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첫 인디아나 존스는 2편인데 87년 내 생일에 비디오로 빌려 본 기억이 생생하다. 꽤 재밌어서 한 번 더 보고 비디오 가게에 돌려 줬다. 3편은 극장 개봉했을 때 조조로 가서 싼 값에 엄마랑 같이 본 기억이 나는데 동생은 없었던 거 같다. 여름방학인지 겨울방학인지 방학  때였던 게 기억난다. 아마 동생이 어디 캠프라도 가고 없었던 거 같다. 1편은 80년대 말쯤 텔레비전에서 해 준 걸 본 게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몇 번씩 텔레비전을 통해 만났지만 여전히 재밌다.

뉴질랜드에선 5월22일 극장 개봉을 앞두고 5월 3일,10일,17일 토요일날마다 한 편씩 또 내보내 준다. 오늘 1편을 다시 봤는데 재밌었다. 다만 예전엔 안 보이던 제3세계 깔보는 듯한 대사랑 시선을 느꼈는데 그런 걸 감안해도 재미는 있다. 1편은 잘 나가다 맨 마지막 성궤를 열고 나서 나치들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내가 줄거리를 써도 인디아나 혼자 그 많은 나치들을 다 물리치는 법을 생각해 낼 수 없으므로 봐 줘야지. 한 가지 예전에 모르던 걸 하나 더 알게 됐는데 이집트에서 인디아나 존스를 돕는 사람으로 나오는 배우가 바로 반지 제왕 김리 역을 맡았던 그 배우였다. 그러고 보니 이 배우 제임스 클라벨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미니씨리즈 쇼군이랑 노블하우스에서도 나왔었다. 이름이 John Rhys-Davies 라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공지영 책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다.

장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즐거운 나의 집 세 권을 읽어 봤을 뿐이고 중단편은 이런 저런 문학상 수상소설집에 후보작으로 오른 거랑 단편소설집 하나 모두 더해서 한 13편 더하기 빼기 한 편 쯤 읽은 거 같다. 그렇다. 실토한다. 아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착한 여자도 안 읽었다!

결론부터 말해서 공지영은 나랑은 안 맞는다. 아직까지는.

장편 셋은 작가에겐 몹시 미안하게도 그다지 재미도 감동도 느낄 수 없었고 중단편들도 그냥 그랬다. 운동권 후일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안타까움과 딱함을 느끼긴 했지만 큰 재미나 감동을 안겨 주진 못해서 한 번 읽고 난 다음 다시 찾아 읽게 하지는 못했다. 참고로 나는 좋아하는 작품을 꽤 많이 읽는 편이다. 말하자면 편식이 심하고 그렇게 넓게 읽지는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작품은 읽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내용마저도 흐릿해져 버리는 일도 많다. 재밌게 읽거나 감동하며 읽은 작품들은 반대로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생생히 기억하는 일이 많다.

딱 한 작품이 내 기억에 생생히 남고 몇 번 읽었다. 바로 현대문학에서 나온 95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소설에 실린 광기의 역사인데 이건 아주 재밌게 또 감동하며 읽었다. 내 학창시절이 생각나서 감정이입이 팍팍 잘 됐기에. 어쩌면 내가 78년생 남자가 아니라 68년생 여자라면 다른 작품들도 아주 열광하며 읽었을지도. 언제 기회가 닿으면 아직 읽지 않은 공지영 책들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아직까지는 광기의 역사 하나로 기억되는 작가지만 나머지 작품 가운데 내 맘에 드는 게 있을 수도 모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좋은 친구들 SE [워너 9월 11900원 할인전]
워너브라더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이 얘기는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냥 평범하게 살기 싫었던 화려하고 멋진 삶을 열망하던 주인공 헨리는 부와 권력을 약속하는 범죄에 빠져들어서 신나고 화끈하게 산다. 헨리 주위에는 그런 헨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특한 아내 카렌과 범죄동료들인 지미와 토미가 있다. 또 범죄의 길을 안내해 주는 보쓰 폴리도.
헨리에게는 아쉽게도 꽃도 영원히 아름다울 수 없고 좋은 날씨만 이어질 순 없는 법.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점점 규모가 커진 그들의 범죄행위는 그들이 쉽게 구워삶을 수 있던 동네 경찰의 손을 떠나 에프비아이 쪽으로 넘어가고 파국이 다가온다.
결국 헨리는 폴리와 지미를 고자질해서 살아남는다. 토미는 라이벌 갱들 손에 죽는다.
삶의 씁쓸함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사로운 봄날, 가지각색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눈물난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름답고 풍요롭고 낭만적인 풍경
일 뿐이어서, [아 정말로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 ] 하는
식의 감탄사 섞인 한마디를 내뱉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꽃들
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이 다만 자연의 아름답고 평화롭고 신
비로운 섭리 때문이 아니라, 결국 치열한 생존경쟁을 위한 <사랑
뺏기> 싸움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저
절로 숙연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지니는
무서우리만치 처절한 고독감을 실감케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종족보존>과 <개체보존>,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치열한 삶의 투쟁을 벌인다. 무엇이든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어야
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극한적인 경우에 어떤 동물들
은 자기 자식이나 어버이를 잡아먹기까지 한다. 바로 개체보존의
본능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죽더라도 씨를 남겨 자손을 번식시키
겠다는 욕구 때문에 벌이게 되는 치열한 사랑뺏기 싸움은 바로 종
족보존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봄철에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것은 이 종족보존의 욕구를 충
족시키기 위한 자웅의 결합을 목적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와
꿀로써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 함이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하여
그러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꽃나무들은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려고 갖은 애를 써가며 [날 좀 봐 줘요, 날 좀 사랑해 줘요]
하고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는 셈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본능>, 이보다 더 큰 욕구가 있을 수 있을까.
식욕의 충족에 기여하는 식물의 <열매>라는 것이, 결국 자웅교배
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개체보존의 본
능보다 종족보존의 본능이 우선이요, 종족보존욕구의 결과인 <사
랑받고자 하는 본능>은 가히 처절하리만큼 잔혹하고 매몰찬 성격
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을 말할 때면 <사랑은 주는 것>이라느니 해
가며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 누군가에게 헌신적으로 바치는 사
랑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물론 환상과 동경에 가득 차서 들뜬
마음으로 시작한 사랑이 권태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무자비한 싸움
과 저주 끝에 헤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완(未完)의 사랑>이
아름답다 아니, 더 나아가 아예 상대방과 사랑의 상호교환을 염두
에 두지 않는 <짝사랑>이 장미빛 순정을 지속시키기엔 더 어울릴
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문학작품들 가운데는 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어디론가 떠나가 버려 영영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영화로 더 유명한 <나의 청춘 마리안느>나 독
일 낭만주의 작가 테오도어 슈토름의 [호반(湖畔)]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인생을 살아나가다 보면 그렇게 <주기만
하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설사 그런 사
랑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사심 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려면 먼저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아 본 체험이 있어야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무조건 주기만 하
는 <내리사랑>을 베푸는 경우가 바로 좋은 예가 된다.
일반적으로 <모성애)란 어떤 여성에게나 당연히 있는 것으로 알
려져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 요즘도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고, 남편이 싫어지면 자식을 버리고 가출해
버리는 유부녀도 많다. 또 자식을 남 보란 듯이 잘 키우기는 키운
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리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엄마
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겉보기엔 가문 좋고 학벌 좋은
집안의 자식들이, 외형상으로는 의젓하게 성장한 후에도 잠재의식
깊숙히 자리잡은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과 사회윤리가 강요하는
<당위적 효도>의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며 정신적으로 황
폐한 삶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요즘도 남자가 결혼을 할 때가 되면, [좋은 아내를 맞으려면 먼
저 장모를 보고 나서 결정하라]는 말을 주위에서 하는데, 그 말은
확실히 옳은 말이다.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여자
는 역시 남편이나 자식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는 여자가 되기 쉽
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은 자식에게 뿐만이 아니라 남편(모든 남
자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역시 <애기>이다)에게까지도 포근
하고 따뜻한 내리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행복한
가정생활이 유지되고 나아가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사랑과 평등에
기초하는 행복한 삶이 보편화될 수 있다.

어린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야 한다는 것, 만약에 그
것이 안 되면 사춘기나 20세 전후의 나이에라도 이성에게서 충분
히 사랑의 공급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사랑을 받
느냐 못받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심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나는 나의 어머니의 경우를 통해서 더 확실
히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8.15 해방과 6.25동란 등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한창
때의 나이를 모진 풍파와 참담한 고생으로 시달리며 보냈다. 우리
집안은 개성이 고향인데 개성이 6.25 이전에는 남한에 속했다가
휴전 이후엔 북한 땅으로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실향민이
되었고, 그래서 주변에 친척들조차 거의 없다.
어머니는 3남 2녀 중의 맏딸인데, 6.25를 전후하여 남동생 셋이
다 20대의 나이에 군대에서 죽었고 여동생도 병으로 죽었다. 외할
아버지도 해방 전에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머니가 이 장사 저 장사
로 생활을 꾸려나가느라 어머니는 사실 모친의 자상한 사랑올 그
리 받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어머니는 4O 전에 홀로 되었기 때문에 남편복도 없는 사람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이상하리만치 심성이 당당하
고, 맑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정말로 내게 주기만 하는 사랑, 보
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 부담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내리사랑을
베풀어 준다.
말하자면 나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셈인데, 어머니의 극성스
런 자식 집착이라든가 흔히 모자간에 생길 수 있는 모친고착(母親
固着)의 컴플렉스에 의한 애증병존의 심리 같은 것을 별로 느껴
본 적이 없다. 물론 양친부모 밑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난 아이보다
는 아무래도 <외아들 티>가 배어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0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어머니의 사이는 확실히 편한 관계였고 절대로 <효도>나 <윤리>로
억지로 맺어지는 부담스런 관계가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나는 최근 심리주의 문학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
서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 가며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어렴풋하
게나마 해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시절에 모친의 사
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외할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이모
를 편애하는 편이어서 아버지 사랑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한다),
사춘기 때부터 20대의 나이에 걸쳐 많은 이성들에게서 듬뿍 사랑
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자식에게도 아
낌 없는 내리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되었고, 또 그 이후의 고생과
풍파에도 불구하고 심성이 삐뚤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지문이 안 찍혀질 정도로 일만 해왔고, 1.4후퇴
피난중에 나를 낳은 이후에는 산후병으로 시달려서 외모를 가꾼다
거나 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래서 내 어린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엄마의 이미지는 <몸빼> 입고 머리에 흰 수건 두른 고
생에 찌든 여자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여성으
로 평가하거나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또 나는 집에서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자
상한 아들>이 못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청춘시절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차츰 철이 들어가면서, 환갑을 넘기며 늙
어 가는 어머니가 불쌍하게(?) 여겨져서 가끔씩 이 얘기 저 얘기
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갖고 있는 그 당당한 <스
타의식>과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줄 아는 푸근한 마음의 여유가
어머니의 청춘시절에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데서 연유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어머니는 꼭 미국 만화영화에 나오는 자그맣고 귀여운
할머니 요정같이 생겼다. 늙기는 늙었으되 귀엽고 싱싱한 여자다
움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슬슬 말을 붙이면 기분이 좋아 옛날 얘
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데, [내가 한창 땐 정말 예쁘다는 소리 하
나는 실컷 들었지] 하며 어머니의 전성시대(?)를 흐뭇하게 추억한
다. 집안이 어려워 소학교만 마치고 이 일 저 일 하다가 백화점
점원으로도 일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 얼굴 보려고 일부러 찾아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키인데
도, 그때는 날씬한 미인으로 소문나 남자들한테 꽤 시달린 모양이
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비
록 풍파를 많이 겪긴 했지만 여자로서는 행복한 사람에 속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이성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사랑의 충전량(充電量)만
갖고서도 평생 동안 안정된 정서를 갖고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다.

내가 어머니를 통하여 깨닫게 된 진리가 또 하나 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성적(性的) 기쁨의
교환이나 마음의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남에게서 주
목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성(性)에도 별로 관심이 없
고(내가 보기에 사상의학적으로 볼 때 소양인이다. 소양인은 섹스
에 둔감하다), 여성의 옷 치장이나 화장에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내가 여자의 야한 화장이나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에
집착하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한다. [내가 젊었을 땐 분을 전혀 안
발라도 화장을 많이 한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라고 말하면
서 고왔던 피부를 자랑해 대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선천적으로 비
교적 좀 예쁘게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누구에게나 해
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 현대미의 기준이 <예쁜 여자>보다는 <멋지고 개성적인 화려
한 여자>에게 더 점수를 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우리
여성들은 좀 더 남에게 주목받기 위해서, 남의 시선을 많이 끌어
들이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남성도 마찬가
지겠지만, 아무래도 여성이 남성보다 <마음껏 야하게 치장할 권
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 여성은 <주는 사랑>이나 모성애
를 베풀기 위해 더욱 더 이성의 사랑을 많이 받아들여 충전시켜
둘 필요가 있는 점에서, 우선 여성들에게 그 실천이 절실히 필요
하고 또 용이하다는 생각이든다.
봄철에 피어나는 꽃들은 지극히 화려하고 선정적인 색깔들을 지
녔다. 또한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남의 주목을 받아 보
려고, 사랑을 받아 보려고 애를 쓴다. 자연이 이러할진대, 우리
인간이라고 그 예외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마음이 고운 여자>, <지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 이런 것들
은 다 조작된 허구요 헛된 신화다. 우선 남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보는 것, 그것이 섹스보다, 정신적 사랑보다, 지성보다 더 중요하
다. 모든 만물은 다 음기(陰氣)는 양기(陽氣)를 , 양기는 음기를
끌어들임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가며 그럭저럭 살아나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난 자연미보다 인공미(人工美)를 좋아하고, 인공미 가
운데서도 무시무시하고 그로테스크한 화장이나 섬뜩한 느낌이 드
는 긴 손톱에 집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이 꽃들보다 우월
한 점이 있다면, 꽃들은 화장을 할 수 없는데 인간은 화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하면 줄 수도 없고, 사랑에 굶주리게 되면
심성이 삐뚤어지게 되어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이나
자식들의 인생까지도 망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결국 <이성에게서 주목받는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래서 이 봄철에 우리는 보다 야하게 치장하고 용감하게 화려해
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앞에 쓴 본치와 마찬가지로 파파쿠라 도서관 옛날책 정기 처분할 때 들고 온 책. 저자 이름은 크리쓰토퍼 뉴인데 80년대 중반 책이 나올 무렵엔 홍콩에서 철학교수를 하고 있었다. Christopher New. 아 참 책 이름은 그냥 샹하이다.

제임쓰 클라벨의 아시안 싸가 씨리즈 여섯 권과 콜린 맥컬로우의 로마 씨리즈를 읽으며 영어역사소설에 맛을 들여서 고른 책인데 생각보단 좀 밋밋했다.

주인공 존 덴튼이 잉글랜드에서 학업을 마치고 20세에 샹하이로 말단 세관공무원으로 가면서 시작되는 얘기는 아편거래에 손대며 부를 쌓은 덴튼이 주위 서양사람들 몰래 중국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훗날 폭력조직인 삼합회 보쓰가 되는 인물과 악연을 쌓으며 복잡해진다. 거기에 사업하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 얘기랑 덴튼의 애들 얘기, 아내랑 정부 얘기, 아마라고 부르는 중국인 하녀들 얘기, 나중엔 일본 강점과 국민당 대 공산당 대결 얘기에 말려든 덴튼 가족 얘기로 확대된다.

그럭저럭 재밌었다. 읽기는 본치보다 먼저 읽었는데 독후감은 늦게 올리게 됐다. 5점 만점에 3.5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심술 2007-12-1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결 얘기에 말려든' 보다는 '대결에 말려든'이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