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망원경의 그 엄지손톱만 한 작은 렌즈로 몇억 광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에 놀라고, 지구가 그리고 우리 지구인이 우주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에 놀라며 겸손해지고,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으로서도 신의 존재와 창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대체 누가 이걸 다 여기 우주에다 올려놨을까 감탄합니다.

그가 그렇게 별을 보러 다니면서 하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었어요. 자신을 남에게 맞추는 일, 그는 그것만은 결코 하지 않았어요. 그가 요새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원하면 일단 시작하라!’ 그게 그의 신조였어요. 그가 얼마나 막무가내였느냐 하면, 대학 때 그는 회기동에 살았어요. 밤에 방에 자려고 누워있다가 무심코 시계를 한 번 봐요. 그때 머릿속에 청량리역 막차 시간이 임박했단 생각이 스치고, 그러고 나면 그는 뛰어나가고 말아요. 막차가 떠나기 전에 별을 보러 서울을 떠나 어디론가 가기

겨울 산의 느낌은 묘했습니다. 날씨가 맑은 날은 견딜 만했지만 흐린 날에는 산은 온통 무채색이 돼버립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라고 묻게 되면, 일단 그 생각이 들면 끝입니다.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그 질문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이람?’ 이 질문은 아직 나 자신이 그 짓을 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단 뜻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산골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소나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눈이 쌓이는 날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바람이 따뜻한 곳에서 추운 곳으로 부는지 아니면 반대인지 그 방향을 보고 그날 내리는 눈의 속성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천문인마을의 주인이 두 마리 까마귀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고라니의 발자국과 말똥가리의 날갯소리도 알게 되었고, 추운 겨울날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떨어져있는 집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우편배달부의 수고도 알게 되었어요. 인가에서는 멀리 떨어져있지만 자연과는 붙어있는 옛길의 아름다움도 알게 되었고, 겨울 강의 얼음이 갈라지고 물이 솟아오를 때 얼마나 요란한 소리를 내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천문인마을 옆 주천강이 얼어붙은 것을 봤을 때, 그러니까 물줄기며 물살 그대로 얼어붙은 겨울 강을 봤을 때, 그는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아! 내가 여태 왜 이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그 뒤로 그는 겨울 강 트레킹을 가곤 합니다. 얇은 얼음을 밟으면 물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행히 그는 마른 나무를 골라서 불을 붙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얇아도 절대 깨지지 않는데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두꺼워도 금세 깨진다.’ "여기서 얼음이란 말은 사랑으로도 바꿀 수 있고 신뢰로도 우정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어요.

"저기 보이는 저 능선이 어디로 연결되는가, 저 밑에 어떤 마을을 품고 있을까 헤아려보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신이 오를 산봉우리만 보고 생각하면서 등산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3차원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깊이였습니다. 눈으로 볼 때 우리는 3차원의 깊이 속에 별과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작은 빛이 실은 몇천억 개의 수많은 별들이 모여있는 것이란 것도 잊지 말고 살아달라고 말합니다.

‘이 우주엔 도저히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다 볼 수 없지만, 보려고 노력하고 애쓰며 사는 것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그는 망원경의 그 엄지손톱만 한 작은 렌즈로 몇억 광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에 놀라고, 지구가 그리고 우리 지구인이 우주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에 놀라며 겸손해지고,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으로서도 신의 존재와 창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대체 누가 이걸 다 여기 우주에다 올려놨을까 감탄합니다.

별빛을 보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별빛은 벌써 오래전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아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그 조상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별빛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으나 잃었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했을 때 즐거운 것, 그걸로 굳이 뭘 이루려고 하지 않는 것, 그 세계에 들어가 끝없이 헤집고 다니고 싶게 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나는 스물다섯 살부터 태어난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전까지의 삶은 삶으로 치고 싶지 않다는 거죠.

내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전혀 모르고 살았던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하겠기에 우린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별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을 하나로 보지 않고 둘의 묶음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납니다. 어둠 속에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그날 밤하늘에 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구간 안의 불빛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이렇게 두 가지 빛—내부의 불빛과 외부의 별빛—이 만나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블로흐의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립되고 황량한 땅 밑에 구리 같은 소중한 것이 어마어마하게 묻혀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들은 별 옆에 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사막에서 별은 별 뒤에 있습니다. 모든 별은 자기 뒤에 또 다른 별을, 또 다른 별을, 또 다른 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한이었습니다. 그것은 까마득한 깊이였습니다. 모든 별은 자기 앞에 별을, 또 다른 별을, 또 다른 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거나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솜씨가 좋은 사람,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가장 존경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불평등과 악덕으로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로부터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선망이 유래했는데, 그 새로운 누룩곰팡이에 의한 발효는 마침내 행복과 순수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발생시켰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 루소.

불평등한 재능으로 서로서로를 판단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만 자신이 존재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서 우린 서서히 자기 존중감을 잃게 됩니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루소는 남의 판단으로만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을 경멸했습니다.

그러자 만나고 싶은 사람, 할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지구에 있는 꿈의 주소지에서 꿈 같은 이야기들을 한도 끝도 없이 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원시적 재능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