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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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따로 세상 따로 인지, 책과 세상이 서로 엉켜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내 삶과 책은 서로 엉켜있다. 난 책에서 읽은 것을 세상에서 확인하고 세상에서 겪은 것을 책에서 정리한다. 책에서 읽고 감동한 바를 가슴에 새겨두고 그것을 다시 되새기곤 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 모두가 이런 과정을 모두 겪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과 세상까지는 아니어도 책과 사람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학문은, 철학은 일상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스스로를 '시니컬'한 사람이라 말하는 철학박사의 잡문집을 읽는다. 16꼭지의 다소 긴 듯한 글들은 결코 지루하다거나 고루하지 않고 냉철한 이성으로 깨어 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편을 신랄하게 꼬집어 주는 글들은 진보적이며 통쾌하기까지 하다.

사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 곧 그것 아닌가. 그런데 왠지 철학은 어렵다. 학문의 한 분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결론까지 미리 내려버리고 나니 철학은, 현실을 살아가는 일상인에게는 어떤 개념이나 정의와 함께 그야말로 학문적 가치일 뿐이다. 그냥 칸트, 소크라테스와 함께 한편에 올려 두어도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인데 일부 사람들(철학자, 학자)은 그걸 ‘논’하자고 일부러 들먹인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써먹을 것도 절대로 아닌데… 그러나 새삼스럽게 철학은 내 삶의 모습임을 이 책을 통하여 돌아보게 되었다.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한때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는 철학자 강유원의 삶과 학문, 철학의 연결 고리는 이렇다.

철학은 일상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 있어야만 철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이라는 말에 주의를 둘 필요가 있다. 현실은 늘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왜곡과 거짓으로 쌓여있다. 따라서 현실을 본다는 것은 그러한 왜곡과 거짓을 벗겨 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철학적 사유의 기본적인 출발점인 의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본문 ‘철학의 현실적 쓸모’중에서>

사실 욕심이라면 이 책의 각 주제의 글 중 밑줄 그은 곳 한 꼭지씩이라도 슬쩍 보여주면서, 학문을 삶의 한 방편으로 옹골지게 껴안기를 원하는 저자의 이성과 사고를 함께 나누자고 하고 싶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단지 사유하고 담론하는 것으로가 아닌 '몸으로 엉켜들기'를, '현실에서 그 체험'을 원하는 저자의 냉철한 지성을 같이 나누자고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야기해보자. 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아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안다는 것의 전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사실 '할 줄 안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야 어느 정도 앎의 완성에 접근해간 것이다. 이걸 흔히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라고 한다.<본문 '안다는 것'>

거리낌 없이 날카로운 글들에서 내가 얻는 것은...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고리의 글에 밑줄을 긋는다. 또한 읽어 나가다가 깊이 공감하는 글이 묻히거나 바래지지 않기를 바라며 밑줄을 긋기도 하는데, 이 책 역시 밑줄을 많이 그었다.

모순의 박정희 전기 그 출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글에도 밑줄을 그었다. 하기야 그렇지. 전기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려, 혹은 그의 정신을 추앙하며' 가 당연한데 국민 학교 4학년 때 세계 위인전 시리즈 전기로 읽은 사람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드디어 죽다니… 우리가 살아 온 세월의 한 갈래다.

…박정희 전기라고? 딱 잘라 말해 미친 짓이다. 박정희가 죽은 게 나 고등학교 3학년 때인데 내가 국민 학교 4학년 때 벌써 박정희 전기를 읽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짓이다. 스스로 쓴 회고록이 아닌 한, 전기는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쓰여 지는 것이다. 그런데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의 전기가 쓰여 진다는 것은 어이없고, 그걸 쓴 사람도 미쳤고 출판사도 미쳤다…"<책 따로 세상 따로 중에서>

사실 이 잡문집에서 만나는 저자의 비판은 거리낌 없고 날카롭다. 사회의 비주류, 즉 약자인 나에게는 통쾌한 대리만족이다. 누가 나서서 사회의 비주류인 나를 위하여 잘나가는 주류들을 이렇게 거침없이 때려 줄 수 있음 이련가. 통쾌한 칼날을 따라 가다가 아차~! 그러나 시니컬한 철학자는 위험 수치를 결코 넘지 않고서도 다시 또 다른 주류들을 향하여 거리낌 없다.

대학과 매스 미디어에 공생의 관계로 혹은 빌붙어 사는 지식인들을 향한 비판에도 밑줄을 그었다. 꽤나 유명한 어느 철학자에 대한 공자론 운운 글에도 밑줄을 그었다. 애초부터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공자운운이었지만, 확실한 학문 체계가 없는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단 한번이라도 써먹기 위하여 모방의 밑줄을 그었다.

'맥도날드로 대변되는 패스트푸드.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라는 주제의 글은 몇 번을 읽어도 생각을 갈래갈래 잇고 있다. 우리 스스로 편하고자 만들어 낸 패스트푸드는 이젠 인간을 패스트푸드 화 시키고 있다. 공존하는 나 역시 좋든 싫든 그 영향에서 아주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급이면 덜 스며들어야겠지. 나의 관심 분야를 어느 정도는 고리 짓고 있는 주제여서 앞으로 좀 더 유용하게 펼쳐 보고 참고삼으면 좋을 글임은 분명하다. 저자는 약간 다른 방향의 사유를 내비치지만 내 나름의 방식으로 흡수하여 보는 글이다.

몸으로 공부하기, 강유원을 알려면 이 잡문집을 읽어라.

2002년까지는 책읽기만이 내 인생의 알리바이였으나 2005년에는 글쓰기가 그것에 덧붙여졌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이라 여긴다.

그간 저자가 시중에 내보였던 서평집 '책'이나 '서양근대문명의 기반' '책과 세계'등이 일정의 형식을 따라야 했다면 이 잡문집은 저자 강유원의 형식을 벗어 던진 한층 더 자유로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글들이다. 이 잡문집은 강유원의 ‘책과 세상’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와 통찰의 글들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잡문’이라 정하여 적은 글들이다.

저자가 말하는 지식인으로서 설 곳은 두 군데 '체제 안'과 '체제 밖'.이다. 저자는 체제 안에 흡수되기를 거부한다. 이 책은 ‘체제 밖‘에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저자의 삶과 학문, 문화 사회 등에 관한 짧지만 깊이 있는 글들을 담고 있다. 그 작은 형식마저 벗어던진 자유로운 사유를 통하여 그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글의 근원을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란 생각이다.

책을 펼쳐 속살을 보기 전에 눈길을 끌었던 글을 덧붙인다.

누가 요즘 무슨 책 읽느냐고 물어 봤을 때,'한글 엑셀 따라하기 읽는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 책을 우습게 봐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대개 그런 걸 책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들이 책으로 여기는 것들을 읽지 않아도 세상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세상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은 바로 세상과 책이 별 관계가 없다는 것에 대한 가장 틀림없는 증거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볼 때 책을 읽지 않고 살았던 시기가 훨씬 길었으며, 그런 사람의 숫자도 훨씬 많았다. 그러니 책을 읽어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고. 알찬 삶을 살 수 있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괜히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그러면 책은 왜 읽어야만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반드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 이 물음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뒤표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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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9-0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참 성실하게 잘 쓰시네요 ^^ 저도 이 책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강유원의 홈페이지에서 본 내용들도 있는데, 다시 읽어도 재밌습니다 "몸으로 하는 공부" 라는 제목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다 압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윤기가 건너는 강 - 내가 건너고 있으나 필경 다 건너지 못할 강에 대한 글 37꼭지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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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가 건너는 강>의 '패자부활, 혹은 불량인간의 위대한 탄생'편에서 불량인간으로 대표되는 사람은 국민가수 조용필이다. 단연 조용필을 두고 불량인간이라고 말한다. 나름의 이유로 이 불량인간편을 자주 찾아 읽는다.

"조용필을 인터뷰한 월간 잡지 신동아의 박윤석 기자는 조용필이 혼잣말하듯이 '딴따라가 불량인간으로 취급받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중얼거리더라. 면서 기자 자신의 심중소회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용필은 광복 이후 한국 가요계를 수놓은 대중 스타들. 그 숱한 불량인간의 반열 그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기타를 처음 잡은 그날 이후 최소한 70년대까지는 불량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도 전, 일찍이 그를 불량인간으로 규정한 것은 그의 부모였다.… '우리 가문에 딴따라는 없다'는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고려대 영문과에 원서를 보내기는 했지만 고사장으로 가는 대신 가출, 잠시 다닌 음악 학원 친구들과 아마추어 그룹을 만들어 파주 일대 기지촌 클럽 주변으로 흘러들었다. 이만하면 불량인간의 전형을 이루고도 남는다. <책 속에서>


불량인간 조용필에 관한 글을 일부러 찾아 읽는 날은 대부분 아이 문제로 착잡한 날이다.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 사회가 아이에게 모범인간으로 못 박아 규정하는 것, 그리고 내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 사회에 모범인간으로 발 딛고 살아가야 이른바 성공하였다는 평을 들을 것인데 사회에서 바라는 모범인간이기를 내 스스로 거부해버린 터에 모범인간을 어떻게 길러 낼 수 있을까. 제대로 된 모범인간과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 낸 모범인간, 불량인간과 사회의 지나친 규범이 만들어 낸 불량인간, 아이를 어떻게 키움이 제대로 된 그것인가? 내 아이는 장차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하는가? 언제든 아이편이 되어 아이를 믿어 줄 수 있을까?'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에, 잡스러운 생각으로 서성이는 시간에 일부러 찾아 읽는 글들이 이 산문집에 꽤 많다. 써지지 않는 글에 대한 상념,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과의 어정쩡한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무엇이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어정쩡할 때 이 책을 꺾어 들고 아무렇게나 읽어 버리기 일쑤다.

아무렇게나 읽다가 그냥 문득 털어버리고 다시 나의 시간들을 가곤 하는, 이 책에 대하여 나는 왜 이런 무작정이며 막연한 습관을 들였을까. 편안함일 것이다. 쉽고 친숙한 사람에게 생각 날 때 찾아가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돌아오는 것만으로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는 것처럼, 아무 때나 찾아 읽고 편안해지거나 무언가 지금 해야겠다는 자발적인 힘이 돋게 하는 책이지 아마.

'내가 건너고 있으나 필경 다 건너지 못할 강에 대한 글 37꼭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산문집은 전체적으로 농익은 저자의 글맛과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자의식을 높이 세우는 자존심 강한 글들이다.

첫 번째 '말의 강, 글의 강'에서 저자의 말과 글에 대한 살핌과 깊은 책임의식을 느낄 수 있다. 밑줄 그어둔 한 대목, 같이 생각하자는 의미에 덧붙여 보면.

…문제는 우리말인데 나는 우리말과의 씨름을 이렇게 하고 있다. 첫째는 사전과의 싸움이다. …사전을 열어야 말의 역사. 단어의 진화사가 보인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한다. …호치키스는 어떤가? 호치키스는 원래 기관총 상표명이다. 전쟁 끝나 기관총 잘 안 팔리니까 그 기관총 탄창에 총알 쟁여 넣는 기술을 원용해서 만든 것이 우리가 아는 호치키스다. 하지만 호치키스는 상표명이고 이 물건의 일반 명사는 '스태플러'다. 우리말로는 제책기라고 한다.

남의 번역을 시비하는 것은 되도록 삼가고 있지만 번역하는 사람이 사전 안 찾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뜻에서 하나만 시비한다. 나는 십수년 전 어떤 소설의 한국어 번역판에서 "그는 자기의 루거를 불태웠다"는 문장을 읽고 많이 웃었던 적이 있다. 원문을 확인 할 것도 없이 'He fired his Luger'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루거'는 독일제 9밀리 권총의 상표명이다. 따라서 그 문장의 정확한 번역은 "그는 권총을 쏘았다"가 맞다. <책 속에서>"


번역서 150여 권, 그리스 로마신화의 대명사. 이 산문집의 첫 번째 말의 강, 글의 강에 실린 글들은 이런 위치의 작가가 밥벌이의 무기랄 수 있는 말과 글에 대한 스스로 살핌과 함께 살핌의 글들이다. 번역이든, 자신의 순수 창작의 글이든 책임감을 가지고 번역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늘 들여다보는 거울을 같이 보는 그런 착각을 하며 수시로 들여다보는 글들이다.

두 번째 '풍속의 강, 세월의 강'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사유들인데 앞서 말한 불량인간에 대한 글도 두 번째 장에 있다. 책을 보면서 밑줄 긋기를 예사로 하다 보니 이 책에도 나의 밑줄 긋기는 어지간히 눈에 띈다. 20가지 주제마다 느끼는 것은 문제의식이다. 나 자신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혹은 타인과의 그 관계에 대하여.

사실 두 번째에서는 함께 생각할 공감의 글들이 많다. 정곡으로 찌르기보다는 예의 있게 말을 꺼내고 공감하고 같이 걸어가다가 은근슬쩍 툭~! 치며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절대로 아닌 거지.", "이럴 수야 없잖겠어." 이런 느낌의 글들이다.

지나친 형식에 의식화된 행사장에서 그 알아들을 수도 없고 쩡쩡 울리는 소리에 곤혹이었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가 종종 겪는 일이다. 학창 시절에 죽으라고 길게 이어지던 교장선생임의 뻔한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며 공감의 박수를 보냈었다. 손가락의 인류학이라는 글도 자주 보게 되는 글인데 문득 다시 펼쳐보니 이렇게 메모해 둔 글이 보인다."손가락? 나의 마음을 대신하여 키보드에서 오늘도 혹사당하는 손가락에 대하여 나도 좀 더 생각해보자" 이런 메모와 함께 밑줄 그어둔 부분을 소개하면,

"내가 여러 차례 지적해왔거니와 우리는 '다름'과 '틀림'을 혼용하는 기이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종교는 나와 틀려요 . '다르지' '틀리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나는 방향이 틀려요. '다를 뿐' '틀리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고, '틀리다'는 '옳다'의 반대말이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뜻인가? 나와 같지 않은 녀석은 '틀려먹은 녀석'이라는 것인가? 오늘부터라도 바로 쓰면 큰 병 하나 고치는 셈이 된다. <책 속에서> "

이 외에도, '굳은 살 이야기'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 내가 기도하지 않는 까닭' 등 많은 글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치부일망정 솔직히 인정하며 좀 더 깊은 인간의 길을 선택하는 글들이 참 좋다. 아무나 쉽게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유쾌하고 친숙한 글들에 잠시 빠져들다 보면 어정쩡하게 서성이는 시간들이 정리되는 이유가 아마 이건가 보다.

세 번째 '신화의 강, 문학의 강'은 저자의 신화작가로서 문학에 대한 얼마든지 더 깊어도 되는 문학에 대한 통찰과 사유인데 이제까지 다루었던 문학 소재의 인물들 그 함축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다시 만난 조르바는 오히려 더 반가웠다고 할까. 조르바나 니코스에 관한 글 외에도 그간 신화문학인으로서 이윤기의 깊은 사유를 볼 수 있는 글들은 다른 책으로 이미 만나졌던 인물들에게 더 깊은 애정을 갖게 한다.

이 산문집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6년간 수필 전문 월간지 <에세이>에 '이윤기가 건너는 강'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모태로 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런 저런 일간지에 기고했던 글을 보강하여 한 권 분량으로 묶은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작가들이 여기저기 연재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것에 대해 그리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는데, 글쎄?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면 작가의 이런 저런 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

말과 글이 막히는 날이면 이윤기의 산문집을 본다. <무지개와 프리즘> <어른의 학교>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그리고 이 책이다. 언뜻 미국에 오래 생활했던 만큼, 또한 서양문명의 대표랄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표하는 작가라서 '메이드인 유에스에이화?' 그러나 절대로 인스턴트식의 맛이 아니다. 적당히 제대로 참고 기다린 발효의 맛, 깊고 그윽한 그 발효의 맛이 늘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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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 독서법
안상헌 지음 / 북포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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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책은 두 번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작가에 의해서 한번은 독자에 의해서다"-안상헌의 <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5.자신만의 밑줄을 그어라' 중에서

'나는 어떤 독자인가. 좋은 책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가. 단지 책이 나에게 '좋은 책'이기만을 바라는 건 아닌가. 나의 책 읽기는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좋은 책을 거듭 나게 할 수 있는가. 나는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골수를 취할 수 있는가'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인터넷의 화려한 클릭을 격찬하며 종이책이란 이제 박물관에나 전시되고 말 유물 취급하며, 책을 끼고 사는 사람들을 시대를 거슬러 퇴행하는 사람쯤으로 안쓰러워했다. 그는 다시 의기양양하게 덧붙이기를 "학생들의 교과서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머잖아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선생님은 컴퓨터를 통하여 모니터로만 공부한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책읽기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으며 이제 책읽기는 더 높은 비중으로 점수와 연결되었다. 또한 '책을 위한 책들'이 최근 몇 년간 많이 나왔으며, 인터넷에서 폼 나고 똑 부러지게 글 쓰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책까지, 소비자(?)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나오는 책들 앞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거듭 탄성을 지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몇 년 새, 책은 참으로 다양해졌으며 개성이 뚜렷해졌다. 책을 위한 책들도 많이 보이고, 글을 쓰기 위한 책도 많이 나오며, 이런 인터넷 공간에서 공감의 애정으로 탄생한 책까지, 누구나 자기의 전공 분야에서 애정과 열정이 뒷받침되면 다시 책으로 만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의 수다스러움-사는 이야기나 개인 블로그의 일상 이야기- 그 속의 진솔까지도 애정이 깃들어 있다면 책이 될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우리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맘껏 향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안상헌의 <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미래를 위한 자기발전 독서법>은 책이 좋아 책을 늘 끼고 살며 책읽기에 전문적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읽기에 대한 여러 각도의 견해를 밝힌 글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책에 미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리고 책이 좋아서 책에 미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책과 사귀고 싶지만 막연히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책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그 길잡이라고 해도 좋겠다.

"책읽기, 그 내공을 쌓는데 훌륭한 길잡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가급이면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법, 가급이면 같은 책을 읽더라고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읽어 나가며 자기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 좋은 책을 읽었으면 나만의 글로 만들어 보는 것…. 말하자면 책에 미치더라도 제대로 미치자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잡기 중에서 책으로 시간 보냄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좀 더 적극적인 방식과 안목을 제시하여 주는 책이다.

고백하건대, 그간 책이라면 어지간히 달려들어 볶아대며-밑줄 긋고, 떠오르는 생각들도 수없이 적어가며, 이리 저리 끌고(? 들고)다니며- 보았음에도 나의 책 읽기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이 책 속에서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다른 책을 읽는 중에 곁들여 틈틈이 수시로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데 다시 보면 또 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결국은 절대로 책장에는 꽂아지지 못할 성 싶다.(가까운 곳에 두고두고 자주 보기를 희망하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모두 4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시하는 50가지 주제마다 달고 있는 부제가 좀 더 구체적인 책읽기 실천 방법이다. 그리고 각 장마다 저자의 독서노트가 들어 있는데 한 작품에 대한 짧지만 함축적인 메모에서 얻어지는 것들도 많다. 저자의 풍부하고 다양한 상식을 곁들인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쉽다.

혹자는 물을지도 모른다. "책읽기도 생산적이어야 할까? 그냥 좋으면 읽고 감동하고 말면 그만이지. 재미있으면 그걸로 된 것이지.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뭐가 될 것도 아니면서 그냥 일반 독자일 뿐인데 재밌으면 되는 거 아냐?…."

맞다. 책읽기는 그냥 우선 재미있어야 하며 읽는 동안 기분 좋고, 읽고나서 기분 좋으면 그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꼭 그럴까? 아니 가급이면 책을 읽으며 좀 남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자기만의 남다름을 이 책은 바라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 널려있는 정보는 무한하다. 이 책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몇 번이고 재탄생 할 수도 있고 묻혀버릴 수도 있다. 누구나 활용하기 나름일 것이다. 이 책은 뭐 거창하게 어떤 용어들을 쓰지도 않는다. 그냥 저자의 순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인데 왜 자꾸만 매력이 느껴지는 걸까? 선택하여 느끼는 사람의 몫으로 돌린다.

각 주제마다 곁들여 둔 독서노트도 꽤 쏠쏠하다. 나도 한때 보았던 책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책도 만난다. 저자보다 내 스스로 훨씬 멋있게 정의 내려버린 책도 만나며, 나는 이 생각을 왜 못했던가 싶어지고, 짧게 메모해 둔 노트에 감탄도 하고, 그러면서 역시 나는 책에 미쳐 사는 보람을 인생 최대의 행운으로 오늘도 자족한다. 그리하여 다시 들볶아대며 책을 만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책에 메모를 하거나 줄을 긋는 것이 책을 망치기라도 하는 양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룬다. 각자 개성이겠지만 책을 지나치게 소중하게 생각해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비싸고 좋은 술을 장식장에 진열만 해놓아서는 술의 진정한 맛을 음미할 수 없다. 꺼내서 마셔봐야 술맛을 느낄 수 있다." -책 속에서

저자의 말처럼 나에게 좋은 책이란 밑줄을 긋고, 다시 거듭 그어가며, 관련한 것이 생각나면 메모해 두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여백에 몇 줄 생각나는 안부 글이라도 적어보고… 일도 해야 하고 책도 마음에 맴돌고 일 하는 틈틈이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들볶아가면서 보는 책… 이런 책을 나는 좋은 책으로 생각한다.

이 책은 진즉에 나에게 속내를 들켰는데, 여전히 들볶아대기를 틈나는 대로 하고 있는 그런 책이다. 좋은 책이란 또한 수시로 펼쳐 들기를 희망하는 그런 책일 것이다. 문득 펼친 페이지에서 또 다른 것을 알게 하는 책… 펼칠 때마다 새로운 내용에 다시 밑줄을 긋고 그었다. 수많은 밑줄 긋기에서 자기 발전으로 가급 효율적으로 연결시키는 것, 무엇보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 활용법이 이 책 어딘가에 있었다. 앞으로 종종 펼쳐 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책이다.

문득 다시 펼쳐든 페이지는 '홀로서기 50'이라는 독서 노트다. 현재 국민연금관리공단 GS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며 기업 등에서 강의 중인 저자는 강의안을 만들거나 어떤 주제로 고민할 때 책을 참고삼는다고 한다. 어떤 일에나 자신만의 키워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책읽기에도 자신만의 키워드의 필요함을 강조한다. 자신만의 키워드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경험, 생각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책읽기를 혁신함이라.

"안상헌… '책 읽기는 자신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다'. 현실을 벗어난 공허한 메아리 같은 책읽기를 탈피하고 자신의 생활과 책읽기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가는 것이 그가 책을 읽는 이유다.-책표지 저자 소개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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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5-07-12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책이군요. 읽고 싶어지네요.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라 해도, 책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제대로 인터넷 활용하기' 같은 책도 나올테니...
 
사마천, 애덤 스미스의 뺨을 치다 21세기 역사 오디세이 1
오귀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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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꽉 차 있는 서점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직접 선을 보고 고르는 경우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책을 직접 못 보는 경우에는 인터넷 서점의 추천리뷰나 전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책을 선택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또한 인터넷 이런 저런 공간에서 필자였던 사람들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종종 묶어져 나오기도 하는데 이미 빠뜨리지 않고 읽다시피 했음에도 같은 글이 책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독자 되기를 즐겁게 자처하는 반가운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내게 그렇다.

오귀환 칼럼을 책으로 다시 만나다

2004년 1월부터 2005년 3월까지 <한겨레21>에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칼럼을 보강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검색하던 중에 나에게 걸려 든 칼럼이 오귀환의 칼럼 한 꼭지였다. 그것이 하필 이 책 <사마천, 애덤 스미스의 뺨을 치다>의 제목을 달고 있는 문제의 칼럼이었다.

어느 공간에서 만나든 반가운 사마천의,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모습을 보는 재미와 그 재미를 바탕으로 지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논하는 통찰에 감탄했는데, 다시 책으로 만나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할까.

이 책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건, 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건, 단순히 새로운 지식만을 찾으려 드는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줄만한 책이다. 한 권에 몇 권의 분량을 족히 담고 있다.

책 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20명의 역사적 인물들은 21세기와 과거,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다시 우리에게 좁혀 들어온다. "어? 이런 면이 있었나"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며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진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는, 일종의 우월감도 가졌었다.

이 책 속에서 만나는 사마천은, 제목에서처럼 서양경제 국부론의 주창자 애덤 스미스를 통쾌하게 앞지른다. 그것도 천년이나 앞서서 애덤 스미스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수요 공급의 법칙을 <화식열전>에서 주장해버렸다. "수요공급의 법칙을 사마천이 표절했나? 어? 그런데 사마천이 훨씬 먼저 사람 아닌가. 그럼 애덤 스미스가 사마천의 화식열전을 이미 읽었던 거야?" 이렇듯이 동서양을 넘나들고 역사를 넘나들며 저자와 함께 통쾌하게 뒤집어 본다.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이 한마디로 국부론 주창자 애덤 스미스를 무색하게 만드는 사마천이다. 다시 말한다. 이 책 속에서 만나지는 사마천의 경제관과 직업관은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과 거리감이 거의 없어 보인다. 옛날사람 사마천 맞는가.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길인 것이다."

놀랍다. 2100년 전에 사마천이 정의 내린 말이 맞는가, 싶을 만큼 오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우루과이 라운드를 내밀더니 칠레, 그리고 이번에는 또 무엇이랴. 무너질 대로 무너져버린 우리의 농사.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 언제 우리에게 농사가 근본이던 시절이 있었던가. 사마천이 이미 농사로 먹고 살기 힘듦을 2100년 전에 말하고 있나니. 이 책 속에 빠져 있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볼 수 있다. 뒤집어 보면서 역사와 시대를 상상으로 활개하며 다시 이어보는 생각들. 이 책의 매력이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최부자 이야기

불경기, 서민들의 흉년에 책 속에서 만나는 또 한 사람 최부자의 이야기는 다시 지금의 우리 현실을 비통하게 만든다.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맬 곳 없는 허리를 졸라매며 죽음까지 생각해야 하는 절망스런 상황이지만 부자들은 이때야말로 돈을 벌기에 최적이 된다. 대부분 부자들이 그렇다. 간혹 이 법칙을 깨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최부자가 그 감동스런 모델이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 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21세기 힘든 대한민국에 사는 어른이 동화처럼 이미 읽었던 최부자 이야기를 다시 대하는 것은 감동 그 이상이다. 벌어들인 이익 몇 할만 고작 내밀며 자사 홍보나 다른 목적이 있기 일쑤인 이 풍토에 최부자는 곳간을 아예 헐어버린다. 자물쇠를 열고 선심 쓰듯이 아니라 아예 곳간 자체를 헐어버리는 최부자.

서민경제의 구제책이라고 거창하게 내밀었던 끈을 잡아 보려던 사람들은 아마 알 것이다. 어린 시절에 호랑이에게 내밀었던 썩은 동아줄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문의 일화를 통하여 지금 나를 다시 생각하고 무디어지려는 내 의식을 깨운다. 또한 이 책의 매력이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 태우거라'…"

담보, 문서… 오늘 우리의 무엇들이 그 시절에도 있었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무엇들인가. 역사를 통하여, 열전을 통하여 우리는 결국 무엇을 얻으려 함인가. 열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 이미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머리말에서 고난에 대하여 제법 길게 말한 저자가 인생선배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이렇다.

"앞으로 자네들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될 거야. 선배나 친구의 조언도 좋지만, 깊은 밤 홀로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시게나."

역사인물들의 이면을 새롭게 해석

더 소개하면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서 신대륙을 발견하였던 명나라 제독 정화 함대 ▲울돌목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불의에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이순신 ▲난세를 치유했던 한민족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벤처창업의 동명성왕 ▲어떤 남자보다 용기 있는 유관순 ▲정복지의 백성 140만을 살린 야율초재 ▲인류 최초로 재테크를 성공시킨 요셉 ▲로스차일드 가문 ▲석가 ▲마호메트 ▲엘리자베스 여왕 등 독창적이고 남다른 시각으로 다시 만나는 역사 속 인물들은 또 다른 감동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알아야 할 인물들의 이면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살아갈 그 길을 연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핵심이랄 수 있는, 역사인물들의 새로운 면을 새롭게 해석한다.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며,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난 시대부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지금 논쟁 중이며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들을 21세기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저자만의 특이한 시선으로 다양한 방법과 해석을 이끈다.

7부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30여컷의 일러스트나 사진 등은 보는 즐거움까지 더하며, 각 장마다 끝에 색다른 발상 전환의 박스글로 읽는 사람들에게 불로소득 같은 것도 더해준다. '온+오프 항해지도'는 중고생과 대학생 이상의 독자가 더 읽을만한 특별한 자료들이다.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글 흐름, 또 다른 지식의 항해가 가능한 세심한 자료 제시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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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사랑 2005-07-14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알라딘에도 이 리뷰를 올려주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장 읽어봐야 겠어요^^
 
대지의 수호자 잡초
조셉 코케이너 지음, 양금철.구자옥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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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지금도 버려지고 있는 이른 봄의 수많은 잡초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여름, 잡초가 무성한 여름 잡초 밭은 보호막과 먹이를 제공하는 동물들의 가장 이상적인 은신처가 된다. 가을, 일찍 발견돼 뽑혀져 나가지 않기 위해 잡초들은 대개 농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란다. 겨울, 잡초가 자라는 땅은 일찍 따뜻해진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사슴은 잡초 밭으로 몸을 숨긴다 - <대지의 수호자 잡초> 서문 중

내가 어릴 적엔 돼지감자가 있었다. 추수가 끝난 빈들의 언덕배기나 밭 울타리 가에 있는 멀대같은 줄기를 걷어내면 땅 속에서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돼지감자가 쏟아져 나왔다. 아삭 아삭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에 잠시 흥분했다가 다시 잊고 말았지만 이듬해 11월, 다시 찾은 그곳에선 어김없이 돼지감자가 쏟아져 나왔다. 돼지감자는 특별하게 가꾸지 않고 버려지다시피한 잡초일 뿐인데 늘 반가운 모습으로 아삭하고 달콤한 맛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이 돼지감자를 작물로 재배하였다면 지금 우리들은 돼지감자를 잡초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즐기는 만큼 현대인들의 당뇨수치도 낮았으리라. 시금치 대신 민들레를 작물로 재배하였다면 인간의 위는 좀 더 편안하여 위암으로 인한 사망의 기록도 줄었으리라(돼지감자는 당뇨병에 좋다. 최근 얼마 전 천연 인슐린이란 별칭으로 일본 학회에서 그 효능을 입증, 발표했다. 민들레는 위에 좋을 뿐더러 다른 약효로 뿌리부터 꽃까지, 홀씨를 제외한 전체를 약으로 쓴다고 한다).

제발 잡초를 하찮고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잡초는 생태계의 한 존재로서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 있으며, '쓸모 있음'에 의해 선택받아 재배되고 있는 작물 못지않게 우수한 먹을거리며 아주 유용한 약초다. 또 잡초는 황폐한 토양의 개척자이자 모성식물로서 오늘도 오염된 토양을 묵묵히 바꾸어간다.

이 책은 잡초 이야기다. '제 자리를 벗어나 자라는 모든 식물'이란 개념으로 우리들이 하찮게 여기고, 우리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작물을 위하여 뽑아내는 천덕꾸러기 잡초를 칭송하기 위해 씌어진 책이다. 1940년대에, 씌어진 책이지만 시대적인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환경학과 생물학을 평생 연구하였던 저자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잡초들이 자라날 수 없는 위기의 환경과 토양의 척박이 염려되어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 책은 세계에서 최초로 잡초의 이용을 옹호한 선구적인 저작물로 이미 유명하다.

잡초를 뽑아내야만 하는 하찮고 버려진 것, 쓸모없는 것으로 알고 성장하던 소년에게 어느 날 솔 벤슨이 들려주는 옥수수 밭의 쇠비름 이야기는 이후 조셉 코케이너가 50년 동안 잡초와 토양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물보호를 위하여 뽑아내던 쇠비름과 옥수수의 관계를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는 솔 벤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실히 옥수수가 자라는 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쇠비름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벤슨 아저씨,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하지만 잡초가 가축사료나 야채요리 말고는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아요."

"나도 알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무지하거나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야."

순간 나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무엇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구의 모양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류에 빠졌다면, 잡초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했다. 쇠비름이 옥수수가 자라는데 도움을 준 자는 사실은 대부분의 현상들을 받아들이는데 기지가 넘쳤던 솔 벤슨의 몫이었다!


우리에게 유익한 콩도 처음에는 잡초였다. 콩을 발견한 탐험대가 넝쿨 무성한 콩 옆을 스쳤다 하더라도 마침 꼬투리 없는 콩이었다면 선택받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들의 돼지감자처럼 잊혀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 인간들이 식물에 들이댄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선택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잡초에서 작물이 되어 인간에게 유익한 콩의 발견, 그 역사를 보자.

여러 날을 헤매던 어느 날 탐험대는 우연히 끝도 안 보이게 높이 자란 넝쿨 식물을 발견하였다. 그 식물에는 아주 탐스러운 열매로 채워진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고심 끝에 그들은 제비뽑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매를 먹어 볼 희생자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콩이 발견되었다. - 책 본문 중

요즘에는, 친환경적인 농사를 도모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들은 봄이면 한해 농사를 앞둔 논에 자운영 같은 사료작물로 인정받은 잡초를 끌어들여 땅을 비옥하게 한다. 옛날에는 시골마을마다 일손이 잠시 쉬는 한여름에 퇴비 만들기 공동작업을 했다. 산과 들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를 베어서 쌓은 뒤 거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손쉽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비료로 대체되면서 땅은 척박해지고, 자라나는 작물은 면역력이 약해져서 농약사용량이 늘었다. 그래도 비집고 뿌리를 깊숙이 내려 보란 듯이 자라나는 것은 잡초다.

동의보감 같은 책이나 민간요법을 보면 산야에 자라는 대부분의 풀들이 약으로 사용되고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관심을 두고 보면 지천에 널려 있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훌륭한 먹을거리다. 다만 우리가 이미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맛나게 먹고 있는 모든 야채나 과일도 선택받아 재배되기 전에는 널려 있는 잡초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우리의 주식인 쌀이나 빵의 주재료인 밀도 마찬가지다.

조셉 코케이너는 50년 동안 생물학과 환경 보존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잡초가 생태와 환경뿐 아니라 농작물에게도 이롭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에 따르면 잡초는 토양의 상태를 알아보는 지표이며, 모성작물로서, 혹은 초지개척자로서 잡초는 유능한 토양의 일꾼이며 작물의 친구다. 이 책을 통하여 만나지는 잡초의 우수성과 이용가치는 놀라울 정도다. 이 책의 목적은 이렇다.

저자는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시금치나 요리된 야채들에 비하여 흰 명아주가 결코 덜하지 않게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코케이너 교수는 잡초가 농장이나 정원을 무성하게 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선구적 역할은 잡초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정상적인 생태학이고, 또한 토양을 잘 보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농부나 정원사에게 진정한 이익을 증명하는데 있다. - 서문 중

농사와는 무관하게 다만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면 수없이 거론되는 잡초들의 쓰임새에 대하여 놀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 먹을거리로써 가치에 놀랄 것이다. 이 책엔 먹을거리와 약재로 쓰이는 잡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최근 몇 년간, 산야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몇 해 전에 많이 읽혀진 <야생초편지> <잡초는 없다> <산야초 이야기> 등이 잡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이런 책에 관심을 두었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더 깊은 근본적인 안목을 트여주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어제까지 무심하게 자라던 잡초들이 좀 더 근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젠 잡초를 다만 하찮고 쓸모없어서 버려진 존재들로만 생각하지 말자.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훌륭한 존재들이다. 사람이 판단하는 쓸모 있고 없음에 얽매일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우주를 품고 있는 생태계의 한 일원이다.

약간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장미는 지금도 찔레순에서 얻어내며, 달고 맛난 감은 고염에서 얻어진다. 포도 또한 머루에서 얻어진다. 생약성분의 많은 약들은 잡초에서 얻는다.

쓸모없음, 버려진 것들, 하찮은 존재들, 작물의 성장을 막는 방해꾼 등등 잡초에 대한 이런 생각을 이젠 버려야 한다. 그 생각을 버리는 데 이 책은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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