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소죽 끓이는 가게 앞에서 피곤한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지요. 올라오는 김 때문인지 새벽 미명 때문인지 피곤 때문인지 흐릿해진 눈으로도 나는 아버지를 금세 알아봅니다.

소몰이꾼 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꾸준함이었습니다.

낮에는 돈이 오가는 걸 봅니다. 온갖 악다구니와 싸움박질과 욕설도 봅니다. 그러다 해가 지면 새벽까지 끊임없이 걷습니다. 다들 묵묵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긴 호흡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맘에도 낮에 내가 봤던 것이 뭔가 짧다는 걸 느낍니다. 낮과 밤이 빛과 어둠의 의미를 떠나 또 다른 의미로 정반대의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달밤에 새하얀 눈에 시장의 모습들이 반사되어 빙빙 돌아갈 때 그런 낮의 시간이 부질없고 누추해지고 덧없어지는 것입니다. 난 점점 한쪽은 싫어지고 한쪽은 좋아졌습니다.

난 시장의 시간과 오솔길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인간의 규칙과 자연의 규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인간의 규칙은 다른 개체에게 큰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뭐든지 허용되는 것 같았어요.

훗날 어른이 된 뒤에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저는 어렴풋이 알았던 겁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마치 시장의 일만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마치 시장의 일만 있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지만 사실 자연의 일도 있단 걸 말입니다.

난 숲을 걸으면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종에 다 해당되는 규칙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생명체는 예외 없이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다거나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사실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그걸 거스를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가 공부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공부가 하고 싶었을 겁니다. 소 몰고 밤새 걸으면서도 단어를 외웠고 소 등 위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내 가는 길에 반딧불이가 어지럽게 날아다녔을까요? 하얀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을까요? 나는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외로운 소년의 등판 위로 그런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죠.

빛과 소금이 되어라. 누구나 원하고 서로 하려고 하는 것은 피해라. 너도 나도 원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소하게라도 이득이 있는 것이다. 그걸 피해라. 그 뒤로 나는 줄곧 내가 아니어도 남들이 모두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피해왔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무 큰 것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조건 즉 인간의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자연의 규칙들 사이의 소통, 이것이 내겐 진정한 마음속 소통입니다. 저 시베리아 우데게족 최고의 신은 엔두리입니다. 엔두리는 바로 화합(harmony)의 신이죠. 내게 화합은 이런 모습입니다.

비트 한 채를 마련하면서 나는 올바른 길은 절대로 즉흥적으로 찾아지는 것은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사그락사그락 눈을 밟으며 너구리 가족이 지나가는 것, 저녁 식사는 했느냐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앙탈도 부리고 속삭이기도 하는 부엉이가 달빛에 젖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날아가는 것도 다 느낍니다.

바닥에 떨어진 눈송이가 다시 날아오르면 건들바람이 부는 겁니다. 작은 나무에 쌓인 눈송이가 날아가면 들바람이 부는 겁니다. 큰 나무 전체가 흔들리고 눈이 수평으로 날리면 센바람이 부는 겁니다. 바닥에서 눈가루가 온통 날아오르면 큰바람이 부는 겁니다. 바다까지 용오름이 오르면 큰센바람이 부는 겁니다.

호랑이에게 공격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바로 혼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아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더불어서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종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을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고 싶은 욕망과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이냐고 절규하고 싶은 순간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어쩔 땐 녹차 통에 적혀있는 상품 정보 글자를 읽고 또 읽습니다. 그때 글을 잘 썼느냐 못 썼느냐가 아니라 읽을 게 있다는 것, 그것만이 좋단 생각이 듭니다.

나는 산에서 고독하듯이 도시에서도 고독할 것이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참지 못하고 도시에 전화를 겁니다.

산에서의 고독은 인간이 보고 싶어 생기고 도시에서의 고독은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 생깁니다.

도시에서 중요했던 것들이 산에서는 사소해지고 도시에서 사소했던 것들이 산에선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잠복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알 수 있는 걸 미리 알게 해줍니다. 삶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퍼뜩 깨닫고 돌아가서 살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비트는 호랑이를 보는 곳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비트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호랑이만이 나를 초라하게 했던 겁니다. 호랑이는 항상 우리를 먼저 봅니다.

하쟈인은 나에게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자신의 의사를 따라 얌전히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순간 초라해져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난 그 초라함이 좋았습니다. 난 겸손해져버렸습니다. 어찌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죽음 직전의 경험 때문에 그는 살아있음의 취약함, 삶의 일시적인 속성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끌어안았던 것 같습니다.

노련한 어미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지만 자식들을 볼 때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나는 그 밤에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꼈던 것 같습니다.

호랑이는 개체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자연의 법칙을 따릅니다. 호랑이는 욕구를 참을 줄 압니다.

자연은 투쟁하지만 정도를 넘어서진 않습니다. 인간만이 그 정도를 넘어섭니다. 호랑이도 자기 가족들까지만 돌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끝없이 연을 만들고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 하고 자자손손 영원히 끝없이 뭔가를 누리려고 합니다.

우린 오솔길을 걷듯이, 마치 호랑이가 그런 것처럼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노동하고 먹고삽니다. 그러나 자아 속의 소통이 없다면 노동만 하고 살게 되고 맙니다. 자아 속의 소통이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왼발을 든 채 정지 상태로 5분을 참는 것과 같습니다. 요가나 명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고 구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긴 흐름 속의 순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법입니다.

콘텐츠는 항상 과정 중에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호랑이에 관한 기념비적 자연 다큐를 만들어온 박수용 감독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 듣고 잊지 못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인생, 그의 일상이 우리 고민의 중요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좋습니다. 일상 따로 지혜 따로 꿈 따로가 아니라서 좋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했던가요?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도 잘 설명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더 큰 것을 필요로 했었던가요? 그는 오솔길의 끝에 사소한 것은 잊힌다고 했지만 그 오솔길의 끝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멀리 달려가야만 할까요? 거기에 이르기나 할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굴욕과 오해, 불편함과 쓸쓸함에 떨어야 할까요?

우리에게도 늘 어떤 식으로든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낮의 길과 밤의 길. 세상이 살라고 하는 길과 내가 살고 싶은 길. 우리 마음도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혼자이고 싶은 것과 함께이고 싶은 것. 용감해지고 싶은 것과 편안해지고 싶은 것. 싸우고 싶은 것과 고요해지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것과 초연해지고 싶은 것. 뜨겁고 싶은 것과 서늘하게 마음을 비우고 싶은 것. 속하고 싶음과 벗어나고 싶음. 떳떳하고 싶음과 포기하고 싶음. 자부심과 자기 비하.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

누구에게나 영원히 기억하는 순간들은 있지 않을까요? 단지 우리는 그것을 종종 부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경험을 잃어버리는 방식입니다.

체호프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꾸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넘어지는 건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불행하고 다른 이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형제나 가까운 지인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현실 때문에 비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버텨야 할지 모를 때 비참해집니다. 텅 빈 미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 미래 때문에 비참해집니다. 지금은 누군가 버틴다는 것이 우리를 버티게 합니다. 버티는 약자들이 우리를 버티게 합니다.

그런데 한 발을 든 정지 상태로 5분을 참는 호랑이의 모습이야말로 저에게 천재란 단어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까뮈의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천재란 스스로의 절도를 창조해내는 반항이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일을 자기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찾아내려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한계에도 장점에도 고통에도 행운에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한계는 한탄하고 장점은 과장하는 그런 태도 말고요. 한계도 장점도 길을 내딛는 하나의 원료로 쓰는 거지요. 어차피 한계와 결핍과 고통에서 모든 중요한 것들이 다 나옵니다.

뭔가를 끝까지 추구하면서 찾아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극복했다는 것을요.

가면에도 선악이 있습니다. 아마 인간은 인류가 문화란 걸 알게 된 이후로 가면을 썼을 것입니다. 진심을 가리기 위해서도 쓰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씁니다.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도 쓰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씁니다. 그런데 가끔씩 맨살을 통째로 무방비 상태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저 사람이 제대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염려도 하고 감탄도 합니다.

그녀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온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그녀를 가져다 내 인생의 땔감으로 쓰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내겐 ‘내가 제일 불쌍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제일 크게 고통을 겪었단 생각이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나는 이렇게 행동해도 돼. 그 고통을 겪은 나는 막 나가도 돼. 좀 망가져도 돼. 어떤 곳에 가도 내가 위로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있었단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위로받고 싶어 하는 거, 그게 아주 독입니다. 그건 끔찍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그 지독한 자기 연민이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든, 누구에게든 위로를 받아야 해.’라는 생각이 무너진 겁니다. 한 친구가 저를 배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제 앞에서 자신이 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 알고 보면 얼마나 불쌍한지 쭉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 저건 나다!’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내가 가장 불쌍한 것이 아니라 서로 불쌍한 것이다. 서로의 불쌍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한테 위로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바꾸기로 했습니다. 내가 나를 위로하기로 했습니다.

듣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나요?"란 질문이 가능함을. 그리고 그 질문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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