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신호경 기자= 박 모(49)씨와 그 가족의 삶에서 외환위기는 '내리막'의 시작이었다.
광주 출신의 박 씨는 1980년대 중반 H상사에서 10여년간 일하며 영업관리팀장으로 자리를 잡고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정을 일궜다. 그러나 H상사는 외환위기 당시에 부도를 맞았고, 결국 박 씨도 일자리를 잃었다. 잠시 친구가 경영하는 중소 건설회사에서 자금.영업관리를 맡았으나 이 회사 역시 환란의 파고에 문을 닫았다.
1999년 광주로 귀향한 박 씨는 전산업무 경력만 믿고 명예퇴직금으로 PC수리점을 열었다. 당시 체인형 PC수리점은 많은 퇴직자들이 뛰어들어 소액 창업의 주류를 이뤘던 업종이었다. 그만큼 비슷한 가게들이 넘쳐났고, 박 씨는 2년도 채 되지않아 사업을 접었다.
설상가상으로 박 씨는 지난 200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거동조차 힘든 상태다. 현재 연로한 양친까지 6명의 박 씨 가족은 부인이 학생 과외로 벌어오는 수입에 의존, 10여평의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결국 불과 10년 사이 박 씨 가족은 안정된 중산층에서 생활고에 찌든 빈곤층으로 내려앉았다. 이런 중산층의 몰락은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양극화의 병이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양극화는 내수침체 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 사회적 갈등 등을 복합적으로 초래한다. 따라서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양극화 문제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소득 양극화 갈수록 확대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외환위기 이후 발생했던 소득격차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통계청 도시가계수지 자료를 분석해보면, 시장소득 기준 상대빈곤율(중위소득의 50%가 안되는 가구소속 인구의 비율)은 작년에 16.42%로 전년의 15.97%에 비해 0.45%포인트 올라갔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래 이렇게 높은 수치가 나온 적은 없었다.
연도별로는 1999년 15.01%, 2000년 13.51%, 2001년 14.10%, 2002년 13.63%, 2003년 14.88%, 2004년 15.97% 등이었다. 수치는 외환위기 이후 다소 떨어지다 2003년부터 다시 올라가고 있다.
시장소득은 경상소득에서 공적이전소득(정부보조 등)을 제외한 것으로 가구원이 직접 시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말한다.
작년에 시장소득 기준 5분위 배율은 6.95배로 전년의 6.77배보다 높아졌다. 연도별로는 1999년 6.80배, 2000년 6.03배, 2001년 6.30배, 2002년 6.17배, 2003년 6.41배, 2004년 6.61배 등이었다. 2003년부터 4년 연속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소득 불균등 현상이 대물림될 가능성이 높다는데 있다. 사교육비의 지출규모에 따라 학생 개인의 학업성적, 대학입시 등과 이에 따른 미래 예상소득이 결정되는 현상이 벌써 뚜렷하다.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면 소득 양극화는 확대 재생산되면서 더욱 심각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아울러 양극화는 소득 뿐 아니라 대기업-중소기업, 수출기업-내수기업, 정보기술기업-전통기업 등 산업부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양극화 왜 심화되나
소득양극화는 외환위기 이후 개방과 경쟁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분야는 계속 번창하지만 경쟁력없는 분야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됐다.
그동안 저임금을 경쟁력으로 삼았던 국내기업은 중국.인도 등의 저가공세를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한국이 보유한 상당수의 기술도 이들 나라에 의해 잇따라 추월당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질적으로 달라진 고용 시스템도 양극화의 골을 깊게 했다. 환란 이후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끌어올려야 했고 이는 능력 위주의 미국식 고용 체계 수용으로 이어졌다. 이는 같은 기업과 업종내에서의 소득격차를 가져왔다.
또 기업들은 단기계약제, 파견근로제, 인턴십 등 비정규 근로 인력을 선호하면서 고용과 소득이 불안한 취약 근로계층이 양산됐다.
반면 해고되는 것은 쉬워도 다시 취업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경제와 산업의 전문화, 지식화 추세가 심화되면서 실직 근로자가 다른 분야의 전문성을 습득해 좋은 직장으로 옮기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자영업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는 공급과잉과 소득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송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모든 현상의 기저에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도입된 개방, 경쟁 중심의 철학이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 양극화, 왜 문제인가
소득양극화는 경제의 성장동력을 떨어트린다. 일반적으로 내수는 고소득층보다는 중산층 이하가 만들어낸다. 고소득층은 해외에서 소비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산층이 붕괴되고 저소득층이 많아진다면 당연히 내수부진이 지속되면서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정책에서도 균형이 잡히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정부나 정치권은 대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책이 흔들리면서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인 전략하에서 국가의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정책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국가경쟁력의 핵심요인인 인적자산에도 이상이 나타난다. 조용순 LG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교육기회가 균등해야 경쟁력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사회의 역동성이 유지된다"면서 "소득양극화가 대물림되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회불안에 따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손민중 연구원은 "소득양극화는 하위층으로 전락한 사람이 많아지는데 따른 현상"이라면서 "이는 갈등, 범죄, 이혼 등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일으킨다"고 밝혔다.
◇ 적극적 노동.교육 정책 펼쳐야
양극화 대책의 기본은 탄탄한 경제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만으로 양극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능력이 없으면 일자리가 생겨도 취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른 교육 기회를 줘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양극화 관련 교육 정책으로는 미국이 64년 '대(對)빈곤 전쟁'의 일환으로 도입해 유지하고 있는 '헤드 스타트(Head Start)'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일정 소득이하 빈곤층 및 이민자, 이혼가정 등 사회취약계층의 아동을 대상으로 기초적 교육과 발육.영양상태 점검, 가정환경 실태 파악 등의 포괄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산업 및 기업의 구조적 양극화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 대기업 위주로 추진되고 있는 차세대 성장동력 발굴 사업에 중하위권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적극 참여시켜야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상완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10년간 정부가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해 노력했고, 이는 올바른 선택이지만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정확히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문제 등이 나타났다"며 "때문에 양극화 해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성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http://news.media.daum.net/society/others/200711/04/yonhap/v18718832.html?_RIGHT_COMM=R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