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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먹은 대로 살아요 - 思うとおりに步めばいいのよ (2002)
타샤 튜터 지음, 리처드 브라운 사진, 천양희 옮김 / 종이나라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서관 관외대출이라는 걸 해봤다.
음.. 아니, 상하이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엔 대출이라는 걸 해봤다.
그 때는 도서관도 종종 다녔었다. 뭐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나 평소의 나는 모국어로 된 책을 단 한번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적이 없다. 아니, 친구들이 굳이 빌려주겠다고 해도 마다한 적도 있었다. 후에는 빌려 읽을 때 아예 돌려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곤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친구의 책을 빌려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읽고 내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을 영 못 미더워하는 사람인지라 꿋꿋하게 물질로 소유하려 했다. 나중의 나의 부재중에 집안식구들에 의해서 처리되는 책들이 발생하였을 때도 매우 불쾌해했고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논문 프린트 하나 버리지 않고 그 많은 종이들을 다 실어날랐다.
이런 나의 도서구매욕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살다보니 나도 한 발 양보하고 그도 한 발 양보하는 것으로, 그래서 일단 다독으로 읽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꼭 가지고 싶은 장서는 그 중 엄선하여 구매를 하도록 하자는 합의하에, 그것도 그 약속을 몇 번이나 어겨 몇 번을 싸운 끝에 결국 코앞에 있음에도 한 번도 책을 빌리기 위해서는 들어가지 않았던 석수 도서관에 갔다.
대출증을 만들면 안양시내 5개 도서관에서 연동사용이 가능하고 대출기간은 2주일, 그리고 한 번에 대출할 수 있는 책은 6권이다. 그래서 욕심이 철철 넘치는 나는 아이가 자고 싶다고 잠투정을 하면서 끙끙 대는대도 관외대출실에서 꿋꿋하게 6권을 채워야겠다고 바둥바둥 거리고 있었다. 물론 집에서 읽다가 만 칼 포퍼의 인생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라는 책과 윤중호의 고향길이 펼쳐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자, 도서관에 첫 발을 디뎠으니, 일단 가벼운 책을 고르자. 집에 안 읽고 남아있어서 읽어치워야 한다고 제목들이 각을 잡고 나를 노려보는 책들은 너무 무거운 것들이라 머리를 식힐만한 단편소설들이나 독특한 에세이를 찾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예상으로는 좀 큰 판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집만한 크기로 매우 작았다. 내가 이 책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가격이 일단 12000원이라는 싸지 않은 가격에 분명히 글자가 몇 개 없는 거 같았고, 사진이 주를 이루는 데다가 분명히 빤한 아름다운 에세이가 펼쳐질 것이라는 편견에서였다. 개인적으로 처세술 책이나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어요 운운하는 빤한 이야기들에 매우 거부감을 갖는 편이다.
욕심만 많은 게 아니라 건방이 하늘을 찔러 약간 시니컬하고 튀는 사상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았지 보편적인 진리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뭐 언제나 그렇듯. 책들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나는 가끔 책을 통해 구원을 얻곤 한다.
물론 재택근무의 형태로 남편의 사업일을 살짝 보조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일은 결코 내 사생활에 부담을 주는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내가 멍청해지지 않도록 윤활유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아무튼 일을 하고 있고 명함도 있긴 하지만 나는 전업주부이다. 이 전업주부의 인생이 이다지도 지리멸렬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신혼 때는 뭐가 달라 혼자 살 때도 다 이랬지. 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살다보니 그게 아닌거라. 내 입맛에 맞춰서 먹을 수도 없는 것은 남편의 입맛도 고려해야하고, 되도록이면 버리는 음식물이 없도록 식단을 잘 짜야하고 식재료를 지루하지 않게 잘 활용하면서 신선도는 유지해야 하고 내가 먹는 음식물이 바로 아기의 밥이 되기 때문에 그 역시 고려해야하며 가족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혼자 살 때처럼 김이랑 스팸에 계란후라이 김치 한 쪽 놓고 밥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화분을 좋아해서 화분을 사 들였으면 골고루 잘 배치해 잘 자라게 해야하며 철마다 옷정리를 하고 세탁소에 보내고 청소를 해야하고 손빨래도 해야하는 육아와 가사노동. 지치기도 하지만 꼭 육체적으로 지치고 힘들다기 보다는, 별로 행복하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대부분 결혼한 지 5년이 되지 않은 여자들이 많이 느끼는
"나는 식모인가?" 하는 심각한 화두를 안고 오 밤중에 싸이질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책의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선천적으로 시골생활을 즐기는 성격인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주부라는 게 너무 좋고 시골생활이 너무 좋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그래서 주인공이 정말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인세가 장난이 아닌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주인공은 주로 맨발로 생활을 하며 정원을 가꾸고 그저 삽화를 그리는 일로 돈을 벌고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남편과 헤어져 아이 넷을 혼자 키웠으며 양젖을 짜고 개를 키우면서 살고 있다. 녹색을 그리는 게 어려운 할머니, 상상의 세계에서 사는 자신이 현실도피일지도 모른다는 그녀, 그녀는 사는 게 다 그런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을 받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서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노라고. 그저 인생을 방학처럼 살아왔다고.
"나는 집안의 허드렛일을 좋아해요.
다리미질, 빨래, 요리,
설겆이까지도 즐겨 하지요.
누가 내게 직업을 물으면 서슴지 않고
'주부'라고 대답해요.
주부라는 직업은 정말 훌륭한 거예요.
주부라고 해서 학문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요,
딸기잼을 만들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수도 있잖아요.
만약 내게 생활을 뒷받침해주는 남편이 있었다면,
나는 정원 가꾸기와 요리, 그리고 바느질만 했을 거예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다리미질
이 부분은 솔직히 충격적이기 까지 하다.
요즘 세태에 비추어보아. 주부라는 직업이 비애 가득한 직업으로 추락한 이유는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큰 부가가치가 없는 직업이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능력있는 엄마를 원하지 집안에서 살림잘하는 엄마를 원하지 않는다. 모든 엄마들은 슈퍼우먼이 되어서 살림도 잘하고 뭔가 하나정도의 특기도 있어서 그 걸로 돈도 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래서 주부라는 직업은 뒤로 쑥 빠지고 남편이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정원 가꾸기나 요리, 바느질은 되도록 기계에게 맡기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 현재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집안의 허드렛일이 어려운 이유는,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인데, 이 할머니, 혼자서 아무도 칭찬하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하고 그래서 행복해 하는 법을 아는 분이다. 책에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다.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하지만 이게 옳다고 할 수는 없답니다. 라고 하는 약간 보수적인 듯한 분위기의 귀엽고 아름다운 할머니의 자기 독백을 햇빛이 따뜻한 사진과 더불어 읽다보면, 아 - 삶에 지친 대한의 남녀노소, 또 한 명의 미국 할머니에게 구원을 받는구나.
욕심많고 거만하여 겸손할 줄 모르는 자가 가장 겸허하게 스스로를 낮추어 행복하게 사는 한 노인네를 오늘 처음 만났으니, 나 역시 이 책으로 인해 구원의 길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독서습관이 나를 구원으로 이끈 것인가? 과연 전업주부임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인가?
2006. 10. 26.
+ 타샤의 책은 이 외에도 월북에서 나오고 공경희씨가 옮긴 <타샤의 정원>과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가 있다. 이 역시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책.
시골생활, 무소유적 삶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스콧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책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