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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박미림 지음 / 산맥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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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2월 27일, 두번째 시집 <마네킹> 출간 기념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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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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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며칠간 박미림 시인의 시집 <마네킹>을 부적처럼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박미림 시인에게 첫시집 <벽을 바라보다> 이후 두번째 시집 <마네킹>이 나오기까지의 3년간은 여자로서 참으로 힘든 기간이었다.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잘라내어지며, 한참 성장기에 있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주저 앉아 통곡만 하고 있을 수 없던 어쩔 수 없었던 현실. 그 속에서 시인 스스로에게 부적 같은 존재였던 시, 그 70편이 이번 시집 <마네킹>에 수록되어 지난 2004년 연말, 그 상처의 속살이 우리 앞에 벗겨졌다.
작가의 글
현실은 언제나
삐뚤어지게 책장에 꽂힌 책이었다
덧 난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늘 또 다른 상처를 돋게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오늘은 이상하게 무료하다
슬픔은 어제의 일이고
오늘 그 슬픔은 사라졌다
머리속이 백지다
난 이렇게 산다
죽기 싫어서 지쳐갈 무렵, 난
詩라는 탈출구를 선택했다
-2004년 11월, 무서리가 내린 아침
시인 스스로 겸손하게 '무명'이라 한다.무명 시인의 시에게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인들의 시보다 더 깊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음은 무엇인가. 깊은 공감일 것이다. 내안의 아픔을 들여다 본듯 너무나 적절하게 끄집어 내어 "살아오면서 어디 한두번 배신을 느꼈어?이런 아픔쯤 이렇게 탈탈 털어내버리면 되는 거야"라고 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나보다
이름만으로 적혀진 사람이 기억나질 않는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지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억을 파헤쳐 보아도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름으로만 그 사람을 상상한다
오랜 연락번호가 세월의 흔적으로
퇴색되어 있는 것을 덤덤하게
맞아 들일 뿐이다
지금 이 번호로 전화하면
이름으로만 내게 남은 사람은
날 기억하고 있을까
괜한 장난 끼 발동하여 번호를 눌러 본다
이름으로만 기억되어진 사람은
부재중이었다
참 다행이다 서로 망각되어가는 슬픔을
오래 더 느낄 수 있게 되어
-<오랜 수첩에는 슬픔이 있었다> 중에서
괜한 장난끼 발동해 전화번호를 눌러 보았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전화번호조차 없지만 이름이 가물가물한 그런 이름이 있다. 그런 아쉬움 많은 이름이 있다. 한때는 그리도 절실한 이름이었는데 젊음의 방황과 어줍잖은 낭만으로 어쩔 수 없이 놓아야만 했던 이름, 세월의 부재와 함께 잊어 버린 이름. 그런 이름, 그런 전화번호 한둘 없는 사람 있을까?
밀물도 썰물도 그곳에서는
사랑을 하였다
떠난 사랑도
다시 기억해야 하는 곳
그 다리를 지나면서
개펄 그 망망대해에
나 혼자 남겨두고
떠난 사람을 생각했다
이제는 남남이 되어버린 운명
그대도 나처럼 다리를 지날 때는
가슴에 눈물 훔쳐댈 텐데
잊지 마라,
밀물과 썰물은 영원히 그 다리를
오고 가며 사랑을 나눌테니까
-<초지대교를 지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중에서
배신으로 혼자 남겨진 여인으로서 그녀는 삶을 그래도 이어야만 했다. 그녀가 때로는 삶을 달관한 듯한 무덤덤한 모습으로, 때로는 시시각각 조여드는 생활 속 경제적인 빈곤으로, 때로는 배신을 안기고 가버린 사람을 원망하다가 차라리 깡그리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을 추스리며 써 내려간 편린들이 이 <마네킹> 속 아픈 시편들이다.
유리질의 아침
햇살이 아닌 불빛이 주사바늘처럼 꽂히는
여기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겟어
진지하지 못한 시선을 마주 대하는 것이
가장 큰 곤혹이야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아
하루종일 내 옷이 아닌 타인의 옷을 걸치고
유리벽을 통해 풍겨오는 세상의 상한 냄새를 맡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나는 뜨거운 피가 돌지 않는 여자라고?
생명을 밪을 갈비뼈도 없고
머리는 가발인데다
노예근성만 남았다고?
이렇게 박제처럼 있다보니
속도, 자존심도 없는 줄 아나봐
내가 더 안쓰럽고 측은한 눈으로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
이쪽에서도 너희들 속이 훤히 다 보이거든
가슴이 바위처럼 굳어 지고 있거나
바람의 터널처럼 휑 비어있어
그걸 가리기 위해
갖가지 옷을 사들이는 것 아니겠어
다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었을뿐이야
왜?
나도 너희들 구경하는 것이 즐겁거든
-<내세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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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협 사무실에서의 박미림 시인, 한사코 무명이라 겸손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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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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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미림. 그녀는 작은 들꽃송이처럼 여리디 여린 여자다. 삶과 사랑이 평화로우면 남편과 아이들을 일터와 학교로 배웅하고 향기로운 커피에 젖어 들다가 눈부시도록 고운 언어들로 맑은 시어들을 들려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가장 믿었던 발길에 밟히는 들꽃으로 누군가 뿌리까지 뽑아내면 여린 실뿌리일망정 하나 땅속에 떨구었다가 또 다시 생명을 틔워 내는 모질고도 악착같은 들꽃이 되었다.
나는 시를 그리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을 일부러 구해 읽지는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마네킹을 요즘 며칠간 가방속에 넣고 다니고 있다. 아마도 좋은 시란 그렇겠지. 이런 저런 나름의 틀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도 모르고 있던 내마음 속 아픔 같은 걸 애교스럽게 헤집어 내어 어떻게든 치유해 주려는 그런 언어들을 쓴 시들이 좋다. 가슴에 스며들어 눈가에 이슬 맺히게 하고 그러면서 조금은 위안 받고.....
좀 통속적이면 어떤가. 내가 무언가 필요로 할 때 나의 그 필요함이 되어 주는 것, 그리하여 말하지 못하는 나의 상처를 얼마간 소독해 주고 새살 돋게 하는 것... 때문에 난 박미림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박미림 시인의 시에는 무엇보다 여자로서 걸어가야만 하는 삶의 이름 모를 부제가 속속 스며 있다. 말하자면 시인의 아픔을 말하는 건데, 시인의 아픔은 한편 나의 공감이면서 한편으로는 '그래 그러니까 나는 그나마 행복한 거야'를 되뇌이게 한다.
누가 상처 내었다기 보다는 이미 타고 난 삶의 외로움이야 우리들 누구나 어쩔 수 없는 거고, 여자로서 내스스로 부제와 부재를 안고 서성거릴 때면 시인의 시집을 그냥 빼어 들고 다시 아무렇게나 펼쳐 넘겨 버린다. 어떤 시를 읽겠다고 작정 없이 그냥 습관처럼 아무렇게나 펼쳐든 페이지에 있는 시 한편 마다에서 내가 느끼는 깊은 공감들.
나도 한때는 여린 풀이었어 누군가 나를 밟기전까지는 난 크고 싶었어 살고 싶었어 그런 나를 그들은 마구 밟아댔지 나도 그들처럼 하늘 가까이 닿고 싶어서 내 몸에 근원인 뿌리가 뻗어 나가는 곳곳에 질긴 목숨담보 삼아 못질을 해댔어 다시 나는 여린 풀이 되고 다시 나는 뽑히고 반복된 작업에 나도 그들도 지쳐가지만 결국 포기하는 건 내가 아니지 날이 갈수록 더 질겨지기에
조심해 짓눌린 내몸이 가끔씩 칼날처럼 일어 나거든
-<잡초가 말하기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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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마네킹>의 앞뒤 모습. 70편의 시들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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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현자 |
| 이 시는 가난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울컥하게 하다가 모질게 살아가야겠다고 세상에 대하여 조소 한자락 보내는 용기를 주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바람 모질고 황량한 날에 그녀의 시들을 다시 펼쳐 본다. 70편의 시들에서 우아한 헤이즐넛 커피보다는 자판기 커피처럼 친숙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바람과 아픔이 시인을 통하여 다시 날개짓한다.
특별하게 대박 맞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 보았자 그만 그만한 삶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함께 마음 나누며 공감하면서 눈물 적시는 가슴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아픔이 많은 가슴일수록 그 위안은 크고 깊다. 시인의 아픔을 통하여 나는 내 가슴의 아픔을 조금 더 연하고 부드럽게 희석해 본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들은 종종 나에게 부적이 되어주곤 한다.
"다시 돌아 보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이 마흔에 얼떨결에 첫 시집을 내고 출판 등록조차 하지 않앗습니다. 이번에도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워 출판등록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자구 충동질하여 이렇게 부끄럽게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글을 쓰는 것에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갈수록 웹 공간에서 읽혀지기 쉬운 글을 쓰게 됩니다. 그래도 그전에는 종이 위에 쓰면서 나름으로 글쓰는 자세가 있었고 그만큼 책임도 느꼈는데..... 많이 헝클어진 느낌입니다."
두번째 시집을 낸 박미림 시인의 말이다.
난 그 어떤 시인의 시보다 박미림 그녀의 시가 좋다. 모질고 냉정하며 질기디 질긴 그녀의 시어들이 좋다. 같은 여자로서 아픔을 정곡으로 찔러 치유해줌이 좋아 오늘도 시인의 시는 부적처럼 나에게 있다.나의 마음을 아주 잘 헤아려 적절한 언어로 내앞에 그렇게 있다. 한없이 소박한 들꽃같은 시인이 좋다. 그 여린 숨결 속 어디에 그렇게 강한 뿌리가 있었는지 싶다. 여린 마음으로 버티어가는 시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누구는 처음부터 유명이었던가. 누구나 무명이 있어서 유명도 얻을수 있음 아닌가. 누구나 무명을 딛고 걸어 나가야만 유명 속에 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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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림 시인은 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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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림 시인은 1963년 토끼띠이다. 2000년 문예사조 신인상 등단/ 2001년 김포문학상 공로상 수상/ 2003년 김포문학상 우수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2002년 첫번째 시집으로 <벽을 바라보다>(2002)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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