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리뷰어: 홍지로 (번역가)




‘고뇌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도 창작과 평론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미스터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이를 자기 작품에도 반영하는 유형의 창작자다. 그는 본격 미스터리의 세계를 검토하고 재구축하는 데에 주력하는데, 특히 그 방면의 선배 엘러리 퀸을 어찌나 존경하는지 틈만 나면 작품 속에서 퀸의 작품을 인용하고 분석한다.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을 필명인 동시에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으로 정한 것부터가 엘러리 퀸의 사례를 따른 것. 


존재 자체가 메타적인 이 작가의 작품은 종종 미스터리라기보다는 미스터리에 관한 에세이나 콩트, 독후감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선사한다. 나쓰키 시즈코의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추지나 옮김, 엘릭시르 펴냄)처럼 선배 작가의 설정과 구조, 트릭을 자기 작품에서 차용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아예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미스터리에 관한 이론을 설파하는가 하면 ‘엘러리 퀸은 왜 국명 시리즈 중 『샴 쌍둥이 미스터리』(배지은 옮김, 검은숲 펴냄)에서만 독자에의 도전을 넣지 않았지?’ 같은 오타쿠다운 의문을 미스터리의 원천으로 삼아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식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린타로의 단편집 『녹스 머신』(박재현 옮김, 반니 펴냄)이 그 가장 과격한 예로, 거기 실린 네 단편 중 세 편은 사실상 고전 미스터리에서 발견되는 규칙과 변화 및 허점의 원인을 규명하는 개그 에세이나 다름없다.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머리만 긁적일 테고, 내용을 이해하며 즐긴 독자라고 해도 내심 ‘이건 미스터리는 아니잖아!’라며 배신감을 느낄 만하다.


제목에서부터 『엘러리 퀸의 모험』(엘러리 퀸 지음, 장백일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을 염두에 둔 노리자키 린타로의 첫 단편집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역시 작가의 태도는 뚜렷하지만, 『녹스 머신』 수준으로 연구가의 자세를 견지하며 독자에게 사전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노리즈키 린타로 입문서로는 좀 더 나은 선택이다. 여전히 본격 미스터리에 관한 지식이 조금이나마 있는 편이 좋을 테지만, 평범한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책장을 펴든 독자라도 망연자실할 염려는 없다. 「사형수 퍼즐」, 「상복의 집」, 「카니발리즘 소론」, 「녹색 문은 위험」처럼 미스터리의 매무새를 갖춘 작품들은 후더닛(누가 범인인가), 하우더닛(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나), 와이더닛(왜 범행을 저질렀나)을 고루 건드리고 있고, 「도서관의 잭 더 리퍼」나 「토요일의 책」처럼 미스터리 향유자로서 떠올림직한 콩트 혹은 메타 구조를 이용해 미스터리를 빙 둘러 피해가는 한가로운 작품들도 사전 지식 없이 무난하게 즐길 만하다. 


작가가 직접 쓴 30쪽에 달하는 후기가 압권인데, 각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넘어서서 노리즈키 린타로의 성격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작가 소개로 읽힌다. 특히 문헌정보학 전공자인 독자에게서 도서관 묘사에 대한 지적을 받은 뒤, 해당 쟁점을 연구하여 기나긴 인용도 불사하며 도서관의 자유와 윤리에 관한 논의를 펼치는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으면서도 이렇게까지 하고야 마는 진지함이 이 작가의 원동력임을 실감하게 된다.


한 편 한 편이 짧은 만큼 각 작품의 세부를 소개하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수록작 중 유일한 중편인 「사형수 퍼즐」은 가장 정석적이면서도 노리즈키의 관심사를 집약한 수작인 만큼 대표 삼아 강조해둬도 좋겠다. 사형수가 사형 직전에 살해당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이 후더닛 미스터리는 작가 자신도 본문에서 암시하듯 엘러리 퀸의 『Z의 비극』을 다시 쓴 것이지만, 원전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즐기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범행의 동기를 비롯한 감정적인 요소를 일단 배제한 가운데 사건의 물리적 조건을 점검하고 소거해 나가는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론 과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며, 사형 집행에 관한 사법 절차를 주석까지 곁들여 가며 꼼꼼히 다룸으로써 사형장을 둘러싼 심리적 스트레스를 서서히 부각시키고 범행 동기로까지 연결해 내면서 어느새 와이더닛의 장으로 옮겨가는 대담함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신본격 미스터리에서는 종종 논리적 추론에만 지나치게 매달리느라 감정과 동기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현상이 나타나곤 하는데, 그것을 사형장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사형제도라는 절차, 다시 말해 추론의 기반이 되는 구체적 조건 속에 귀속시킨 셈이다. 심지어 환경과 심리의 밀도 덕분에 작가의 당부와는 달리 작품 전체를 사법제도의 딜레마에 관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단 미스터리의 다양한 맛이 두루 담긴 이 한 편을 믿고 노리즈키 린타로의 과잉 고뇌 속으로 들어가보시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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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리뷰어: 김서진 (작가)




영국 범죄소설의 대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했던 줄리언 시먼스는 『블러디 머더』(김명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에서 코넬 울리치에 대해 더없이 냉정하게 썼다.  


“그의 글은 전형적인 펄프 픽션들과는 관계가 멀었다. (중략) 그러나 플롯은 멜로드라마처럼 한심하고 선정적일 때가 많고, 필치는 쉼 없이 새된 어조로 칭얼거리는 듯하여 나는 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겠다.”


코넬 울리치와 함께 동시대를 풍미했던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가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찬사의 대상이 되는 것에 비해, 이런 박정한 평가는 책을 써보겠다고 나선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무섭기까지 하다. 모든 작가는 자신의 책이 계속 남기를 꿈꾸지만 그걸 확인할 수는 없다. 시간과 함께 독자도 변하고 평가도 바뀐다. 울리치가 남긴 유명한 구절 “오늘은 꿈을 꾼다. 내일은 꿈과 함께 죽는다(First you dream, and then you die)”는 어쩌면 작가들의 숙명을 드러내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코넬 울리치의 팬으로서 마음 아프지만, 줄리언 시먼스의 지적은 대체로 옳다. 울리치의 소설에는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 같은 유명한 캐릭터가, 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창도 없다. 지극히 고독하고 괴팍했던 작가 본인의 삶처럼 그의 소설은 모든 문을 닫아걸고 술에 취한 채 쏟아낸 듯한 자폐적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 챈들러가 보여준 냉정한 균형 감각과 비교하면 울리치는 어느 모로 보나 과잉의 작가였다. 소설은 쓴 것보다 쓰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름답고 세련된 그의 문장은 지나친 감상으로 흐르고, 상황은 절묘하다 못해 종종 개연성을 놓쳐버린다. 하드보일드 시대에 그는 너무 쉽게 감정으로 끓어올랐다. 


그러나 울리치의 과잉을 한 겹만 접고 보면 그가 서스펜스의 대가이고 드라마 제조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미스터리 소설은 추리와 두뇌 싸움에서 시작해 범죄와 폭력 자체를 주목하는 것으로 변화해왔다. 이런 점에서 울리치가 영웅을 배제하고 유혹과 운명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물들을 내세운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은 자와의 결혼』(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에서는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은 채 끝나는데 이런 결말은 지금도 신선하다. 


울리치는 상황과 인물의 감정에 몰두했다. 그가 만들어낸 상황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는 『상복의 랑데부』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결혼을 앞두고 약혼녀를 잃은 한 남자. 그는 복수를 위해 범인들의 연인을 차례로 죽이고는 그 옆에 쪽지를 남긴다. “어떤 기분인지 너도 알겠지?” 이와 비슷한 설정의 영화가 그 후로 얼마나 많았던가. 


비단 『상복의 랑데부』뿐만 아니다. 그의 숱한 작품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계속 각색되고 있고(『죽은 자와의 결혼』은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브렌던 프레이저 주연의 1996년 작 『사랑이라면 이들처럼(Mrs. Winterbourne)』), 여러 작가들이 그에게서 아이디어를 빌렸다는 건 울리치가 만들어낸 드라마 설정이 얼마나 빼어난지 방증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70년대 후반 조해일이 발표한 『갈 수 없는 나라』(고려원 펴냄)는 『상복의 랑데부』와 설정이 흡사하다. 


『갈 수 없는 나라』는 재벌 자제들의 타락과 그에 대한 응징을 그리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일상 같던 시위를 끝내고 술집에 모여 드라마 『갈 수 없는 나라』의 주제곡을 목청껏 부르던 그 시절. 『갈 수 없는 나라』가 북한을 의미한다는 둥, 그래서 금지곡이 되었다는 둥 헛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기도 했으니, 그때 ‘밤은 젊고 우리도 젊’었나 보다. 


시먼스와는 달리 레이 브래드버리는 울리치를 매 세대마다 재발견되어야 할 작가라고 치켜세웠다. 브래드버리의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아련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울리치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울리치의 작품 전편에 흐르는 서글픈 정서, 멜랑콜리는 그의 지문과도 같으며 그 정서는 『상복의 랑데부』에서 정점을 찍는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매일 밤 약속 장소를 지키는 남자. 경찰은 그의 연인을 빼닮은 사람을 구해 약속 장소에 세우고, 예상대로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나타난다. “나를 기다려주었어, 나를 기다려주었어……”라고 반복하면서. 


십 대 시절 나는 이 대목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울리치도 그랬다. 그의 삶도 슬펐고, 그의 주인공들도 슬픔에 젖어 도시의 밤거리를 헤맨다. 이 슬픔에 같이 젖어들 의지만 있다면 『상복의 랑데부』는 코넬 울리치의 작품 중에서 최고작으로 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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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6-06-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 재미있는 책이지요.전형적인 미스터리 물을 아니지만 이른바 정통파 추리소설이나 하드보일드에 지친 분들에겐 아주 신선한 작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엿듣는 벽>


리뷰어: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엿듣는 벽』에서 ‘살인범이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극 초반에 죽은 여인 윌마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친구 에이미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혹만 남긴 채 에이미조차 사라지고, 에이미의 행방에 대해 모호하게 발뺌하는 남편 루퍼트가 혹시 그녀를 살해한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짙어간다……. 수수께끼가 꼬리를 물고 덤벼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범인이 누구인가는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의 반전조차도, 어떤 해명이 덧붙여지지 않은 채 그저 툭, 우리 발 앞에 내던져질 뿐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죽은, 사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날씨와 기분의 타이밍이 더럽게 맞지 않아 일이 그렇게 되고 만 어떤 운 나쁜 시체처럼. 


대신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살아 있는 여자들이다. 정확하게는 그 여자들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더럽고 치사하며 어두운 생각들이 어떤 식으로 불쑥 비밀스럽게 출몰했다가 예쁜 외관 뒤로 얼른 숨어버리는지, 타인에게 그것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지에 관한 묘사야말로 『엿듣는 벽』의 백미다.


다섯 명의 여자들이 있다. 에이미는 얼마 전에 이혼한 친구 윌마를 위로하기 위한 멕시코 여행을 함께 왔다. 어쩌면 에이미의 남편 루퍼트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윌마가 추락사한다. 충격 받아 거의 실성하다시피 한 에이미를 데려가기 위해 루퍼트가 달려오지만, 집에 도착했을 땐 루퍼트 혼자뿐이다. 그리고 멕시코 호텔방 벽에 귀를 대고 에이미와 윌마 사이의 신경전을 엿듣는 종업원 콘수엘라가 있다. 루퍼트를 사모하는 사람 좋고 단순한 버턴 양, 시누이 에이미를 싫어하지만 남편 앞에서 차마 불만을 늘어놓지 못하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데에 혈안이 된 헐린이 있다. 


이 여자들 모두 자신이 원하는 상과 바깥에서 보는 상이 다르며 그 간극에 대해 불만을 느끼지만, 또한 그녀들의 사회적 위치와 계급, 바깥에서 기대되는 역할에 따라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 확연히 달라진다. 가장 제멋대로 사는 것처럼 보였던 여자는 불행한 결말을 맞고, 계급의 가장 아래쪽에 속해 있던 여자는 자신의 욕망을 겁 없이 휘두르다가 광기에 휩싸이고, 가장 소극적으로 살던 여자는 예기치 못한 순간 날카로운 발톱을 살짝 내보인다. 


물론 남자들도 중요하다. 여자들의 욕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가정이 불안한 토대 위에서 가까스로 안정을 유지하는 정도로 허약한 건축물이었음을 가장 뒤늦게 깨닫는 인물들. 자신들이 여자를 보호하고 아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그렇게 패배해야만 다시금 공인된 제도 안에 안주할 수 있는 인물들. 하지만 『엿듣는 벽』에선 어디까지나 여자들의 결투가 우선이다. 정숙하고 평온한 아내·부인·연인으로서의 역할만 요구받던 여자들의 마음속에 몰아닥치는 광기는 아주 조용하게,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독자들이, 혹은 그녀들 자신마저도 이 변화를 눈치채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부엌 조리대 위의 식칼’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식칼은 계획된 살인에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긴급 상황에, 느닷없이 화가 나거나 두려울 때 무심코 집어 쓰기 마련이었다. 남자들은 빨리 공격이나 방어를 해야 한다면 습관적으로 주먹을 쓰기 마련이다. 여자들은 뭐든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거나 주변에 있는 것을 집는다. 식칼은 부엌 조리대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집기를 기다리면서.”


우아한 외면 아래 치사스럽고 더러운 내면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엿듣는 벽』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마거릿 밀러가 등장인물들을 대단히 냉담한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되 혐오(는 필연적으로 우월 의식을 낳는다. 퍼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몇몇 작품들을 떠올려본다면 분명하다)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마거릿 밀러는 다만, 벽에 가만히 귀를 대고 그녀 자신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벌거벗은 심리와 좌절된 욕망을 엿듣고 정확히 기술할 뿐이다. 그녀는 불안하고 불길한 여자들의 영혼 앞을 서성거리는 야경꾼이다.


“외관을 깨끗이 유지하기, 덤불 울타리 다듬기, 잔디밭 깎기. 그래서 이 집들이 삼중 담보에 걸려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두통은 편두통이 아니라 마티니를 하도 마셔서 생긴 증상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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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마리 유키코




한국에서 일본 소설의 인기를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 사회의 ‘시간 차 유사성’이다. 역사에서 비롯한 감정적 거부감을 누를 수 있다면, 일본은 먼저 당도한 미래 사회로서의 예상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가설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 현상이 몇 년의 간격을 두고 한국에도 찾아오고, 독자들은 과거에 쓰인 현재의 이야기를 읽는 경험을 통해 담화 공동체로서 한국과 일본을 인식한다. 2012년 출간된 『여자 친구』는 2003년부터 2006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과 조사 과정을 다루는데, 저출산 및 무리한 부동산 구입으로 인한 가계 빚 증가 등 2015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에 가깝게 예측한다. 


이처럼 한국의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여자 친구』는 여자들 사이의 가장 내밀한 속마음을 파헤친다. 자가 주택 구입으로 상징되는 경제적 안정이 삶의 성공을 지시하는 세계에서, 여성 개인 혹은 여성 종족 대부분은 독립된 경제 주체로서 아직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해 늘 아슬아슬한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사회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경쟁은 약자로서의 불안감을 부채질한 결과이기도 하다. 소설은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서 생존하는 과업이 얼마나 버거운지를 묘사하는 동시에, 이로 야기된 불안이 연대해야 할 친구를 가장 증오하는 적으로 바꾸는 과정 역시 포착하겠다는 의도하에 전개된다.  


도쿄 근교의 초고층맨션 리틀타워에서 비슷한 연령, 독신, 직장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이 시체로 발견된다. 2층의 주민인 41세의 회사원 요시자키 마키코는 성기가 도려내어지고 자궁이 사라진 참혹한 모습이었고, 같은 건물 20층에 사는 38세의 다미야 요코는 목이 베여 죽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택배 기사가 용의자로 체포되지만 이 결과에 의심을 품은 프리라이터 나라모토 노에는 유리한 단서를 손에 쥔 가운데 진상을 추적한다. 


1997년 실제 일어난 ‘도쿄 OL 살인 사건’의 취재 논픽션에서 착상했다고 알려진 이 소설은 형식면에서도 르포를 차용하고 있다. 작가는 미야베 미유키나 덴도 아라타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기사 형식을 이용하면서, 피해자 두 사람의 진짜 모습은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 구축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노에의 입장은 1인칭 서술 속에 집어넣어 감춘다. 노에의 글쓰기가 감정적인 탓인지 일본의 월간지라는 특성 탓인지 삽입 장르의 문체가 약간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소설의 서사를 풍성하게 부풀리는 효과는 있다.


노에가 찾아내고 싶었던 진실은 일상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떨어진 여자들이 도달하는 바닥에 대한 것이었다. 기사에 나오는 충격적 행동을 저지른 여자들도 원래는 “하얗고 청결한, 가느다란 밧줄 위를 균형을 잡으며 조심조심 걷는 일상”(285쪽)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밧줄 아래서 얼룩이 튀면, 그에 신경쓰다가 점점 오물에 깊게 빠져들고 나중에는 스스로 뛰어내린다.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 행복의 크기를 남의 것과 비교하면 남은 행복을 비교적 수월하게 얻어낸 듯 보이고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내 삶에 대한 원망이 커진다. 부당한 운명이라는 인식은 자신과 남을 동시에 해치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 


『여자 친구』는 결핍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서로를 위로하려 했지만, 잘못된 위로로 남은 물론이고 자신도 구할 수 없었던 비극을 그린 소설이다. 비상식적이라서 인위적이고 잔혹한 동기와 행동은 노에의 르포처럼 과도한 의욕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메시지 자체는 읽는 이의 마음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깨끗하고 편안한 집, 그리고 내 옆에 같이 있어줄 사람, 그 정도가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의 모습이지만 “그 정도”라고 가볍게 말하기엔 세상은 모두에게 너그럽지만은 않다. 좋아하는 빨간 구두를 신고 한 발 내디디기엔 너무도 가늘고 위태로운 밧줄,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여자 친구』는 경고하는 것 같다.



-박현주 (번역가,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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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6-04-01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 좋더군요. 살인귀 후지코의 충동, 골든 애플과 여자 친구까지 마리 유키코의 세 작품을 읽었는데 다 괜찮았습니다. 정말 앞으로의 모습이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감히 얼마전 작고한 나쓰키 시즈코의 빈자리를 마리 유키코가 채워주지 않을까 예측해 봅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6-04-29 16:04   좋아요 0 | URL
마리 유키코는 이전 세대의 이쪽 계열 작가들보다 더 가볍고 거리낌이 없다고 할까요.. 저는 한때의 요시다 슈이치를 생각했었습니다. 문체나 무게는 다르지만 그 약간 삐뚤어진 각도랄까요.
 

당신에게는, 누구의 작업이 더 시급합니까?


투표기간 : 2016-02-29~2016-04-01 (현재 투표인원 : 64명)

1.조지 R. R. 마틴
35% (23명)

2.이영도
56% (36명)

3.토가시 요시히로
7%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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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47 2016-03-0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크로멘서 이영도 님이요...

twinpix 2016-03-02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도 님이요

ddocbok2 2016-03-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R.R. 마틴이요.. 은행나무 출판사분들 열일하시는 거 알지만 번역이 엉망이라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ㅠ 소장하기 망설여저서요. 제대로 한번 새 번역 하시면 소장하고 싶은데 어마어마하게 재밌는데도 중간중간 좀 이상한 부분이 있긴 있더라구요...

룰루오빠 2017-02-04 14: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http://sfblog.egloos.com/ 조지 RR 마틴 걸작선이 나오네요. 은행나무에서도 번역 평판 안 좋은 것을 알고 있는지 이번엔 번역자가 무려 김상훈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