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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삼국유사 - 8백 년 전의 일연 따라 삼국유사를 거닐다
고운기 지음, 양진 사진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살았던 13세기는 고난의 시기였다. 무인정권기의 혼란이 되풀이 되고 몽고의 30년에 걸친 침략이 있었다. 고려는 결국 몽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일본정벌을 하게된다.
이런 국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이었다. 당시의 지식인이요, 국사였던 일연은 고단한 민중들의 삶을 탄식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난극복의 요체로 책 한 권을 집필하게 된다. 이것이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를 대하며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강화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발길이 닿은 곳에 대해 빠짐없이 기록하였던 일연. 그러나 3년이나 조실로 있던 선원사가 있던 강화에 대해서는 한 줄 적기를 꺼려하며 끝내 침묵했다.
몽고의 침략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피신하였던 은혜로운 땅.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해내기를 염원하며 그것도 자신이 머물던 선원사 주관으로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호국의 땅 강화 아닌가! 게다가 보문사나 전등사라는 이름난 절이 있는 강화 이련만.
<삼국유사> 일연이 '강화'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이유
팔만대장경에 대한 지극한 발원이나 자부심을 단 한 줄이라도 기록할법하건만 일연은 끝내 침묵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강화는 정권야욕에 눈먼 무인들이 활보하던 땅이었으며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쳐 온 왕이 있던 곳이었다. 그 누구보다 힘없는 민초들을 사랑했던 일연은 그런 강화에 대해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리라.
이런 의미와 함께 경주 분황사에서 만나는 '원효와 설총'은 역사적인 기록으로 저 만치에 머물고 있던 삼국유사를 더욱 더 바짝 끌어다 주는 듯하다.
…세상의 낮은 자리로 와서 낮은 자리의 사람들과 함께한 생애. 원효는 일세를 풍미했지만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살다 갔다. 그런 생애를 누구보다 잘 안 것이 아들 설총이었다. 설총은 아버지가 죽자 유해를 잘게 부수어 얼굴모양 그대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신다. 원효의 소상(塑像)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들이 예불을 드리러 오자 소상(원효의)이 홀연 돌아보았다 하지 않는가. '지금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라고, 일연은 마치 본 것처럼 삼국유사에 적었다. 아비는 아들의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들에게 전할 무슨 애틋한 사연이 남았더란 말일까? -책 속에서
일연을 따라 13세기 사람들을 만나보자
분황사에서 만나는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의 사연에서 21세기의 기러기 아빠들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출가자 원효가 아닌 아버지 원효, 13세가가 아닌 21세기의 아버지 원효를 떠올리면 지나친 걸까?
일연은 이처럼 삼국유사에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였고, 이런 일연의 의도를 잘 헤아려 맛깔스럽고 살갑게 들려주고 있는 책이 <길 위의 삼국유사>다.
<길 위의 삼국유사>는 세간에 '삼국유사 박사'로 소문난 고운기(연세대교수)가 삼국유사를 20년 동안 연구해오며 찾았던 삼국유사의 현장기행문이다. 역사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삼국유사의 현장을 셀 수도 없이 찾았다고 한다. 그중 15곳, 그리고 그 주변에 대한 감상이다.
분황사에서 만나는 원효와 설총뿐이랴. 법성포에서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의 자취를, 공주 무녕왕릉에서는 선화공주를 떠올린다. 이제는 사라진 분황사 석벽자리에서 눈먼 딸을 둔 어미가 절박한 심정으로 부른 '천수대비가'를 듣는다.
그리고 진신으로 효소왕을 깨우친 산, 경주 남산을 오른다. 남산은 산 전체가 마애불이요, 보이느니 부처의 미소뿐이다. 화려한 금불상이 아닌, 은은하고 소박한 돌부처의 미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하여 남산을 오르는 그 길을 쓸고 닦게 하였다.
여러 번의 화마를 겪었던 낙산사에선 하룻밤 사이에 백년의 희열과 고통을 겪은 청년 조신의 꿈을 줍는다. 이렇게 일연을 따라 13세기의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딱딱한 역사로만 남아있던 이 땅의 기록들이 21세기와 닿아 있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여름휴가, 삼국유사 현장 찾는 건 어떨까?
<삼국유사>를 벗한 지 이십 년, 여행길 동무 삼아 다시 읽었다. 일연 스님을 모셔 동행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와 함께, 그가 했듯이, 이야기의 현장을 다시 가보며 뜻을 되새겨 보기로 했다. 그 길 위에서 짬짬이 13세기의 눈으로 21세기를, 21세기의 눈으로 13세기를, 아니 더 넘어 우리 고대사의 사람들을 그려보기로 했다. - 고운기
법성포, 불갑사, 금산사, 선운사, 미륵사터, 분황사, 경주남산, 무장사터, 대왕암, 감은사, 오어, 처용암, 망해사, 낙산사, 굴산사터, 월정사, 상원사, 진전사터….
저자 고운기가 일연과 함께 동행 하는 마음으로 따라간 삼국유사의 현장들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 이미 아스라이 빈터로 남았지만 우리 곁에서 남산의 돌부처처럼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곳들이다.
저자는 백제의 불교가 시작된 곳인 영광불갑사를 시작으로 일연이 출가한 진전사터를 끝으로 <길 위의 삼국유사> 기행을 마치고 있다. 각 장 끝에 '함께 가볼 만한 곳'에서는 본문에 다 소개하지 못한 장소와 풍경, 맛깔스런 음식과 편안한 숙소 등의 여행정보를 추가했다.
올 여름 휴가는 탄생 800주년을 맞은 일연과 동행하여 그 누구보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한 일연의 위대한 기록인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삼국유사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여행이 될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