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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0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숙한 책들이 많이 보입니다.반가운 마음에.^^ 당대비평은,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타지마할 2006-06-06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TV님 반갑습니다. 당대비평 20호에는 4년 전 월드컵이 끝나고 바로 나온 것이지요. 이 난리 법석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해 보고 싶어서요.
 

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들뢰즈/가타리 반대로 뒤집어 왜곡"

2006년 06월 05일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이메일 보내기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수목형 사유란 나무가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여 동일화하고 포개는 사유, 유일한 중심을 상정한 사유를 의미함-편집자)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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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정치인의 제1 자질은 ‘후안무치’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 이 자질이 더 뛰어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만들어내며 그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 발표 장면. (사진/ 연합)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 올 초부터 대학 내 선거 관리권은 선거관리위원회로 2004년 총장임명 후보자 선출선거를 하고 있는 한 대학의 교직원들. (사진/ 연합 조용학 기자)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 <조선일보>는 문화적으로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리는데, 그건 단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일까. 상점 앞의 신문 가판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쌀과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한겨레21>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조선일보>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보보스의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한겨레21>의 독자들은 <조선일보>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원문 : 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6/05/0211280002006050406080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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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사마천 > 노무현의 실패는 강준만과 추미애를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꽤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데 알고보면 얼뜨기 같은 존재들이 있다.
본인들은 별로 수긍하지 않겠지만 내가 볼 때는 유시민과 노무현 그리고 공병호가 그렇다.

최근 선거를 둘러싸고 다시한번 바람아 불어다오, 한나라당과 차별성 등의 단순한 논리를 통해
지지를 끌어내보려고 애쓰던 몇몇 논객들이 떠오른다. 아쉽지만 본질을 못 보고 지엽에 머무르면서 헛수고 한 격들이다. 알라딘에서도 몇분 발견되었는데 개인적으로 훌륭하고 글솜씨, 매너, 열정 모두 빠질 것 없던 분들인데 지금은 안타까워하실 것 같다. 그래도 헛수고는 헛수고일 뿐이다.

오늘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열우당의 무능과 노무현의 오만에 있다.
자신이 탄핵이라는 고초를 겪어가며 별 경력도 역량도 안되는 인물들을 대거 당선 시켜 열우당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는 노무현의 오만은 열우당을 일정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수족으로만 고려할 뿐이다. 대체로 스탈린 이후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그꼴이었고 가깝게는 박정희, 전두환이 그런 식이었다.

하여간 노무현 앞에서기만 하면 작아지는 열우당은 민심을 가깝게 듣는 위치에서 만들어지는 의견으로 관료를 견제하며 정치적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권력이 셋으로 나뉘어 균형 잡고 성장하는 현대정치의 원리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최근 수년간은 전혀 이런 기능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핵심에 노무현이 자기 주변에 대해 가진 불신이 깊게 작용한다.
청와대 초기의 측근이었던 유인태에게 던졌다는 경기고,서울대 나온 당신 같은 사람은 나 같이 상고밖에 못 나와 고생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못한다는 말이 그러한 불신을 잘 표현해준다. 그에게는 정당도 사회적 원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랫동안 가깝게 보좌한 이광재,천호선과 같은 학생운동 경력 이상의 사회적 경험이 없는 소수의 측근과 과거 친분을 맺은 몇몇 지인들 수준을 넘지 못한다.

덕분에 내각은 돌려먹기가 많다. 부동산 정책의 첫단추를 잘못 뀄던 김진표가 오늘 교육부에 있는 식이다. IMF 환란을 불러일으킬 당시 금융정책 실패 책임진 인물이 노무현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복귀한다. 부산상고 출신들 열심히 챙겼는데 왜 안알아주냐고 문재인이 부산정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이 안되는 배경에는 모두 문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문제가 가장 크다. 자기계발서 여러가지 들추어 보아도 가장 핵심에 너 자신을 제대로 알고 바꾸라는 메시지 하나가 놓여 있을 따름이다.
선거라는 비싼 과정을 거치면서 민심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문제가 없다고 고집부리는 노무현을 보면서 정말 헛똑똑이 하나 잘 못 뽑은 덕에 이꼴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한심한 생각만 든다.

다시 시간을 돌려보면 분열을 막으려 하던 강준만의 고언을 한사코 거부하며 매몰차게 비웃던 유시민의 독살스러운 표정이 생각난다. 특히 선거 끝난 날 강준만을 보면서 흘러간 물 취급하던 그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 않는다.

요즘 유시민도 많이 수그러들었던데 이제 강준만과 유시민 누가 더 오래갈까 곰곰히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답은 뻔하다. 노무현이 가도 추미애를 비롯한 다른 생각을 하며 민주주의를 꿈꾸던 사람들은 더 오래 남을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과오들을 교정하자. 문희상이 했던 말대로 차라리 열우당을 없애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민심에 대한 수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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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좌담] 무능한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심판

'무서운 민심' 어디로 흐를 것인가?

 

 

[좌담]"'무능한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심판"

5.31 지방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예상된 결과라고는 해도 집권여당에 가해진 혹독한 심판에 누구보다 정치권 스스로가 놀랐다. <프레시안> 은 1일 오전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의 긴급대담 자리를 마련해 이번 선거에 나타난 민심의 의미와 여야 정치권에 주는 메시지, 그리고 내년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에 민심의 향배는 어디로 향할지 등을 짚어봤다.
  
  "盧정부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민심 불러"…"보수적 중도파가 한나라로 이탈"
  
  손호철 교수는 '무서운 민심'이 80%, '비이성적인 민심'이 20%라고 했다. 80%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증오가 결합된 '심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공천비리와 성추행으로 얼룩진 한나라당에 압승을 선사한 것이 이성적인 선택이냐는 아쉬움이 나머지 20%다.
  
  김호기 교수의 진단도 비슷했다. 김 교수는 이번 선거 결과를 노무현 정부가 지난 3년간 수행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에 대한 '국민적 심판'의 성격으로 규정하면서도, 한나라당의 공천비리나 성추행 등 추태 사건이 벌어진 미시적 국면에서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점에 답답함을 표했다.
  

▲ 손호철 교수.


  양측의 견해는 한나라당에 몰린 민심의 본질적 의미가 신자유주의로의 경도냐는 지점에서부터 엇갈렸다.
  
  손 교수는 이번 지방선거의 함의를 김대중-노무현 정부 8년 집권기에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심판으로 봤다. '좌파 정권'이라는 말까지 들은 두 정부가 정작 내용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지지기반인 중산층과 서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킨 '무능'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다. 물론 그 반작용이 보다 親신자유주의적인 한나라당 대한 표 쏠림으로 나타난 것은 비이성적 역설이다.
  
  김 교수는 국민들의 관심이 실질적 민주주의에서 세계화의 충격으로 이동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先성장-後분배로 압축되는 신자유주의 담론에 일정부분 손을 들어준 것으로 진단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지지기반 중 보수적 중도세력이 한나라당으로 이탈했다고 분석했다. 세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양극화 문제 해결에 노무현 정부가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데 대한 항의투표라는 것이다.
  
  공통점을 찾자면 두 교수 모두 노무현 정부의 '무능한 신자유주의'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일치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민심의 흐름은 내년 대선에서 어떤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질까?
  
  손 교수는 내년 대선을 자유주의 정권 10년에 대한 심판 쪽에 무게를 실었다. 서민들 다수가 자유주의 세력에 매력을 느끼는 게 사실이어도 신자유주의 정책추진의 책임을 더 비중있게 묻지 않겠냐는 것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김 교수 역시 자유주의 세력이 남은 임기동안 개방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지지층이 줄어들 것으로 봤다. 현 여권에게는 우울한 전망이다.
  
  이는 보수세력의 정치적 대표체인 한나라당과도 긴밀한 관련을 갖는 문제다. 김 교수는 한나라당 내에 공존하는 구보수와 신보수의 차이에 주목했다. 정확히는 소장파로 대표되는 한나라당 내의 새로운 인적자원에 주목한 것.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으로 이탈한 보수적 중도그룹이 내년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내부의 신보수를 향해 표를 던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손 교수는 대선을 앞두고 정치공학적인 분열의 가능성 외에 한나라당의 구보수와 신보수는 신자유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단언했다. 손 교수는 그 보다는 여권이 민주당, 고건 전 총리 등을 아울러 민주대연합론 구성하거나, 친노 세력이 이와 다른 방식으로 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흐름이 복합적으로 어울려 한국 정치를 구성해 나갈 것으로 봤다.
  
  다음은 1일 오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한 손호철, 김호기 교수 대담 전문.
  
  '5.31 민심'의 의미
  
  프레시안 : 예상된 결과라는 평가 속에 정치적 탄핵이라는 말도 나온다. 지방선거 결과를 접한 전반적인 생각과 이번 선거의 의미와 전망을 먼저 짚어달라.
  
  손호철 : 한나라당의 금품비리, 성추행 등 다양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여론조사 결과 보면서 개인적으로 한달 전에 무서운 민심이냐 미친 민심이냐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썼던 대로 민심이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게 80%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 어떤 의미에선 증오라고까지 표현될 수 있는 감정이 심하다는 게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민심의 심판이 단순히 이성적인 판단만은 아닌 것 같다. 80%가 무서운 민심이라면 20%는 여전히 비정상적인 민심이 아닌가 싶다. 열린우리당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 대안이 이번 같은 한나라당의 압승이어야 했을까, 다른 대안적 선택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김호기 교수.


   김호기 : 이번 선거 결과를 우리가 들여다보기 위해선 세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97년 경제위기와 98년 DJ정부 출범부터 시작된 8년에 걸친 중도개혁세력에 대한 평가라는 긴 시간의 평가가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지난 3년간 노무현 정부의 집권에 대한 평가, 즉 정권심판론이라는 의미가 가능하다. 세 번째는 지난 두 달간 펼쳐진 정치적 국면에서의 흐름도 있는 것 같다.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서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8년의 평가에서 보자면 우리사회 두개의 정치구도인 민주-반민주, 친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 중에서 적어도 유권자들이 보기에 전자의 구도는 의미를 많이 상실하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후자가 중요해진 것인데, 국민 다수는 반신자유주의 보다는 친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선택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대안의 문제에서 중도세력 내지는 진보세력이 국민들의 공감을 아직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에서는 정권심판론이 유권자 마음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지난 3년간 가져 온 정책적 기조에 대한 심판이다. 노 대통령 본인이 말했듯이 '좌파 신자유주의'에 국민들이 혼란을 느꼈고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통치 스타일도 국민들에게 신뢰를 크게 안겨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일정하게 유효했다.
  
  개인적으로 답답했던 부분은 세 번째 미시적 흐름이다. 한나라당의 공천과정 비리, 성추행 등 추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이 미시적 국면에서 헤게모니를 잡지 못한 것 같다. 앞선 두 가지 요소가 너무 커서 이런 미시적인 사건이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못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손호철 :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김 교수가 '민심이 친신자유주의를 선택한 것'이라고 한 점에는 이견이 있다. 이번 지방선거 임하는 정치세력 중에서 반신자유주의를 채택한 정당은 민노당뿐이다. 민노당이 12% 얻고 다른 정당이 88% 얻은 것을 국민 다수가 친신자유주의를 선택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와 집권여당이 참패하고 한나라당이 승리한 원인이 노무현 정부가 반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친신자유주의 노선인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친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IMF 상황과 박정희 모델을 극복해야겠다는 철학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는 두 정부가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박정희 정부보다도 더 반서민적인 결과를 가져다 줬다. 역대 정권 중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일각에선 좌파 정권이라는 말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 후반 이후 측정한 지니계수가 최악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지지기반인 중산층과 서민층에게 무능으로 표현됐다. 무능의 내용은 생활고와 민생의 어려움이다. 그 사람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과거사법 국보법 사립학교법이냐는 정서로 간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나고 박근혜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반신자유주의를 내건 민노당이 12%밖에 못 얻어서 국민 다수가 친신자유주의를 선택한 듯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친신자유주의에 대한 심판이다. 다만 국민들이 오히려 더 친신자유주의적인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준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권심판론과 관련된 것인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유주의 정권 10년에 대한 심판이다. 그 내용은 자유주의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심판이었다. 자유주의 정권이 잘못된 시기에 집권함으로써 한국의 루즈벨트가 아니라 한국의 대처가 된 불행한 비극을 맞게 됐다. 아울러 지적할 것은 노무현 정부 특유의 전투적 리더십이다. 스타일의 급진주의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등 내용은 보수적이면서 불필요하게 스타일만 래디컬해서 모든 사람들을 적대화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독선으로 나타났다.
  
  세 번째 주목할 부분은 2004년 탄핵의 거품으로 의석을 너무 많이 차지한 거품의 붕괴다. 탄핵이 아니었으면 유권자들의 자괴감은 일찍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지방선거는 지난 총선에서 노무현 정부를 구해준 유권자들 스스로의 자괴감이다. 자괴감에 대한 보상이 한나라당에 대한 일방적 지지로 나타났다.
  
  국민 관심은 '신자유주의의 충격'으로 이동
  
   김호기 : 지난 10년간 거시적 측면에서 국민들의 관심이 이동했다. 2002년 대선에선 민주-반민주 구도에서 제기된 과제, 즉 실질적 민주주의 달성이 과제였다. 2002년까지는 그 과제가 더욱 중요해서 국민들은 노무현 정부를 출범시켰다. 2002년 이후 정부와 집권여당은 민주화 과제에 주력한 면도 있다. 참여정부 초기의 탈권위주의, 권력기관 독립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충격이 국민들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다보니 관심이 이동했다. 민주화를 지나 세계화의 충격이 다가온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국제적 금융자본의 문제, 사회 양극화, 조세, 복지 등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한 것이다. 그러면 중도개혁세력인 정부가 이 문제에 응답을 해야 하는데, 이부분에서 일관되고 효과적인 정책 구사와 추진이 미약했고 결과 또한 취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중도개혁세력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회의와 실망의 의미가 이번 선거에 담겨 있다.
  
  국민의 시선에서 보자면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성장을 먼저 추진해서 분배효과를 모색하자는 신자유주의 담론에 손을 많이 흔들어 준 게 아닌가 싶다.
  
  프레시안 : 신자유주의에에 대한 찬반이 일반 유권자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의 기준이었느냐는 문제는 조금 모호한 면이 있다. 손 교수 말처럼 신자유주의 반대가 민심이라면 왜 한나라당인가가 설명이 돼야 할 것 같다.
  
   손호철 : 신자유주의냐 아니냐를 국민들에게 물으면 다수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다수 사람이 느끼는 삶의 질이 내용이다. 국민들 관심이 이동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고 거기까지는 동의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자유주의 세력이나 중도개혁세력의 함정이고 존재 붕괴의 이유다. 신자유주의 정책, 즉 경제 정책에선 한나라당과 차별이 없다는 말이다. 자유주의 두 정권이 이제 책임을 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양면적이다. 시장에 맡기고 경쟁력을 키워야 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문제로 닥치면 반발한다. 피부에 와 닿는 것은 후자다. 국민들이 노무현 정권을 반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판단해서 심판했겠나. 그건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혁신도시, 자유도시화는 물론이고 비정규직 법안, 한미FTA 등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답습했고, 특히 급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해 왔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노무현 정부가 반시장적이어서, 한나라당이 시장주의 경제정책을 더 잘할 것 같아서 판단했겠느냐에는 회의적이다.
  
  김호기 : 우리 유권자들이 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떤 부분에서 실망했을까는 5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장 동력의 약화, 사회적 양극화, 일자리 창출, 교육, 부동산 이슈다. 이런 이슈에 국민들이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은 정치적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나름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적 대안세력은 규범적으로는 옳지만 뚜렷한 상이 안 잡힌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이런 이슈들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설득력 면에서 반신자유주의적 세력이 떨어진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규범적으로는 옳지만 국민들의 현실적 문제로 본다면 간단치 않다는 얘기다.
  
  결국 노무현 정부 정책에 대한 항의투표 성격이 짙다. 한나라당이 대안으로서 좋아서가 아니다. 집권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갖는 정부와 여당에게 국민들이 항의한 것이다. 이 세력에 계속 맡겨야 하느냐의 문제에서 적어도 중도개혁세력을 지지하는 국민은 그렇지 않다고 봤을 것이다. 이 부분을 눈여겨봐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구체적 정치적 선택이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중간 매개되는 영역이다.
  
  전통적인 중도개혁 지지세력 중에 어느 그룹들이 이탈한 것인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중도개혁세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보수적 중도와 정말 가운데 있는 중도, 진보적 중도가 있다. 이 중에서 핵심지지층인 가운데 그룹만 빼고 나머지 양쪽이 다 이탈한 것 같다. 보수적 중도그룹은 한나라당으로 이탈한 반면, 진보적 중도그룹은 민노당을 선택한 게 아니라 정치적 선택을 아예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래서 열린우리당 지지가 줄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열린우리당이 진보적 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지기반을 상실했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중도세력을 지지하는 시민사회 기반은 복합적이다.
  
  손호철 : 성장동력 등이 핵심적 이슈이자 국민들의 관심사라는 데에 동의한다. 성장동력 확충 문제만 보자면 국민들이 한나라당이 이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양극화, 부동산, 교육 문제에서 한나라당이 더 나았을까? 단순한 심판이라면 몰라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항의투표라면 성격이 다르다. 더 많은 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건 의미가 없다. 어떤 개혁이냐가 중요하다. 민주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은 다른 문제다. 개혁과 진보를 나누지 않고 뭉뚱그려 봐선 안된다. 우리당과 민노당을 묶어 진보개혁으로, 그 반대에 한나라당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서운 민심의 진로는?
  
  프레시안 : 두 분 말씀의 차이점이라면 김 교수는 한나라당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응도가 더 높을 것 같아서 기존 세력에 대한 항의 투표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 같고, 손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심이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은 비이성적이라고 보는 듯하다.
  
  손호철 : 다음 대선에선 양극화 문제가 중요하다. 양극화를 어떤 세력이 해결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국민들이 혼란스러울 것 같다. 열린우리당은 복지와 증세를 말한다. 한나라당은 감세를 말한다. 그러면 국민들은 양극화에 초점을 두는 정당을 우리당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 주범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다. 정책적 심판의 의미로 보면 한나라당을 찍어야겠지만 거꾸로 누가 양극화를 해결할 것이냐를 놓고보면 '부자당' 한나라당보다는 우리당이 좀 더 낫지 않겠냐고 생각할 것이다. 양면적이다.
  
  김호기 : 정치적 선택을 촉발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번 선거는 집권여당에 대한 회의와 심판의 성격이 담긴 항의투표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도개혁세력의 대안이라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성장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한나라당이 있다. 둘째는 성장-분배의 선순환을 말하는 현 집권 세력이다. 세 번째 대안은 분배중심으로 가자는 민노당이다. 항의투표라는 흐름으로 정치적 대안을 연결시켜보자면 국민들 상당수가 첫 번째 대안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를 보는 학자들의 시선과 국민들의 시선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시안 : 좀 더 논의를 구체적으로 해보자. 노무현 정권 이후 추진된 민주개혁의 문제나 양극화 문제로 논의를 좁혀보자.
  
   손호철 : 우리 국민들이 박정희 전두환식 개발독재 세력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는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당시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주도형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중도개혁세력이 아니라 한나라당 같은 냉전적 보수세력의 신자유주의를 국민들이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노무현 정부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이 만약 집권했다면 경제정책은 어땠을 것이고, 그 결과는 어땠을까. 먹고살기 힘든 책임은 지금 아마도 그들에게 갔을 것이다.
  
   김호기 : 최근 1년간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30~40% 정도에 머물렀다. 이번 선거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권심판 성격의 선거라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양극화 책임이 노무현 정부에게 있다고 국민들 다수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국가발전전략도 정부가 원하는 대로 결과를 낳았는지 회의적이고, 전국적인 집값 상승 등 상대적 박탈감을 안겼다. 국정수행에 관한 정책적 심판이다. 통치스타일에 대한 심판도 있다. 정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통치 스타일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있다.
  
   손호철 : 정서라는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노 대통령이 최근 해외 순방 중에 선생님들이 개혁에 가장 반대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노 대통령이 교육개혁을 하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개혁을 의도한 말도 아니었을 뿐더러 교사들 염장만 지른 결과를 낳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면서 쓸데없는 말로 분란을 일으킨다. 절제되고 고민스러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프레시안 : 한나라당으로의 표 쏠림의 원인이 양극화라는 점에는 일치하는 것 같다. 이런 흐름의 민심이 앞으로 어디로 흐를 것 같나.
  
   손호철 : 정치 구도는 크게 보면 단절설과 연속설이 있다. 연속설은 지금까지의 정치패턴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97년 이후 보궐선거,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이긴 적이 한번도 없다. 한나라당이 항상 이겼다. 그러나 대선은 졌다. 그런 면에서 내년 대선은 자유주의 중도세력이 승리할 것이라고 보는 게 연속설이다. 그 논거 중에 인구학적 변화가 있다. 인구 다수가 탈냉전 세력이 됐다는 뜻이다. 지난 대선 때 20~30대와 50~60대를 구분한 것은 대미관계와 대북관계였다. 경제문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탈냉전 흐름에서 보자면 냉전적 흐름인 한나라당은 인구 다수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단절설이다. 이는 자유주의 정권 10년에 대한 심판을 뜻한다. 나는 내년 대선은 후자에 의미가 더 실려 있다고 본다. 여기서 관건은 자유주의 세력을 대변하는 차기 대권주자가 누가 됐건, 얼마나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차별화되면서 사회적 양극화의 해결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느냐다. 자유주의 세력은 증세논쟁, 복지프로그램 담론으로 승부할 것이다. 한나라당은 거꾸로 성장이 최고라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으로 대응할 것이다. 이 구도에서 서민들 다수는 자유주의 세력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책임을 가진 이들이 과연 할 수 있겠느냐는 교차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책임론과 대안론이 교차할 텐데 흐름은 아무래도 심판론이 더 강하지 않을까 보여진다.
  
  중요한 것은 정치세력의 전략적 선택에 있다. 정파적 이해의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지역구도다. 와해된 지역기반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DJP 연합이나 반영남 연합을 복원시킬것이냐 아니면 영남세력이 열린우리당 창당정신을 주장하며 당을 깨고 나갈 것이냐다. 물론 한나라당이 깨질 가능성과도 관련돼 있다. 결국 큰 흐름은 연속성보다는 단절설이 강한 것 같고 그 흐름에서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책임론과 대안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국민들의 정파적 선택이 이뤄질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의 몰락은 퇴행적 양당구도 초래
  
  김호기 : 87년 이후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제도화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당정치의 제도화 측면에서 보면 이번 선거는 비극이다. 이번 선거가 비극인 이유는 보수세력에 대한 표 쏠림이 너무 두드러져 정치의 본질인 체크와 발란스가 무너진 점에서 그렇다.
  
  우리 앞에 놓인 정당정치의 제도화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보수-진보로 가는 길이고, 보수-중도-진보의 삼각구도로 가는 길이 있다. 두가지 중 실제로 가게 될 길이 무엇인지는 예단이 어렵다. 정당정치의 제도화의 길이 우리가 뜻한 대로 가는 게 아니라 구조적 조건과 정치세력의 전략적 선택의 경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적 지형은 30%가 보수, 40~45%가 중도, 나머지 30% 내외가 진보다. 최근 흐름에서 주목할 것은 중도 그룹 지지층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정치적 실망이 크다는 것이다. 이 세력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쪽으로 이동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계속 자신의 지지기반을 유지해 간다면 보수-중도-진보의 3각 구도가 제도화 될 것이고, 이게 안 된다면 빠른 시간 안에 보수-진보 양대 구도로 갈 수도 있다. 내년 대선까지 최대 과제가 이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남은 임기동안 개방과 복지를 결합시키는 비전을 만들어서 어떻게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 그리고 그동안 성과를 낼 수 있을지다. 그렇지 못한다면 자유주의 중도세력 지지는 줄어든다.
  
  중도세력, 자유주의 세력은 개방과 사회복지를 내걸지만, 이 문제는 내적으로 엄청나게 긴장을 부여하는 과제라는 점에서 딜레마가 있다. 이런 곤혹스러움, 어려움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게 노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주의다.
  
  지역주의 문제도 여전히 중요하다. 향후 우리 정국구도에서 중도세력의 경우 지역주의에 대한 현실론과 이상론이 첨예하게 맞설 것이다. 집권을 위해선 지역구도에 기반해야 한다는 현실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이상론이 팽팽하게 맞설 것으로 예상된다. 중도 세력이 지역주의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따라서 이것이 보수 세력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손호철 :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까지 우리정치의 사각지대는 사당(私黨)정치였다. 노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당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사당정치를 깨기 위해 열린우리당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번 선거가 정당정치 제도화의 비극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이유는 또다른 정당이 생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풍비박산 나고 또 다른 정당이 생길 것이라는 게 비극이다. 정권만 바뀌면 당이 없어지는 잘못된 관행이 또 반복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졌다.
  
  김 교수가 말한 이념적 구도에서 보자면 퇴행적 양당구도가 우려된다. 냉전세력이 줄어들고 자유주의 세력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냉전적 보수세력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음에도 선거에서 승리했고, 자유주의 세력은 참패함으로써 가능해진 시나리오다. 이는 개혁적 자유주의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양당구도가 아니라 자유주의 세력이 냉전세력으로 변해서 형성되는 퇴행적 양당구도로의 전환이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이 작년에 한나라당과 우리당은 차이가 없다면서 추진한 대연정에서부터 단초가 엿보였다. 만약 노 대통령이 역사의 순교자가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위험해진다. 파시즘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파시즘 지지 현상이 나타난다. 지금의 박정희 신드롬은 파시즘의 전야와 비슷하다. 그래서 걱정이다.
  
  "한나라당 내의 신보수에 주목해야" vs "구보수-신보수 차이 없어"
  
  프레시안 : 중도개혁세력에 초점을 두고 얘기가 길어졌다. 보수진영의 흐름이나 개혁 진영에 대한 전망도 필요할 듯하다.
  
   김호기 : 한나라당 내부의 두 세력, 즉 박정희식의 구보수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신보수 세력 간의 긴장과 갈등이 커질 것이다. 국민들 시선에서 보면 한나라당은 옛날 한나라당 세력도 있지만 새로운 인적자원도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과거 수구정당, 냉전보수세력으로만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도개혁세력이나 진보세력이 갖는 한나라당에 대한 인식이 너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이번의 오세훈 후보를 밀었던 소장파 그룹을 박정희 그룹의 후예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구보수와 신보수 사이의 내적 긴장과 갈등이 내년 대선후보 선택과 맞물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도 내적 분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호철 : 신보수와 구보수의 갈등은 박정희 노선과 신자유주의 노선의 갈등이 아니다. 박근혜 대표도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 경제정책에선 신보수와 구보수의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냉전의식에서는 일정한 긴장이 있다. 또한 신보수와 구보수의 차이는 부패 여부다. 냉전수구와 부패를 오세훈 후보나 원희룡 의원 등이 내부적으로 깨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지만 주류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이 너무 잘 나가서 분열의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경선에 승리한다면 박근혜 대표가 당에서 할 역할이 있으니까 별 문제 없다. 반면 박 대표가 승리한다면 이 시장은 설자리가 없다. 당이 깨질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는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선택도 중요하다. 몇가지 선택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민주대연합론, 즉 DJP연합의 복원이다. 반영남 연합인데 이는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당에 거부반응이 없는, 그러면서도 호남과 충청에서 인기가 있는 사람이 부상한다. 고건 전 총리다. 만약 우리당이 고 전 총리를 선택한다면 우리당을 만든 당초의 문제의식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죽지 않기 위해 자살해야 하는 역설이다.
  
  두 번째는 창당정신을 살리자는 영남 프로젝트인데, 이것은 낡은정치 대 새정치, 지역주의 대 탈지역주의 대결구도를 부른다. 그 신호탄은 노 대통령의 탈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내 논쟁이 벌어지고 노사모와 친노세력이 탈당하면서 당장의 대선은 포기하더라도 장기적인 정치적 기반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어쨌든 지역구도의 연합의 흐름, 그리고 이와 다른 정파적 흐름이 복합적으로 한국정치를 구성해나갈 것이다.
  
  김호기 : 신보수와 관련해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는 아직 자기정체성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고작해야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 정도다. 지난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를 묶어보면 가장 중요한 그룹은 '보수적 중도 그룹'이 누구를 선택하느냐다. 대부분 표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를 냉전적 보수세력이 아닌 민주화세력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는 것이다. 2002년 탄핵은 이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당시 이들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선 우리당이 이 그룹을 잡지 못해 한나라로 넘어갔다고 본다. 우리당이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한나라당이 적어도 이미지로서는 신보수, 뉴라이트의 모습을 보여줘서 이 그룹에게 일정한 호감을 산 것이다. 향후 이 그룹을 어떻게 잡느냐가 보수세력과 중도세력의 핵심적인 포인트가 될 것이다.
  
  중도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대연합론과 같은 인위적 정계개편으로는 사실상 전선이 짜여질 수 없고 국민지지도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양극화, 그로부터 도출되는 성장동력, 부동산, 교육 등의 이슈에 대한 비전과 정책으로 짜여져야만 국민 지지가 안정화되고 지속성을 갖는다. 중도세력은 이 부분 깨달아야 한다.
  
  손호철 : 대안을 내놓고 투쟁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 측면에서 보면 우리당과 민주당이 뭐가 다른가. 다르다면 나뉘어서 싸워도 되는데, 정책적 수준에서는 두 당 모두 자유주의 세력이다.
  
  김호기 : 정계개편을 통한 전선이 아니라 비전과 정책으로 전선이 생긴다면 양대 흐름은 신자유주의 대 지속가능성의 대립일 것이라고 본다. 민노당에게 아쉬운 것은 반신자유주의는 명확하지만 지속가능의 모델은 여전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노당의 핵심관건이다. 지속가능한 진보로서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제는 민노당도 성장을 얘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지기반 확대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10~15% 사이가 현재의 정치적 전략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일 가능성이 크다.
  
  "민노당 탈노동자화 우려" vs "민노, 이제 성장을 말해야"
  
  손호철 : 민노당은 이번 선거에서 양면적 평가를 받는다. 이기면서도 지는 선거를 했다는 말이다. 지지율은 8~12%로 4년 전에 비해 전진했다. 그러나 울산 기초단체장 2개를 잃어버렸다. 노동자들의 핵심지역에서 후퇴한 선거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내용이 중요하다. 지지율이 올라 전진했지만 질이 나쁜 전진이 아닌가 싶다. 외양적으로 전국정당의 모습을 갖추고 중산층의 표를 얻었지만 핵심기반이 될 노동자 표는 잃어버려 빠르게 탈노동자 정당화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김 교수는 민노당이 성장을 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민노당에 열린우리당과 어떤 차별성이 남을까 싶다. 2008년 제1야당, 2012년 집권은 황당개그다. 그러려면 우경화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 지지율 12%로 탈계급적 정당을 말할 때가 아니다.
  
  김호기 : 민노당은 전지구적으로 스웨덴 사민당이나 브라질 노동당 같은 유사정당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국민들 눈에 민노당은 분배를 말하는 당이지 이를 위한 성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안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바람, 요구, 희망을 어느 정도 채워줘야 한다.
  
  손호철 : 지금 민노당은 국민 다수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30%의 표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불특정다수를 겨냥하면 실패한다. 스웨덴은 몰라도 브라질 노동당을 벤치마킹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프레시안 : 시간이 많이 됐다. 노무현 정부가 내년까지는 어쨌든 집권세력이다. 현정부에 대한 제언을 마무리로 부탁한다.
  
   손호철 : 걱정스러운 것 중 하나는 노 대통령이 지방선거 패배로 인해 더욱 전의에 불탈까봐 걱정이다. 전의와 소명의식, 여론은 중요치 않고 오로지 역사에 남겠다는 식의 잘못된 선각자 정신으로 갈까봐 무섭다. 소수자이지만 나는 이겼다는 생각을 할까봐 가장 걱정스럽다.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는 참여 없는 참여정부였다. 한미 FTA에 대한 국민적 토론을 조직화했어야 했다. 개방, 지속가능성, 경제발전이 무엇인지 여론과 토론을 조직해야 했다. 21세기형 한국적 발전모델 논의를 조직화했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박정희 개발독재가 노무현 개방독재로 바뀐 것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사회적 양극화와 한미FTA, 전략적 유연성, 21세기의 중국과 미국의 패권 전쟁의 첨단기지로 평택을 만들 것인지 토론을 조직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김호기 : 처음 얘기한 대로 이번 선거가 가진 의미는 짧게 3년, 길게는 8년간 집권한 중도개혁세력에 대한 평가였다. 이 세력의 과제는 개방과 복지를 효율적으로 결합시킬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조건에 비춰볼 때 반세계화는 어렵다. 개방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개방이 무조건 옳아서가 아니라 어떤 개방이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개방이라고 해도 속도조절이 중요하고 창의적 개방이 중요하다.
  
  당장 양극화로 인해 약자들의 삶이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다. 복지의 강화와 결합시킬 구체적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양극화 해소로서의 복지문제는 노 대통령이 작년과 올해 연두회견에서 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사회통합적 세계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도개혁세력은 사회통합적 세계화에 대한 비전을 만들고,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중도개혁세력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이를 원한다. 이것이 없으면 중도개혁세력이 내년 대선에서 받을 수 있는 성적표는 이번 지방선거보다 더 초라할 것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말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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