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하는가.

1982년 나는 그해에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고, 그제서야 세상에는 한 해 한 해를 규정짓는 숫자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앞에는 “서기”라는 말이 꼭 붙었고,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받았던 모든 상장에는 늘 서기 1982년, 서기 1983년 따위로 적혀있었다.
그 1982년의 엄청난 역사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시작된다. 나에게도 역사적인 해였던 것이고, 소설속의 주인공들에게도 역사적인 해였다. 주인공의 여동생처럼 나도 귀여운 곰돌이에 반해 OB 베어즈의 팬이 되어버렸으니까.

전두환의 3S 정책에 대해서 논하자는 게 아니다. 독특한 프로필을 책 앞 날개에 적어놓은 작가 박민규는 야구를 통해 인생을 말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한국남자 그것도 1970년대생, 혹은 그때쯤 태어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대학에 들어가고, 그 때쯤 첫 섹스를 하고 군대를 갔다오고 IMF에 인생이 뭔지 다시 한 번 처절하게 느꼈을 그 세대, 조선일보가 규명한 386세대다운 발상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자연스럽다.

요즘 인터넷에서 각광받는 “애욕전선 이상없다”를 쓰고 있는 메가쇼킹을 우리는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소설계에선 메가쇼킹만한 언어의 연금술사로 이제 박민규라는 작가를 들 수 있다. 종래의 우리가 알고 있던 소설에서 볼 수 없는 표현, 예를 들면 “빈 볼에 놀라 넘어진 타자에게 그의 전매특허인 너구리 미소 ─ 그것은 정말 ‘실실 쪼갠다’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 를 던져주곤 했다. 물론 왜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다. 웃지 마 기분 나빠, 라 한다면 내 맘이지요, 다.” 라든가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적어도 패션과 외모에 관한 한, 나는 김치사발면 속의 동결건조김치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물을 붓고, 불려도 그것은 절대 진짜 김치가 되지 않는다.” , “끓는 물의 세례를 받은 동결건조김치처럼 나는 부풀어 올랐고, 끓는 물을 붓고 사발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중학생처럼 가게가 마칠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뚜껑을 살짝 – 안 익었군. 살짝 – 안 익었군. 지금쯤이면 – 아직도! 이젠 정말 – 아직까지도! 살짝 – 익었다! 당연히, 결국은 익고야 마는 사발면처럼, 당연히 가게도 문을 닫았다.” 와 같은, 우리가 소설이라고 명명된 하나의 장르에서 절대로 발견할 수 없었을 것만 같은 언어. 가벼움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진솔하고 구체적이라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위력. 그게 박민규 언어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농담과도 같은 언어만 나열한 것이 아니고, 소설 중반 주인공이 직장을 잃는 그 부분에는 쉼표나 마침표가 자주 등장해 언어의 호흡을 유지시켜주거나, 꼭 마침표 다음에만 한 칸을 들여써야 한다는 우리의 오래된 고집에 파격을 가해, 작가 스스로 구축한 자기만의 언어세계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객기처럼 보일 수도 있을.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 사내아이가 삼미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하게 된 그 역사적인 1982년부터, 지구 종말이 온다던 1999년의 바로 전년도 1998년에 이르기까지, 신앙처럼 생명처럼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최악의 기록을 남겼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망령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구원받는다.

책 앞날개에 적혀있는 대부분의 소설가의 프로필은 몇 년도 어디 출생, 어느 대학 문창과 혹은 국문과 혹은 X(영, 불, 독 등등)문과 졸업, 거기에 추가되면 동대학원 졸업. 어디어디에서 무슨 상을 받아 어떻게 등단. 뭐 이런 식으로 써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 앞날개는 소설만큼이나 특이하게 작가가 스스로 쓴 듯한 “어릴 때부터 학교 가기가 싫었다.”에서 시작해 “누가 물으면, 창작에 전념한다고 얘기한다. “말로는 뭘 못해”라고 모두를 방심시킨 후, 정말이지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라고 끝나며, 중대 문창과를 나왔다는 이력 외에 고향도 나이도 없다. 게다가 그 배경이 되는 사진엔 머리가 길고 전인권분위기 나는 커다란 선그라스를 끼고 군복바지를 입은 생양아치스러운(분명 작가 자신이 그렇게 자칭하리라 믿어마지 않을 수 없는) 아저씨가 서 있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삼미슈퍼스타즈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팀이 얼마나 야구를 못했던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나와 동시대를 살았거나 나보다 조금 더 윗대거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라는 수식어에 가슴아련한 추억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제목도 잘 지은 게다.

300페이지에 이르는 짧지 않은 소설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재미를 일단 가지고 있으며 만화책을 읽는 것정도의 웃음을 제공한다.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큭”하는 단발적인 웃음이 터지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진실하다.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눈물이나 질질 짜게 만들고 가슴에 천근짜리 돌덩이를 달아놓은 것 같은 감상평을 쓰게 하는 90년대의 목적없고 이유없는 슬픔과 우울함을, 박민규라는 작가는 이제 좀 더 대중에게 다가설 수 밖에 없는 진솔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쉽게, 그리고 촌스럽게, 그러면서 가볍지 않게, 큰 칼 든 장수 같은 문장으로 물리치고 있다.

삶은 경쟁이고,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 그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그리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우울함과 냉혹한 현실을 다 알아버린 어른들에게, 그는 프로야구 원년기의 이용당하기만 한 순수함을 다시 찾아주는 과업을 이루어냈다.
작가 당신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면, 나는 이제 신경숙을 잊고 박민규의 팬이 될 것만 같다.

좀처럼 징그럽게 더워지지 않아 더욱 무력한 상해의 지친 밤 속에서 헤매는 나를 잠재워준 박민규의 혁신적인 소설에 감사한다.

200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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