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의정부에 살았다.


시외버스터미널 종점 동네. 빨간 줄과 파란 줄이 그려진 영종여객 버스들이 그 곳에서 사람들을 실어가고 실어오곤 했다. 동네 어귀는 늘 북적거렸으나, 어느 역전이나 터미널 근처가 그렇듯이, 80년대의 암울한 분위기와 가난은 동네 귀퉁이를 조금씩 야금야금 발라내곤 했다. 해가 지면, 검은 개가 달을 토해내듯이, 그렇게 그 동네엔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것들이 떠돌곤 했다.

그 동네에 살 때 홍콩할매 귀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어둑한 길들이 더없이 무서웠고, 빨간 마스크를 쓴 홍콩할매가 허물어져가는 기와집 문짝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그 때의 나는 작았고, 그 앞집엔 미군아저씨가 한국여자와 살고 있었고, 그 옆집엔 커다란 기와집으로 된 여인숙이 있었다. 우리집은 성경책과 찬송가를 파는 성경서점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엄마는 참으로 신실한 기독교도였다. 내가 소풍을 가는 날이면 이웃집의 미군아저씨는 피엑스에서 프링글러스와 코카콜라를 사다가 나에게 안겨주었다. 그 두 사람은 자식이 없었고, 미군아저씨와 가끔 헬로우 – 정도는 나누는 우리 엄마 때문이었는지, 파란 눈에 커다란 키, 노란 머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 때문이었는지, 젊은 여자가 혼자 애 둘을 데리고 가게방을 꾸려가는 모양새가 기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보다 나이가 많던 그들은 내게 친절했다.

엄마는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군들은 우리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신앙으로 믿고 있었다. 엄마의 30대는 폭풍 속에서도 순진했다. 그 때 나는 10살.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겨우 두 살 더 많았다. 서른 여섯은 아직도 꿈꾸는 나이다.


그 집 옆엔 여인숙이 있었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정말 지쳐 보이는 한 여자가 여인숙을 꾸려가고 있었다. 손님들은 꾸준히 있었고, 순진하고 가난했던 나의 엄마는 그 주인여자와도 안면을 트고 지냈기에 나는 펌프가 있는 넓은 여인숙 마당에 드나들기도 했다. 무슨 일로 그곳에 드나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어느 저녁이 오는 어스름에 남자가 여자와 함께 잠을 자기 위해서 돈을 치르기도 한다는 사실과, 선량하던 그 아줌마가 사람을 사고 파는 장사를 한다는 사실과, 가격을 흥정하려던 모자를 쓴 추레한 사내에게 제법 무서운 말투로 사람을 휘두를 줄도 안다는 사실도 알게 된 날이 있었다. 엄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뭔가 바느질을 하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캐묻지 않았고, 어른들의 세계는 그렇게 알 수 없는 거래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인숙 아줌마는 슬픈 사연을 지닌 여자였다. 오래 전 그녀가 한 아이의 엄마였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먹여 기르기 위해 다른 집의 아이를 봐주는 일을 했었다. 그 때 그녀가 등에 업고 봐주던 남의 아이는 갓난아이였고, 그녀의 아이는 신나게 뛰어 놀 줄 아는 사내아이였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남의 아이를 업고 자신의 아이가 길에서 노는 것을 보던 한 낮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길 위로 달려왔고, 그녀의 사내아이는 그 트럭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바퀴 사이에 끼어 10미터를 끌려갔다고 했다. 아이의 두부 같은 작은 뇌가 길바닥에 펼쳐졌다고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못 듣겠거니 생각했는지, 그녀의 그 찢어지는 사연을 종종 입에 올리곤 했다. 뇌는 꼭 두부 같더라고, 곱창 같더라고, 천엽 같더라고. 그 때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골목에 아직도 남아있었고, 그녀도 그 동네를 떠나지 않은 거라 했다.

남의 아이를 업어 키우느라 눈 앞에서 제 아들을 잃은 그 여자는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뒤 여자를 파는 여인숙 주인이 되어 펌프 앞에서 야채를 손질하곤 했다. 나는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지만, 어깨너머로 들었던 그 이야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늘 무겁고 어두워 보였다. 남의 아이를 업고 제 자식의 죽음을 목도한 것이 어떤 의미인 지 나는 그 때 알 지 못했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의 딱지를 모두 다 따버리고 더 이상 놀 거리가 없어졌을 때 뚝방에 앉아 혼자 해 지는 것을 보면서 그녀를 생각하고 죽은 아이를 상상해보곤 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 업혀있던 그 아이는 얼마나 자랐을까 그 아이도 죽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골목엔 아이들이 많았다. 늘 딱지치기를 하고 담방구를 하며 뛰어다녔고, 아이가 없는 미군아저씨와 한국아줌마 부부는 대문앞에 서서 그런 우리들을 웃으며 바라보기도 했으나, 여인숙 여자는 아이들에게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의 여인숙 안에 들어갔고, 그 이유를 지금은 기억할 수 없으나, 그녀는 나에게 웃음이 없는 안부들을 묻곤 했던 것 같다.

그녀가 아직도 여인숙을 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의 아이를 업고 내 자식이 죽는 것을 보았던 그 불안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 고스란히 체험해야 했다. 만약 내가 그 시절에 그녀를 모르고 살았다면, 지난 나의 1년 반의 불안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조화가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한 해가 간다. 지난 봄 내내 나는 여인숙 여인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런 일은 그 어떤 어미에게도 일어나선 안 된다고, 어미가 된 나는 내 아이를 업고 콧물을 훌쩍이곤 하는 나이가 되었다.

2008.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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