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무진 <해인>



글: 노정태 (자유기고가)



아기장수 설화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세상을 구원할 혹은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특별한 아기가 태어나려 하는데, 그것을 알아챈 기득권이 아기와 산모를 해치려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지역과 판본에 따라서는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직접 죽여버리기도 한다. 후련하게 뒤집히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담긴 민중 설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아기장수 설화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버전이라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터미네이터> 1편일 것이다. 이게 무슨 치사량의 ‘국뽕’이 혈관에 주입된 자의 망언인가 싶겠지만, 잘 생각해보자. 곧 핵전쟁이 터지고 세상은 기계에 의해 지배된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규합하여 싸우는 아기장수가 바로 존 코너다. 존 코너를 낳을 사람은 사라 코너이며, 아기장수를 보호하기 위해 미래의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 카일 리스를 과거로 급파한다. 터미네이터는 말하자면 아기장수를 죽이려 드는 못된 포졸인 셈이다.

알고 보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한국인이라거나 한국 설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기장수 설화의 이야기 구조가 그만큼 보편적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책날개에 따르면 “한국적인 소재에 근원을 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특히 깊은 사료적 고증에 의거한 스토리를 펼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는 1974년생 소설가 차무진의 신작 『해인』 역시 그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니 말이다.

 

아기장수 존 코너를 낳을 어머니 사라 코너를 『해인』의 작중 세계관에서는 성모라고 부른다. 본디 성모의 역할은 태어날 때 부여받고 죽으면서 끝나는 것이지만, 고려 말 어떤 사건으로 인해 ‘숙지’라는 이름의 여인은 아기장수를 낳을 때까지 계속 같은 영혼을 지닌 채 환생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한편 카일 리스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박마다.

박마는 의상 법사가 한반도에 가져온 영험한 신물인 해인(海印)을 확보하여, 성모의 입천장이나 발바닥 등 눈에 띄지 않는 부위에 해인의 흔적을 새긴다. 그러나 카일 리스와 달리 박마는 성모를 직접 임신시키지 않는다. 박마는 성모를 찾으면 평생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고 해인을 인식시킨 후 곱게 시집보낸다. 성모의 몸에 잉태되는 것은 육체적 아비의 자식이 아니다. 해인의 힘으로 아기장수가 잉태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명의 박마가 존재하며 그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중 가장 지엄한 원칙은 아기장수가 죽으면 그를 섬기는 박마 역시 따라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지 않는 박마가 있다. 문자 그대로 불사의 몸이 되어버린 박마. 『해인』의 주인공 백한이 그렇다. 그리고 그에게는 반드시 막아내야 할 숙적 정만인이 있다. 정만인 역시 불사의 몸이며 해인을 악용하여 아기장수가 태어나야 할 육체를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영생불멸의 삶을 끝내고자 하는 악당이다. 정만인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성모를 먼저 찾아내어 자신이 임신시키려 든다. 이미 성모가 아기장수를 회임했다면 성모를 죽여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백한이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카일 리스라면, 정만인은 ‘터보레이터’(<터미네이터>의 패러디물인 <터보레이터>는 미래의 지도자를 누가 먼저 임신시키는가를 두고 두 명의 터보레이터가 경쟁하는 내용이다)인 셈이다.

 

불사의 두 인물을 두고 저자 차무진은 놀라울 정도로 능숙한 글쓰기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최대한 활용해 두 불사인의 대결을 엮어내는 것이다. 그들의 악연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부대에서 시작해, 임진왜란을 거쳐 동학농민운동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특히 이순신의 캐릭터를 세계관 속에 집어넣고 인격을 부여한 솜씨가 놀랍다. 이미 실권을 잃은 뒷방 늙은이가 되었지만 권력욕과 두뇌만은 살아 있는 흥선대원군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저자가 충실히 공부하고 준비한 내용을 바탕으로 ‘팩션’이 엮여나가는 쾌감이 대단하다.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제대로 된 대중소설을 만났다’는 긍정적 소감을 가리는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애초부터 출산의 도구로 사용되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훼손과 폭력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게 일차적인 문제다. 그것을 장르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숙지가 환생을 거듭할수록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난다는 것에 점수를 준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작가가‘떡밥’을 회수하기 위해 독자의 몰입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결정적인 반전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서술할 순 없다). 다시 <터미네이터>로 돌아가보자. 아기장수 존 코너를 점지한 인물은 다름아닌 존 코너 자신이었다.

미래가 과거를 만들어낸 이 고전적인 시간 여행의 역설을 마주한 제임스 캐머런은 ‘설정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 사라 코너의 입을 빌어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장르적 쾌감에 집중했던 1편 그리고 2편과 달리, ‘설정의 완벽함’을 의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후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용광로에 빠지고 말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인』에 대해 드는 아쉬움도 그와 유사하다. 결말을 알고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면 몇몇 대목이 새롭게 읽힌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그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휘몰아치는 독서 경험을 더욱 원했던 것 같다. 물론 선택은 저자와 다른 독자의 몫일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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