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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평점 :
이윤기의 <어른의 학교>란 책 내용 중 '루거를 불태우지 맙시다'라는 주제의 글은 저자가 미국의 어느 쇼핑센타에서 겪은 에피소드다. 이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그냥 웃고 말기에는 마음이 결코 편하지 못하다. 이야기를 간단하게 덧붙여 보면 이렇다.
"안녕하쉽니카?"라고 첫인사를 건넸던 계산원은 계산이 끝나고 돌아서는 자신에게 "끄너" 라고 친절한 인사를 하더란다. "끄너? 대체 어떤 의미인데?" 그 내력을 물으니 아르바이트 학생신분인 그 계산원은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의 학생들이 전화를 끊으며 예사로 '끄너, 끄너' 하기에, 헤어질 때 다음을 기약하며 예의를 갖추고 반듯하게 하는 인사인줄 알고 열심히 배워두었다. 손님이 한국 사람이다 싶으면 '끄너'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하였었다.
이 에피소드로 저자는 말 한마디, 무심코 쓰는 단어 하나가 다른 공간에서 어떻게 전이(轉移)되는지를 무섭게 실감하였다고 한다. 같은 동급생인 한국학생이 전화를 통하여 예사로 하던 '끄너'가 이국의 그 계산원에게는 '안녕 잘 있어' '잘 가' '잘 자'처럼 헤어지거나 전화를 끊을 때의 당연한 인사로 들려진 것이다. '루거를 불태우지 맙시다'라는 글은 번역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저자의 말은 이렇다.
"…사전을 열면 말의 역사가 보입니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합니다. '제록스'와 '샴프'는 상표명이 '복사하다', '머리감다'는 의미의 일반 동사로 바뀐 대표적인 영어에 속합니다. 사전을 알아야 그렇게 바뀐 속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호치키스'는 원래 기관총 상표명입니다. 전쟁 끝나 기관총 잘 안 팔리니까 그 기관총 탄창에 총알 쟁여 넣는 기술을 원용해서 만든 것이 우리가 아는 호치키스인 것입니다.
나는 남의 오역(誤譯)을 지적하고 그걸 씹는 것을 별로 안 좋아 합니다. 그러나 번역하는 사람이 사전 안 찾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뜻에서 하나만 소개합니다. 나는 십수 년 전 어떤 소설 한국어 번역판에서 "그는 자기의 루거를 불태웠다"는 문장을 읽고 웃었습니다. 원문을 확인할 것도 없이 'He fired his Luger'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루거'는 독일제 9밀리 권총의 상표명입니다. 따라서 그 문장의 정확한 번역은 '그는 권총을 쏘았다'가 맞습니다." -루거를 불태우지 맙시다. 중에서
이어지는 저자의 고뇌들이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번역하면서 사전은 결국 길라잡이에 불과해서 펄펄 살아있는 말을 찾아 쓰기에는 더 깊은 고민과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 글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저자의 다른 산문집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저자는 고백하기를 단어 하나를 두고 하룻밤을 지새우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프로라는 것은 이렇게 만들어 지는 구나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번역 작가 아닌가?
저자의 맛깔스럽고 깊은 글들은 이렇게 태어나서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펼쳐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 에피소드를 일부러 읽곤 한다.
보아야 보이는 것 들 - 늘 깨어 있어야 한다
"… 소리를 하든, 연기를 하든, 연출을 하든, 자기가 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더라. 자기가 하는 일에 깨어있더라는 것이다. 저금하는 놈과 공부하는 놈에게는 못 당한다는 옛말이 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는 전문성, 그걸 뭔 수로 당하겠는가 …'-김명곤이 이윤기의 아들딸에게 들려주는 말, 보아야 보이는 것들 중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김명곤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무대에서 절름발이 연기를 하려고 '저는 사람'을 관찰하고 배우기 위하여 종로2가에 나갔다고 한다. 절름발이야 간혹 보고 살아 왔지만 배우려면 확실한 관찰이 필요했을 거였다. 절름발이를 만날 필요가 없을 때는 보기도 힘들었지만 절름발이를 찾아 거리에 나서보니 무슨 사람이 이리 많은 것이며, '저는 사람'은 왜 또 많은지… 그런데 다시 '저는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없어지고 보니 종로에 나가도 저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마음에서 멀어지니 눈에서도 멀어지더라는 것인데,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일에, 스스로 하는 일에 노력을 함은 물론 늘 깨어있자는 것이다. 깨어 있을 때 원하는 것들이 비로소 보인다는 것이다.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스스로 처방하는 책
<어른의 학교>는 저자의 문학자세와 생활자세를 유감없이 볼 수 있는 산문집이다. 짧고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들 32편은, 소나기처럼 시원한 글들이 남기는 여운이 깊고 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생각하고 마는 것들이나 꼭 필요한 것들을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시각으로 끌어들이고 발효시켜 능청스럽게 들려주는 맛이란… 이야기들마다 이렇게 맛깔스럽게 속속 스며들까 싶다.
무엇을 하다보면 타성에 젖고, 그것마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오만으로 결국 딜레마에 빠졌다고 후회하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저자의 산문집 한권씩을 펼쳐 훑어보곤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교만과 게으름을 버리고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한다. 툭툭 던지는 듯, 한껏 능청스러운 맛깔스런 글에 맘껏 취하거늘, 그래도 이렇게 스스로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사다리를 버린다(去梯)커니, 통발은 잊는다(忘筌)커니,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不立文字)커니 하는 거 아무나 지망지망히 시늉할 것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누각에 오른 연후에야 버리는 것(登樓去梯), 통발은 물고기를 잡은 연후에 잊는 것(得魚忘筌)입니다. 자기 근기(根氣)는 요량도 못하는 채 뭘 불 싸지르고 뭘 버리는 거 좋아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적어집니다. 맥도 모르고 침통 흔들 것이 아니라 모두 배우는 일에 겸손해졌으면 합니다. 옛 선사 한 분의 말씀이 들어둘 만합니다. <언필칭,' 불립문자 '라고 하나 문자도 방편될 것이면 가히 길동무 삼을 만한 것이라(그러니까 까불지 말거라).-'우리가 싸질러야 할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