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그라피아 - 위대한 작가들의 창조적 열병
앨리스 플래허티 지음, 박영원 옮김 / 휘슬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사람은 간혹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한다. 그것이 꼭 어떤 "저지른다"의 의미이기 보다, 묘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신내림, 예술적 소양, 환청과 신의 계시, 천재적인 창의력, 틱장애, 간질증상등, 이런 것들의 대부분은 뇌 문제에 기원한다고 한다. 잘 알려진 예로 잔-다르크의 신의 계시는 측두엽 간질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예술가들 중 정신착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예술이라는 창조적 작업이 그만큼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착란증상을 가진 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그 뿐인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이 책은 산후 우울증으로 저자가 직접 겪었던 하이퍼그라피아라는 증상과 블록 현상에 대해서 말한다.

저자는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자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신경과 의사로서 아이를 사산하고 다시 출산을 하면서 산후 우울증을 겪는다. 그러면서 그녀가 겪었던 증상은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겨나는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증상과 글을 쓰고 싶으나 쓰지 못하는 블록현상(Writer's Block)을 겪는다. 글에 대한 다른 증상중의 하나는 그라포마니아(Graphomania)라고 책을 쓰고 인쇄를 거쳐 미지의 독자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를 말한다.

 

이 책은, 저자가 겪은 경험이 발단이 된다. 왜, 사람들은 미친듯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증상을 겪게 되는가와 그와 유사한 정신적 문제는 무엇이며, 창의력과 예술적 계시들은 어디에서 기원하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현상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스스로 이런 증상을 겪고 있다고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글쎄 전문적인 진단을 받아본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이것은 싸이월드나 블로그등을 통해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이퍼그라피아를 겪고 있던 사람들이 그라포마니아로 발전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가벼움이랄까. 마치 어떤 사람들은(나를 포함하여)수다를 떨듯이 끊임없이 글을 쓰는 증상을 겪곤 한다.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지 않으면 냉장고를 열고 스트레스를 풀 듯 마구 뭔가를 입에 쳐넣는 듯한 욕구불만을 해소하듯이, 글로써 그런 욕구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본인의 경우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전에는 장편의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번 펜을 잡으면 3-4장은 기본이고 편지 역시 3-4장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내가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 각종 게시판을 넘나들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주절대고 있었으며 홈페이지라는 것을 구축하면서는 이제 거기에다가 배설을 하기 시작했다. 배설이라는 표현이 거북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몸속에 가득찬 가스를 내놓는 것처럼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고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말보다는 글로 쓰고 싶어서 자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는 증상이므로 본능에 가까울 정도라 배설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매우 적합하다 하겠다.

 

가끔 나는 싸이없으면 어째 살았어? 인터넷 없으면 어떻게 살꺼야? 하는 조롱을 받기도 할 정도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엄청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일단 그것이 음성을 통한 말이 아니고 문자를 통한 글이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한다고 치면, 나는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간혹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가 하루에 쓰는 글들을 모두 모아서 한 가지의 주제로 통합을 한다면 몇 권의 소설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소설쓰기와 수다떨기류의 글은 또 다른 것이라 쉽게 통폐합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책은 혹여 이러한 증상, 혹은 스스로 예술적 광기에 시달린다고 생각하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끼는 증상을 느껴본 사람이거나 그런 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팍팍 와닿는 내용일 수도 있다.

 

저자는 꼭 어떤 증상을 규명한다는 의미이기보다, 과학이 인문/예술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공존하는가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이 책 역시 하이퍼그라피아로 인해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하이퍼그라피아가 측두엽의 문제로 인해 논리성이나 타당성까지 결여시키는 증상은 동반하지 않는 것인지 책은 매우 조리있고 재미있으며 흥미진진하다.

 

생활비가 없어서 돈이나 좀 벌어볼까 하고 신춘문예에 응모했다는 이외수작가나, 월세 내려고 글 썼다는 도스트예프스키나 어떻게 그렇다고 글이 그렇게 쉽게 써졌을까 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그들은 쉽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두다 하이퍼그라피아를 겪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 하이퍼그라피아를 생산적으로 변형해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은 각자의 취향과 성향이겠지만.

 

200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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