것입니다.

‘옳은 말만 하는’ 이성의 인물 메피스토펠레스의 매끄럽고 멋진 대사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긴 이름이 히브리어 ‘거짓말쟁이’와 ‘파괴자’라는 두 단어의 합성이라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악마가 파우스트에게 맨 먼저 제공하는 것이 젊음입니다.

다시 사는 인생도 당연히, 또 여전히 방황으로 점철됩니다.

사랑의 그 넓은 스펙트럼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건 인류가 지금껏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것의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집에는, 그 어떤 악귀들조차 범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집에도 열쇠구멍을 통하여 스며들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근심입니다.

작품의 끝, 어딘가 깊은 산 계곡을 파우스트의 영혼이 올라가고 있는 듯한 장면(「심산유곡」)에서 파우스트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듯 보이며 장려한 합창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립니다. 그리고 그 알 듯 모를 듯한 「신비의 합창」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사람은 늘 무엇인가에 추동되어 살아갑니다. 꿈이든, 이상이든, 사랑이든, 야심이든, 그 어떤 욕망이든 말입니다. 추동력은 좋은 동기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과해지면 스스로 시달리고 실족도 하고, 민폐도 끼치고, 악행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알고 싶은 마음. 아마도 주는 사랑 다음으로 그런 것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온갖 것을 만져보고, 먹어보고, 해보며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심지어 꽃도 꺾어보고 쥐어뜯어보고, 곤충도 해체해볼 때조차도 스스로 세상을 알아가고,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도 행복합니다.

그 어떤 요인이든 우리 누구나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그 아름다운 호기심이며 지식욕을 잃을 때, 이즈음처럼 너무도 일찍이 부과되는 것들로 하여 자발성을 상실할 때 그 무덤덤, 무감각, 무신경의 인생은 얼마나 황폐하며, 얼마나 가여운가요. 얼마나 불행한가요. 그 모든 것을 세상 탓이라고 밀쳐놓고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로 옮겨놓고 그 자리를 요지부동으로 고수하면서 어딘가를 향해 목청 높이는 삶은 또 얼마나 옹색하고 불행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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