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기독교나 카톨릭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밥을 먹기 전에 기도를 한다. 그리고 의례히 이 밥상을 위해 수고한 농부와 열매를 맺기 위한 그들의 수고와 그리고 이 밥을 지은 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이 기도의 문제점은,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종종 빼놓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혹, 자연이나 땅의 도움없이 순전히 인간의 능력으로만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안되면 시골가서 농사나 짓지라는 도시사람들의 푸념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농사꾼이거나 농사꾼의 자식이거나 농사라는 것이 어떤 일인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농사라는 것이 가만히 있어도 절로 나는 석기시대의 수렵이나 채집 활동따위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집에서 풀 한 포기 키워본 사람만이 조금은 알 것이다. 싸구려 화분을 사면 꽃이 죽는 이유는, 화분이 싸구려라서가 아니라 담긴 흙의 질이 좋지 않아서 일때가 많다. 물론, 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싸구려 화분이거나 눈가림으로 보내온 양란 따위의 화분은 매우 가볍다. 들어보면 톱밥이 절반이다. 그리고 화초가 숨을 쉴 수 있는 옹기나 사기에 담기지 않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는 경우, 그 화분은 키우는 사람이 기대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작년에 상추를 키워 뜯어먹어보겠다고 상추씨를 샀었다. 서비스로 봉숭아씨도 오고 해바라기씨도 왔는데,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상추씨는 너무 촘촘히 심어 다 엉겨 버렸고 해바라기 씨는 길다랗게 자라다 화분이 너무 작았는지 말라버렸고 봉숭아는 꽃 한 번 피우고 시들고 꽃 한 번 피우고 또 시들고 했다. 나는 아직, 아직이구나 싶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아직은. 내 주제엔 남이 곱게 키워놓은 모종이나 살려내면 다행이겠구나 했다. 사람은 먹지 않고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먹을 것들은 모두 땅에서 난다. 그 땅에서 나는 것들을 길러내는 사람들은 농부들이다. 공업이나 상업이 없더라도,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농업에서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농업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하루빨리 산업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다. 여기 알제리 출신의 한 농부가 있다. 그는 인간과 대지를 연결하는 철학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 이 책은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입양되어 프랑스 문화를 접하고 도시 노동자 생활을 겪은 피에르 라비가 땅을 지키고 가꾸는 것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작가인 장 피에르 카르티에와 라셀 카르티에 부부는 25년간 프랑스의 잡지 <파리마치>의 작가로 일하며 위대한 사상을 가진 인물들을 찾아 글을 쓰고 있다. 그 중의 한 작품이 바로 이 책,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이다.



그는 도시 노동자로 살다가 이건 아니다싶은 삶의 회의를 느끼고 다행히 그와 사상을 같이 하는 부인과 결혼해 귀농을 결심한다. 그리고 황무지를 개간해 비옥한 땅을 만든다. 그는 지금에서야 이름 붙여진 친환경 농법을 1972년에 이루어낸다. 퇴비를 만드는 법, 그리고 그 땅을 살리는 법을 알아가면서 그동안의 풍부한 독서와 깊이 있는 성찰로 세계의 농업이 죽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분노한다. 거대 기업들의 뿌려대는 화학비료와 그 비료를 배분하는 각 나라의 성미급한 정부와 그들 아래서 착취당하는 가난한 농부들의 악순환에 대해서 그는 분노하고 저항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그는 1981년 자신의 친환경 농법을 프랑스를 비롯 유럽과 아프리카의 농부들에게 알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하여 철학을 가진 농부가 되었으며 그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자의 서술과 피에르 라비의 인터뷰가 아주 자연스럽게 융해되고 있다. “그는 세상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악들을 알고 있으며, 인간 사회가 가진 불균형과 불공평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자주 나무 한 그루와 강,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며 반짝인다. 자연은 언제나 그의 친구이며 영감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라고 저자들은 그를 소개한다. 분노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하는 일은 자신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광우병에 대해서 놀라고 두려워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대에는 동물성 사료를 먹여 소를 키우는 공장형 사육에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가, 육질 좋은 소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알면서 푸줏간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고르며 송아지 고기를 즐겨 먹는 자가 광우병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미국산 소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됐기 때문에 그래서 한우 값이 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로 나처럼.



항상 이런 책을 읽다보면 과연 육식을 즐겨하는 내가 괜찮은 것인가에 대해서 늘 고민하게 된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에도 이런 화제가 있었는데, 그건 육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동물들을 사육하고 가공하는 단계에 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준 나로서는 매우 고마운 저자도 있었다. 그런 문제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커피 농장의 아이들이 저임금으로 착취를 당한다고 해서 커피를 거부하거나 혹은 커피를 쓸데없이 많이 사거나 하는 것은 그 어떤 보탬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인지하고만 있으면 되는 일인지, 우리가 그 방법을 개선할 수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생활속의 실천은 무엇인지. 도시에서 노동자로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감사할 뿐, 그 외의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유기농으로 재배되는 야채를 골라 산지와 직접 연결해 농사꾼들을 살려주는 단체에 가입을 하거나 그러한 작물들을 팔아주는 것도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실천이 될 지도 모른다.



이 책은, 조화로운 삶이라는 출판사의 이름대로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매우 촉촉하게 젖어오는 흙냄새 같은 책이다. 그러나, 그 이면엔 양심의 가책과 끊임없는 반성이 스스로를 괴롭힐 지도 모르겠다. 풍족하고 풍족하여 사다놓고 조리하지 못한 음식과 해놓고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을 들고 밤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음식물 쓰레기통에 미련없이 부어버리고 돌아서는 나 같은 독자라면 말이다.



+번역을 맡은 길잡이 늑대는 번역공동체이다. 대리 번역등으로 시끄러웠던 세상에 한줄기 빛 같은 이름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나무를 껴안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리라

숫자 계산이나 맞춤법보다는

첫 목련의 기쁨과 나비의 이름들을

먼저 가르치리라.

성경이나 불경보다는

자연의 책에서 더 많이 배우게 하리라.

아, 나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배운 어떤 것도

내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를 내 아이가 아닌

더 큰 자연의 아이라 생각하리라.



조안 던컨 올리버 (뉴에이지 저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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