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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색의 문화사 - 혁명의 색 빨강부터 이슬람의 녹색까지 세계를 지배한 색 이야기
21세기연구회 지음, 정란희 옮김 / 예담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피를 빨아먹은 벼룩의 색이 정말 있다고?
"피를 빨아먹은 벼룩의 색은?" 이렇게 물으면 생뚱맞다고 할까? 그런데 사실 벼룩색이 있다. 피를 빨아 먹은 벼룩색은 물론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색이 정식으로 등록된 후 한때 한 사회의 유행과 선망의 색이었다. 벼룩의 색 퓨스(puce)를 좀 더 알아보면 이렇다.
근세 초기까지 왕후의 화려한 치장 뒤로는 벼룩으로 고생한 역사가 있었다. 폭 넓고 주름이 많아 풍성한 왕후나 귀부인들의 드레스 속에서도 벼룩은 기승을 부렸다. 신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며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들은 속으로는 끊임없이 벼룩과 치열한 전쟁을 은밀히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벼룩과의 전쟁이 오죽했으면 드레스 속에 벼룩을 잡는 기구를 밀어 넣는 부인들이 있었을까. 귀부인들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벼룩과의 전쟁이 치열했던 만큼 사람들은 피를 빨아 먹기 전의 벼룩과 피를 빨아 먹은 후의 벼룩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피를 빨아 먹기 전 벼룩의 색과 피를 빨아 먹은 후의 벼룩색은 분명 달랐다.
14세기가 되자 프랑스에서 퓨스(puce; 벼룩)라는 새로운 색이 탄생하였다. 사람들은 일상의 큰 골칫거리인 벼룩의 모습을 색에 담아 보는 것으로 벼룩으로 인한 짜증스러움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퓨스, 이 색은 피를 빨아 먹은 후의 벼룩색깔로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적갈색이며, 영어에도 같은 말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많은 색을 탄생시켰고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리 앙뜨와네뜨의 모든 것은 곧 유행이 되었다. 14세기에 생겨난 퓨스가 18세기에 마리 앙뜨와네뜨에 의해 급속히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왕비가 옷을 맞출 때마다 '벼룩의 배' '빨간 얼굴의 벼룩' 같은 색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발표한 색들마다 대대적인 유행을 몰고 다녔다.
황태자의 똥(caca dauphin), 솔개의 똥(merde d' ore), 런던의 쓰레기, 슬픈 여자들, 독을 마신 원숭이, 멋쟁이의 내장, 변비 색, 천연두, 살아 돌아 온 죽은 자, 비구니의 아랫배…. 피를 빨아 먹은 벼룩색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던 당시의 색 이름들이 재밌다. 이렇게 색은 그 사회를 표현해주기도 한다.
재미있고 놀라운 색의 숨겨진 이야기들
<하룻밤에 읽는 색의 문화사>의 제일 마지막 장 '세계를 지배한 색, 그 뒷이야기' 편에 보면 벼룩색은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여러 편 보인다.
내세를 믿은 이집트인들은 3000년 동안 수많은 미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미라는 아주 희귀하여 박물관에서나 전시될 정도다. 중세에는 미라의 가루가 머미(mummy)라는 색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때문에 미라를 분말로 만들어 팔아먹는 안료업자가 있었다. 또한 미라가루를 만병통치약으로 팔아먹었는데, 이런 행위는 300여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나 황제의 색을 언뜻 금빛으로만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 책을 통하여 중국황제의 자금성이나, 로마황제의 상징을 통하여 다시 보는 '자주색'이 새롭다고 할까. 스페인의 붉은 염색과 관련한 이야기, 다양한 낙타색, 오셀로, 퍼플 하트 부대의 전설 등 알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으스대며 들려줄 수 있는 의외의 이야기들이 재밌다.
색을 통하여 알아가는 수많은 호기심 코드
<하룻밤에 읽는 색의 문화사>는 제목처럼 '한두 시간 집중하여 넘기다보면 책 한 권 쉽게 읽을 수 있다더라' 하는 그런 책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한번 읽고 난 후에 필요에 의해 여러 차례 펼쳐 보게 될 책에 속한다. 색과 관련한 일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이 많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정한 제목이지 않을까?
다시 몇 번을 펼쳐보며 참고하면 유용할 책이다. 가령 2편에서는 국기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 관한 이야기인데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면 저마다의 국기들이 상징하는 것이 궁금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때 국기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을 담고 있는 이런 책은 속 시원히 그 궁금함을 풀 것이다(2장 국기 이야기).
종교적인 색도 제법 다양하지 않은가. 크리스마스에 문득 궁금한 산타클로스라면 이 책에서 이미 보았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날 것이다. 다시 펼쳐 보면서 '어?,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에서 비롯되었다고?' 이렇게 특정한 순간에 관련한 색에 대해 궁금할 때마다 이 책을 펼쳐 보면 궁금함이 어느 정도 풀린다고 할까(3장 성서이야기).
빨강, 파랑, 노랑, 하양과 검정…. 색의 우두머리랄 수 있는 이런 색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들어 있을까? 같은 색이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부를 상징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불온하다. 색 하나로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여 그 민족을 융합시키기도 한다. 색마다 상징하는 것들은 저마다 다르다. 어떻게 그런 상징적인 색이 되었는가? 색 하나에 왜 그리 집착하는가?
색을 통하여 보는 세계 여러 나라의 사회나 역사적 이야기들이 색다르고 재밌다. 색에 이렇게 많은 코드가 숨어 있었다니 놀랍다. 전체적으로 9가지 주제를 정하여 색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부록으로 덧붙인 '색의 소사전'도 유용하고 재미있다. '색에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가 있었다니'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된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접하고 목록에서 '피를 빨아 먹은 벼룩의 색은?'이라는 소제목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선뜻 선택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책을 선택하여 얻어진 것이 의외로 많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벼룩의 무한의 그 방향처럼… 두고두고 몇 번을 펼쳐볼까.
손에서 놓기가 아쉬운 책이다. 그러고 보니 '피를 빨아먹은 벼룩의 색 적갈색'이 유행하기 좋은 그런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