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책을 태울 수가 없었다. 해비샴 양과 벌록 씨, 게이브리얼 콘로이와 에드워드 애슈버넘과 히스클리프를 처음 만나고, 네더필드 파크와 바체스터를 알게 해준 책들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라스모이에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던 건 다시 만나니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찾는 물건이 있는 매대로 안내할 때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수줍고 느긋했으며 시골 사람 느낌이 났다. 처음에는 여자의 잿빛 푸른 눈에 관심이 갔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꾸밈없는 외모가 점점 더 좋아졌다.

"난초처럼 사랑스럽구나." 아버지는 이사벨라가 처음으로 셜해나에 왔을 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꿈에서는 그 여자가 난초처럼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그녀만의 독특한 말투로, 아침마다 호수로 찾아오는 새의 이름은 뿔해오라비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이 들려왔다.

플로리언은 꿈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어릴 때도 자주 그렇게 해봤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개는 침실 문 너머 층계참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꿈의 자세한 내용은 점점 흐려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사벨라는 나름의 현실세계를 펼쳐놓았다. 체사레와 엔리코, 바르톨로메오, 조반니 등이 존재하는 그 세계에서 그녀가 벽에 꽂아두는 스냅사진은 올 때마다 달라졌다. 멀리서 감탄하며 바라본 야회복 차림의 피에트로 팔로타, 이탈리아 은행의 시뇨르 카네파치. 그들이 그녀에게, 또는 그녀가 그들에게 실연의 상처를 안겼다. 그리고 플로리언은 그녀의 친구이며 언제나 그럴 것이었다. "너랑 있으면 나다울 수가 있어."

이사벨라는 플로리언을 치켜세웠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이탈리아어로 훨씬 명확하게 표현했던 그 말은 번역을 거치며 우아함을 잃어버렸다.

처음으로 이사벨라를 사랑하게 된 날이 언제인지 몰랐고, 그애를 항상 사랑했다고 생각될 때도 많았다.

이사벨라에게 그건 사랑이 아니었고 그래서 플로리언에게는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어여쁜 로즈 메리 다티, 그리고 캐슬드러먼드 약국에서 일하던 여자아이, 역장의 딸 놀린 파히,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잉그리드 버그먼. 그 여자들과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 한들 그건 모두 이사벨라와 관련된 것이었다.

칼에 찔린 성녀에게 기도를 올리는 수사가 그려진 엽서였다. 성녀의 목을 찌른 단도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고 성스러운 인물은 그런 고통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엽서에 ‘성녀 루치아’라고 쓰인 글을 읽던 플로리언은 그때 라스모이에서 얘기를 나눴던 여자가 떠오른 것은 그저 상상의 작용일 뿐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매번 캐도건스에서 새로 꽃을 사고, 마을길을 걸어오고, 물을 갈고, 싱싱한 꽃을 병에 꽂는 모습을 어머니가 지켜본다는 생각이 자신의 공상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파리 한 마리가 천장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우두커니 파리를 쳐다보았다. 한 번도 파리를 죽여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 중 이 시간 즈음 해서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세븐업을 한 잔 따랐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저 나름대로 무슨 일인가 하고 있는 파리를 계속 주시했다.

사장의 누이는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만날 때마다 그녀에게 고압적으로 굴었다. 그런 태도는 그들 어머니의 특징이었고 그 딸은 그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으며, 아마 알았다면 태도를 바꿨을 터였다. 버나뎃이 보기에 사장의 누이는 사악한 여자였다.

아침마다 바의 끄트머리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 둘은 그녀가 들어와도 인사를 하는 법이 없었고 근처를 지나가도 말을 걸지 않았다. 버나뎃은 남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버나뎃은 가져온 서류를 펼치고 서명이 필요한 수표는 한쪽에 따로 두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매일 아침의 일과였다. 세븐업을 받은 후, 사장이 볼펜 뚜껑을 열고 서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 그렇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행위에서도 그는 자신의 됨됨이만큼이나 꼼꼼하고 깔끔했다. 자제심을 높이 사고, 언성을 높이거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남자, 물건을 잃어버리는 행위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기에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 남자. 버나뎃은 그를 사랑했다.

"아니, 편지는 이미 썼어요." 버나뎃은 그렇게 말하고 서명만 하면 되는 편지를 찾았다. 그가 편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의자에서 몸을 살짝 틀었을 때, 버나뎃은 잠시 그의 접어올린 바짓단이 자신의 장딴지에 닿는 것을 느꼈지만 그저 우연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정신 차려."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비웃으며, 그는 매춘부 같은 제 마누라에게로 돌아간 거라고, 그런 남자는 꼭 매춘부 같은 여자를 마누라로 삼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침대 시트를 태웠다. 가정부는 밖에 나가 마당을 쓸라며 내보낸 뒤 침대에서 시트를 벗겨내 아래층으로 가져가 화덕에 욱여넣었다. 눈물과 애원에, 아서 테틀로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그의 셰필드 이야기와 돌아오겠다는 다짐에, 이 모든 것에 어머니는 멸시를 퍼부었다. 모든 게 한심하다, 어머니는 말했다. 그렇게 비열한 욕구를 채웠으니 두 사람 다 천벌을 받을 거다, 평생 대가를 치를 거다. 이 집에 닥친 추한 불행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다, 어머니는 그렇게 예견했다. 추한 결과도 마찬가지고.

그날 일은 코널티 양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망자에게 보이는 매정함은 그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의식과도 같았다. 고통의 시간은 끝났지만 그녀는 그 시간이 아직 지나지 않았기를, 항상 무언가가 남아 있기를, 움츠림이나 떨림, 아직 풀리지 않은 분노의 일부라도 남아 있기를 소망했다.

황폐해진 거실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이 지겨워진 플로리언은 어느 날 아침 다시 라스모이로 갔다.

엘리는 그때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처럼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고 도저히 제 것 같지 않은 비뚤어지고 생소한 생각들이 가득 찼다. 물론 기억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궁금했고,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궁금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을 때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엘리는 자꾸만 그에게로 눈길이 향하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녀는 자기 마음을 알까 궁금했다. 모르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남자와 함께 자전거를 끌며 걷고 있다는 것, 심지어 고기를 사러 가려 했던 헌스 정육점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엘리는 겁이 났다. 장거리가 있다고 말했어야 했다. 고기를 사야 한다고 지금이라도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엘리는 머게니스 스트리트가 나오면 코벌리스에 가야 한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고, 사야 한다고 말할 물건도 생각해두었다. 똑딱이 단추, 그렇게 말할 참이었다. 그리고 바늘.

플로리언이 오늘 아침 만남에서 기대한 것은 자신이 과거에 같은 방식, 같은 이유로 맺었던 가벼운 관계에서 기대한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런 시작은 예전 관계의 시작과 다르지 않았고 이미 기분 전환도 충분히 되었다. 이사벨라가 한낱 그림자로 남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 꾸밈없는 시골 여자 하나가 마음속 여린 부분을 건드리자, 사촌의 목소리는 예전만큼 자신 있게 울리지 않았고 미소는 다소 희미해진 듯했으며 손길의 기억은 어제보다 약해진 듯했다. 그가 대화를 이어가느라 현재 길동무의 매력을 벌써 언급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직감했다. 영영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엘리는 그 방들을 그려보았다. 황폐함은 빼고. 벽난로와 꽃이 있는 편안한 방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뜻밖의 사건으로 그들에게 온 아이. 그녀는 그곳에 홀로 남은 남자와 검은 개, 부모의 죽음 뒤로 너무 많아진 열여덟 개의 방을 보았다. 호수의 고요한 물도 있었다. 정원의 향기와 황혼녘의 달콤한 공기도 있었다.

두 사람은 코벌리스 매장을 지나 걸었다. 엘리는 캐시앤드캐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반지를 숨기지 않았을까, 오늘 아침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자문해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 수녀님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그걸 행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느닷없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니 종종걸음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망설임과 다급함이 섞인 몸짓으로 누가 억지로 등을 떠미는 듯 갑작스럽고 어색하게 떠나는 모습이었다. 엘리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면서 갔고, 장례식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그 남자는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 모습에 놀란 듯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더니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가로질러 캐슬드러먼드 로드 쪽으로 사라졌다.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가 엘리를 몰랐다면 눈치챌 수 없었을 ? 그리고 분명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 무엇. 전에 엘리가 얘기했던 때, 그러니까 남자가 길을 물었다던 그때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지난날의 잘못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남편 외에 말 상대 하나 없이 저 멀리 외딴 산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일 터였다. 엘리를 탓하기는 힘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러는 게 당연한 일 같지도 않았다. 시설에서 자란 아이, 빈곤 속에서 자신을 낮추며 살아온 아이,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엘리 딜러핸은 세련된 사진사의 관심이 아니어도 이미 충분한 역경을 겪었다. 그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건 상관없이, 코널티 양의 날선 상상 속에서 그 남자는 이미 약탈자였다. 후진하는 이동식 주택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곱씹는 동안 코널티 양이 느낀 충격은 분노가 되어 양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죽은 사람처럼 살아냈던 지난시절, 그리고 이젠 흐르지도 않는 눈물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것처럼. 엘리 딜러핸이 한없이 불쌍했다. 자신이 한없이 불쌍해 너무도 비참했던 어느 시절처럼.

그는 누이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정작 누이가 말을 시작했을 때는 제대로 듣지 않고 가끔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가 누이를 더블린에 데려갔던 날, 어머니는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둘 다, 어머니가 말했다. 영원히.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누이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마중을 간 그와 함께 아버지와 누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날이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이에게 코코아를 가져다주었다. 엄마라면 누구라도 속상할 거다, 그가 말했지만 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동생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뒷방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야. 그 남자를 못 본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지붕에 올라가 고함을 쳐도 넌 안 보려고 하겠지."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늘 최선이었다.

돌사과밭으로 가서 곡식을 흩뿌리자 암탉들이 몰려들었다. 엘리는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은 아니었다. 클룬힐 수녀님들이 항상 이야기하던 사랑과 다른 방식의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 표지가 눈에 보일 듯이 밝게 빛나며 영원히 타오르는 그런 사랑, 농장의 부엌 문간 위에서 지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듯한 그런 사랑이 이제는 엘리의 것이 된 소스 팬을 닦던 그 여자에게, 또한 그전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있었겠지만 엘리는 아니었다.

차바퀴가 교체되었고 잭은 다시 내려와 있었다. "고마웠어." 그녀가 지나가자 남편이 말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자꾸만 고맙다고 말했다.

딜러핸의 집이 엘리의 보금자리였고, 그곳에서 그녀는 역시 배려의 의미로 하녀가 아니라 주부로 불렸다. 아내를 여의었고 자신보다 아는 것도 많은 그는 실제보다 더 나이 든 사람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결혼하는 편이 낫겠다, 그가 말했다. 정확히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라힌치에서는 그녀가 점점 친근하게 느껴진다며, 자신은 운이 좋은 남자라고도 말했다. "저야말로 운이 좋죠." 엘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거짓말하는 습관이 없었다.

"저 사람은 새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예요." 결혼 피로연에서 모르는 여자가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 말을 꼭 해야 한다는 듯, 그의 진가를 모르기 십상일 거라는 듯.

그녀는 남편이 삼각형의 치즈를 감싼 은박지를 벗겨 깔끔하게 접은 뒤 칼로 치즈를 들어 올려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꼼꼼한 일처리를 좋아했다. 심지어 이런 것까지도. 조심성 없이, 혹은 건성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물론, 예전에 그런 행동이 비극을 초래한 적은 있었지만.

옆으로 기울여 쓴 구식 필체는 현란함을 지양하고 명료함을 따르라는 앰브로즈 수녀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날 것이고, 그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실수와 자기 자신까지 속여 넘겼던 시간을 수치심과 함께 되새기며, 참회를 통해 평화를 찾고 용서받게 될 것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이란 있을 수 없고 매순간 치유가 될 것이다.

한 해 중 이맘때는 밤에도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기 때문에 트랙터의 녹색이나 복스힐의 칙칙한 갈색도 흐려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탈리아인 어머니는 키가 크고 담배를 피우고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이다. 난데없이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 돌사과밭에서 그녀는 닭들을 우리에 가두었다.

편지를 쓴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을 너무도 잘 아는 그녀들이지만, 침묵과 기만이라는 거짓 때문에 변해버렸고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질 거라고 털어놓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말을 아껴서는 자신이 느끼는 황폐함을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낀 말마저도 당혹감과 불안함만 초래할 터였다.

그는 골칫거리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떠나며 엘리는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골칫거리라고 말할 수 있지? 그 말도 했어야 했다. "그 사람 이름은 플로리언 킬데리예요."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반은 이탈리아 사람이고요."

엘리를 첫 번째 아내와 비교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을 함께 놓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적도 없었다. 하지만 딜러핸은 자신이 두 번이나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덜컥덜컥 돌아가는 재봉틀이 바람대로 딴생각을 몰아내주었다. 결연한 태도로 그녀는 솔기를 일직선으로 박아 내려갔다. 오후는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아침에는 닭도 돌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늘의 음반’도 들었는데 음악 중간 중간에 대화도 많았다. 하지만 해든 부인이나 또는 몇 안 되는 오리알을 사러 오는 작고 수줍음 많은 토머시나 플린이 들르지 않는 날에는 오후를 보낼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엘리는 라스모이로 가는 날을 화요일로 바꿨다. 금요일의 라스모이는 이제 익숙했기 때문이다. 화요일 오후는 자신에게도 그렇고 사제관 일정을 봐도 그렇고 금요일 아침만큼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화요일이 더 낫기에 바꾼 것이었다.

조용해진 재봉틀 위로 원하지도 않는 원피스가 반쯤 완성된 채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트랙터 소리가 마당에서 들리자 엘리는 다가올 기나긴 저녁이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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