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김별아 지음 / 문이당 펴냄

제 1회 세계문학상 1위작

 

미실은 신라시대의 한 여인이다.

미실로 교보문고를 검색하다보면 "색공지신 미실"이라는 책도 나온다. 신라의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 색공(色功)으로 천하를 주름잡았다는 여인이다.

팜므파탈인지, 성녀인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일단 뒤로 미루는 것이 나을 듯 하다. 우리가 여기서 얘기해야 하는 것은 미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미실이라는 장편소설에 대해서이니까.

 

그래도 일단 미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네이버 오픈사전에서 열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에는 3명의 임금(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장,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실이었다.

 

「화랑세기」는 "백 가지의 꽃의 영겁이 뭉쳐 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실(549~606)의 용모를 극찬했다.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의 일원인 미실은 할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중술을 배웠다. 「화랑세기」의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통해 미실의 방중술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으며,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 (할머니) 옥진이 '나의 아이는 오도가 다시 살아왔다고 할 만하다.'고 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미실이 정식으로 혼인한 남편은 황후의 아들이자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다. 그녀가 어찌나 천부적인 방중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실은 태후의 명에 의해 쫓겨나고 5세 풍월주 사다함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둘은 원래부터 사랑했으나 지소태후의 명으로 미실이 세종공에게 시집감으로써 헤어진 사이였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도 잠깐, 사다함은 가야정벌에 나서고, 둘은 다시 헤어진다. 그러자 미실은 다시 전남편인 세종의 품으로 돌아간다. 세종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가 다시 미실을 부른 것이다. 미실이 돌아오자 세종은 기뻐 날뛰었다. 세종에게는 원래 융명이라는 정부인이 있었다. 그러나 미실이 '원비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러이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자, 애가 단 세종은 태후에게 애원하여 미실을 부인으로, 본처인 융명을 차비로 삼았으며, 끝내 융명을 내쫓았다. 그후 세종은 평생 미실에게 정조를 지킨다.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리개로 만들었다. 미실이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종은 16세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은 개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의 진지왕, 재위 576~578)과도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다.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700편의 수기를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전장으로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해 다음과 같은 향가 『풍랑가(송출정가)』를 짓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거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전장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이미 다른 이(세종)의 아내가 된 미실을 기리며 『청조가』를 짓는다. 그러나 사다함은 결국 상사병에 결려 죽고 만다.

 

 결국 미실은 왕(진흥왕)이 문서를 참결할 때 반드시 곁에 둘 정도로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으며 10세 풍월주 미생대에 나뉘었던 화랑도의 다섯 파벌 중대원신통을 받드는 파를 만든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미실이야 말로 1,000년 전통의 신라 역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렇다면 미실의 색공은 어떻게 평가할까. 신라여인들의 색공은 왕에게 성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 외에도, 왕의 후계자를 생산해 줬으며, 미실은 그 색공을 이용하여 천하의 권세를 누린 것으로 보면 된다.

 

자, 각설하고
이러한 것이 미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어찌보면 모계사회의 전통 혹은 관습이 살짝 남아있던 신라시대의 너무나 솔직한 사회적 분위기, 본능에 충실했던 조상들의 이야기속에서 미실의 이야기는 수려한 문제, 관능적이나 절대로 음란하거나 음탕해보이지 않는 절제되었으나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적나라한 문체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꿈의 부족, 영영이별 영이별 등, 역사속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드문스타일의 여류작가 김별아의 이야기꾼적인 재주가 주목할만하다.

(최근 한국문단에서 역사속의 이야기를 잘 살려내는 여류작가의 부재성에 비춰본다면)

미실을 보면서 늘 누군가가 강조하는 이야기 "역사는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고 그 당시의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명제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같 외설로면 읽혀질 수도 있는 이야기. 색공으로 천하를 조율했던 (호령보다는 조율이 더 어울리는 듯한)아름다운 여인 미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지, 그건 각자 생각해 봐야할 문제일 것이다.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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