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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꽉 차 있는 서점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직접 선을 보고 고르는 경우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책을 직접 못 보는 경우에는 인터넷 서점의 추천리뷰나 전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책을 선택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또한 인터넷 이런 저런 공간에서 필자였던 사람들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종종 묶어져 나오기도 하는데 이미 빠뜨리지 않고 읽다시피 했음에도 같은 글이 책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독자 되기를 즐겁게 자처하는 반가운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내게 그렇다.
오귀환 칼럼을 책으로 다시 만나다
2004년 1월부터 2005년 3월까지 <한겨레21>에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칼럼을 보강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검색하던 중에 나에게 걸려 든 칼럼이 오귀환의 칼럼 한 꼭지였다. 그것이 하필 이 책 <사마천, 애덤 스미스의 뺨을 치다>의 제목을 달고 있는 문제의 칼럼이었다.
어느 공간에서 만나든 반가운 사마천의,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모습을 보는 재미와 그 재미를 바탕으로 지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논하는 통찰에 감탄했는데, 다시 책으로 만나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할까.
이 책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건, 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건, 단순히 새로운 지식만을 찾으려 드는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줄만한 책이다. 한 권에 몇 권의 분량을 족히 담고 있다.
책 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20명의 역사적 인물들은 21세기와 과거,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다시 우리에게 좁혀 들어온다. "어? 이런 면이 있었나"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며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진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는, 일종의 우월감도 가졌었다.
이 책 속에서 만나는 사마천은, 제목에서처럼 서양경제 국부론의 주창자 애덤 스미스를 통쾌하게 앞지른다. 그것도 천년이나 앞서서 애덤 스미스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수요 공급의 법칙을 <화식열전>에서 주장해버렸다. "수요공급의 법칙을 사마천이 표절했나? 어? 그런데 사마천이 훨씬 먼저 사람 아닌가. 그럼 애덤 스미스가 사마천의 화식열전을 이미 읽었던 거야?" 이렇듯이 동서양을 넘나들고 역사를 넘나들며 저자와 함께 통쾌하게 뒤집어 본다.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이 한마디로 국부론 주창자 애덤 스미스를 무색하게 만드는 사마천이다. 다시 말한다. 이 책 속에서 만나지는 사마천의 경제관과 직업관은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과 거리감이 거의 없어 보인다. 옛날사람 사마천 맞는가.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길인 것이다."
놀랍다. 2100년 전에 사마천이 정의 내린 말이 맞는가, 싶을 만큼 오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우루과이 라운드를 내밀더니 칠레, 그리고 이번에는 또 무엇이랴. 무너질 대로 무너져버린 우리의 농사.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 언제 우리에게 농사가 근본이던 시절이 있었던가. 사마천이 이미 농사로 먹고 살기 힘듦을 2100년 전에 말하고 있나니. 이 책 속에 빠져 있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볼 수 있다. 뒤집어 보면서 역사와 시대를 상상으로 활개하며 다시 이어보는 생각들. 이 책의 매력이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최부자 이야기
불경기, 서민들의 흉년에 책 속에서 만나는 또 한 사람 최부자의 이야기는 다시 지금의 우리 현실을 비통하게 만든다.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맬 곳 없는 허리를 졸라매며 죽음까지 생각해야 하는 절망스런 상황이지만 부자들은 이때야말로 돈을 벌기에 최적이 된다. 대부분 부자들이 그렇다. 간혹 이 법칙을 깨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최부자가 그 감동스런 모델이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 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21세기 힘든 대한민국에 사는 어른이 동화처럼 이미 읽었던 최부자 이야기를 다시 대하는 것은 감동 그 이상이다. 벌어들인 이익 몇 할만 고작 내밀며 자사 홍보나 다른 목적이 있기 일쑤인 이 풍토에 최부자는 곳간을 아예 헐어버린다. 자물쇠를 열고 선심 쓰듯이 아니라 아예 곳간 자체를 헐어버리는 최부자.
서민경제의 구제책이라고 거창하게 내밀었던 끈을 잡아 보려던 사람들은 아마 알 것이다. 어린 시절에 호랑이에게 내밀었던 썩은 동아줄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문의 일화를 통하여 지금 나를 다시 생각하고 무디어지려는 내 의식을 깨운다. 또한 이 책의 매력이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 태우거라'…"
담보, 문서… 오늘 우리의 무엇들이 그 시절에도 있었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무엇들인가. 역사를 통하여, 열전을 통하여 우리는 결국 무엇을 얻으려 함인가. 열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 이미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머리말에서 고난에 대하여 제법 길게 말한 저자가 인생선배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이렇다.
"앞으로 자네들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될 거야. 선배나 친구의 조언도 좋지만, 깊은 밤 홀로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시게나."
역사인물들의 이면을 새롭게 해석
더 소개하면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서 신대륙을 발견하였던 명나라 제독 정화 함대 ▲울돌목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불의에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이순신 ▲난세를 치유했던 한민족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벤처창업의 동명성왕 ▲어떤 남자보다 용기 있는 유관순 ▲정복지의 백성 140만을 살린 야율초재 ▲인류 최초로 재테크를 성공시킨 요셉 ▲로스차일드 가문 ▲석가 ▲마호메트 ▲엘리자베스 여왕 등 독창적이고 남다른 시각으로 다시 만나는 역사 속 인물들은 또 다른 감동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알아야 할 인물들의 이면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살아갈 그 길을 연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핵심이랄 수 있는, 역사인물들의 새로운 면을 새롭게 해석한다.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며,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난 시대부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지금 논쟁 중이며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들을 21세기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저자만의 특이한 시선으로 다양한 방법과 해석을 이끈다.
7부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30여컷의 일러스트나 사진 등은 보는 즐거움까지 더하며, 각 장마다 끝에 색다른 발상 전환의 박스글로 읽는 사람들에게 불로소득 같은 것도 더해준다. '온+오프 항해지도'는 중고생과 대학생 이상의 독자가 더 읽을만한 특별한 자료들이다.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글 흐름, 또 다른 지식의 항해가 가능한 세심한 자료 제시가 맘에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