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한국의 도덕교과서를 파헤친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교수였다가 대학에서 해직된 이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지내왔다.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을 거쳐서 현재 정책위원장으로 있다. 대학에서 해직된 교수가 다시 일거리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교수사회의 상식일진대 예외적으로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의 배려(?)로 지금은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가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말만 철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철학자 상을 보여주고 계신 분이다. 학벌없는 사회 모임을 통해 그간 생각했던 것을 토대로 <학벌사회>라는 두꺼운 책을 낸 그가 이번에는 한국의 중고등학교 도덕교과서를 물고 늘어졌다. 나 역시 도덕,윤리 교과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도덕교과서의 문제점을 심각히 느끼고 있었던 바, 그의 책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 나는 그의 주장에 100% 동감하는 바이다.

 

-도덕교과의 변화

  도덕 혹은 윤리 교과 만큼이나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교과목은 없을 것이다. 수학, 국어, 영어, 컴퓨터, 기술 등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여러 교과목들이 입시제도에 따라 혹은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어떤 교과목도 도덕·윤리 교과만큼이나 변화를 겪은 것은 없다. 시대가 변한다고, 입시제도가 변한다고 수학 공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컴퓨터의 작동원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다만 6차 교육 과정에서 7차 교육 과정으로 넘어오면서 수학은 수학Ⅰ과 수학Ⅱ 뿐 아니라 이과와 문과에 따라 기본수학과 실력수학으로 나뉘고, 그것이 또 세분화 되어 각각 수학 10-가, 수학 10-나, 수학 1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는 윗세대들이 배워온 수학의 공식이 바뀐 것은 아니며, 다만 종류가 다양화되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변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어교과 역시 마찬가지로 예전엔 '국어'라는 하나의 과목만 있었지만 점차 '작문', '생활국어', '독서' 등의 다양한 영역들로 세분화되었을 뿐 우리가 사용하는 국어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과목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도덕·윤리를 포함한 사회과 교과목들에 한해서는 정치적, 시대적 변화상에 따라 교과내용도 변화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중 도덕교과는 여태 국사나 사회교과보다 그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 이승만 전 대통령에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소위 말해 '군사독재'라고 묶을 수 있는 그 시절의 도덕교과는 지금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남과 북으로 나뉘고, 남한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들을 싸잡아 뿔달린 도깨비로 칭하는 교육을 해왔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선 정말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모습 - 뿔달린 도깨비 -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교육의 효과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부터 현재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민주화된 정부 아래 군사독재의 그늘은 걷혔고, 대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표방해왔던 '진짜 민주주의' 시대에 살면서 과거와 같은 황당무계한 반공교육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도덕교과서는 과거의 반공주의 도덕교과서와 확연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교과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과거의 그것과 오늘날의 그것은 확실히 다른가? 


  군사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 정부를 맞이한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도덕교과서가 기존에 다루고 있던 반공교육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분명 우리네 도덕교육은 과거의 그것과는 분명 달라졌다. 하지만 그 본질은 바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직도 수업시간에 '나'보다는 '단체'와 '국가'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국가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등과 같은 부분에서 단체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리고 도덕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반공'만 빠졌을 뿐 다른 내용은 군사독재시절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도덕교과의 성격

  도덕을 제외한 중·고등학교에서 다루고 있는 교과목들이 "객관적인 사실 자체로부터 합리적으로 어떤 바람직한 행위규범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도덕교과는 사실이 아니라 당위를 가르쳐야 하는 교과인 까닭에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진술을 늘어놓게 되지만, 막상 사회적 문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교과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규범만을 타율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주어지는 당위 규범들이 과거 국민윤리 교육의 잔재 때문에 지극히 수구적이고 때로는 반도덕적이기까지 하다는데 있다."


  우리네 도덕교과서는 기술·가정, 사회, 국사 등의 여러 교과목들이 짬뽕된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 내용들이 체계이지도 않고, 지식을 전달해줄 만한 꺼리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내용들이 '객관적 지식이나 사실'을 배제한 행위명령만을 담고 있다. '행위명령'은 주어진 어떤 상황과 사건하에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해답을 제공함으로써 던져진 상황과 사건에 대한 학생들 개개인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하겠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 행위명령의 기준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국민윤리'교과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앞서 '도덕교과의 변화'에서도 언급했듯 시대는 변화했으되 교과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결론

 우리나라 도덕교과는 외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안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본래의 도덕교육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왔다. 학생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할 도덕교과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도덕성 함양이 아닌 반공성 함양이 목표가 되었고, 지금은 '반공'부분은 삭제되었지만 그 자리에 '국가'가 들어서 있다.

  도덕교과는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하고 이에 걸맞는 교육내용과 평가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교과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들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상황 제시를 통해 깊이있고 다양한 사고를 열어줌으로써 학생 개개인 스스로가 나름대로의 '자기도덕성'을 만들어 가야 할 진대, 우리네 도덕교과는 대신 행동명령을 내림으로써 답안을 제시하고 있어 그 중간과정은 당연히 생략되고, 결론 또한 미리 정해주고 있다. 교과서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학생들이 습득하고 따라야 할 행동의  표본이 되며, 그리하지 않을 경우 그에 반하는 행동들은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된다.

  가수 유승준이 병역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갔을 때, 국방부는 그의 국내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국가는 병역을 거부하고 국적을 포기한 자는 국내에서 이익활동을 할 수 없다고 규칙을 정하였고, 언론들은 선동적 기사를 찍어내 비난여론을 부추겼다. 그러나 과연 유승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도덕교사인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도덕교과서를 통해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고 배운 학생들은 당연히 군대를 안가는 유승준과 같은 이들을 비난하고 욕을 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양심은 무슨 양심, 국가가 정하고 있는 의무를 거부하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느냐는 식으로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있는 결론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덧붙이며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수업을 할 때마다 교과서의 애국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나부터 거부감을 일으키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왜냐면 나의 거부감은 나 개인의 의견이고, 월급 받고 일하는 나로서는 국가가 만든 교과서대로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교과서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교과서와 반대로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다만 선생님은 이런 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다른 의견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덕교과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나뿐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이,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명코 개정되어야 한다. 아니면 폐지하고 철학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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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사상의 자유, 관용 그리고 현실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정말 최고 중의 최고의 책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던 책이다.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의 수많은 번역서 중의 하나이다. 사상의 자유의 역사. '~의'가 두번이나 들어가 제목을 말할 때 어색하긴 하지만 그 정도 어색함 쯤은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위대함에 대한 찬양을 바뀐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14년.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의 일이다. 100전에 영국에서 나온 이 책은 이후 1952년에 제 2판이 나왔다고 하지만,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초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고 자신의 역주와 해설을 붙였다. 번역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의 매끄러운 번역과 역자의 적절한 역주와 해설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했다고 자부한다.

  박홍규 교수는 양심의 문제, 자유의 문제, 사상의 문제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문제에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이전에 조국 교수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책도,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도, 김상봉 교수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란 책도 그런 맥락에서 가장 우선해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었고, 읽은 후 이들을 최고의 도서로 뽑았다. 작년에 읽은 <도덕교육의 파시즘> 에 이어 이 책은 아직 채 두달도 지나지 않은 올해의 '최고의 책'으로 감히 미리 올려놓는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 종교, 출판의 자유를 당연히 여기고 있고, 또한 '사상의 자유' 역시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이 땅에서 만큼은. 언론, 출판, 종교, 집회의 자유에 사상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무슨 과거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도대체 몇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래 아직도 그렇다. 우리나라엔 사상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법조문이 없다한다. 사상의 자유란 곧 '정신의 자유'다. 박홍규 교수는 역자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이 일단 한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원칙은 일반적인 편의의 영역을 지나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보다 수준 높은, 사회적 효용을 갖는 편의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p6)(역자 머리말 中)

  그는 사상의 자유가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유럽과 미국사회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쟁취한 사상의 자유는 사회속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이며 기본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니.다. 이 책은 매우 오래된 고전이지만 100년전의 그것은 100년후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지금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 존 B. 베리는 크게 8장으로 나누고, 1장부터 '사상의 자유와 그 반대세력' '자유로운 이성 - 그리스와 로마' '구속된 이성 - 중세' '해방의 전망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종교적 관용' '합리주의의 성장 - 17세기와 18세기' '합리주의의 진보 - 19세기' '사상의 자유에 대한 정당화'.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사상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를 배제한 채 논의할 수는 없다. 사상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는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 속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봤을 때 - 그것은 전적으로 서양사이지만 -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종교의 자유였다. 기독교의 탄생과 기독교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 세력다툼, 이런 것들이 종교의 자유를 구성했고, 그것은 곧 사상의 자유였다.

  저자는 1장 서론에서 사상의 자유는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베리는 말한다. 인간에게 자연적인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와 '자녀를 낳을 권리'라고. 사상의 자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만일 우리가 의견의 표현을 이(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자녀를 낳을 권리)와 동일한 종류의 권리라고 인정할 경우, 이를 근거로 의견의 표현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 왜냐하면 다른 두 권리의 제한은 모든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의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혁명적이거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비교적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적인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는 타당한 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옹호할 수 없는 이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23)

  사회를,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유해한 의견을 유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말한다. 국가를 유지하고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므로. 어떤 의견이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다수를 위협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좋아. 동의. 그럼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어도 좋은 것인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루터는 사상의 자유에 불관용을 주장하며 "참된 교리를 강제하고 이단을 근절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군주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이며, 국가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에 있다"(p95)고 한다. 또 사상의 자유에 대해 관용을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은 정부의 권위가 효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권위에 대한 굴종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을 초래할 뿐이다. 모든 신념은 허용되어야 하며, 세속 정부는 정교와 이단을 막론하고 공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신이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명시하는 바이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테미스티우스)(p68)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밀턴)(P120)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위"이며 압제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밀)(p259)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악법에 의한 죽음을 택했지만, 중세에 벌어질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비해 그리스 사회는 매우 관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이전까지 국가에 반하는 그런 말씀과 행동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리스 사회의 관용을 말해준다. 만일, 그리스가 불관용적인 사회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즉각 처형되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그가 젊은이들을 가르치도록 놔두고, 나중에 붙잡아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법정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 또한 그리스의 관용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편에 선 나머지 그를 죽인 그리스 사회를 매우 악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중세엔 이성이 구속되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관용은커녕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들을 만들었고, 모두가 기독교에 미쳐있었다. 종교는 이성과 교집합을 이룰 수 없다. 종교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그 무엇,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치를 시험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광신적 종교는 이성을 감옥에 처넣었고, 사람들은 모두 종교에 미쳤다. 하지만 기독교의 불관용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끝난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나, 서양 유럽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선거시즌이 되면 기독교는 더욱 세력을 과시한다. 어느 한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의 목사는 보수정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선거유세를 돕고 연설장에서 빨갱이 운운하기도 한다. 목사 혼자만 그러면 그냥 알아서 놀으려니 하겠건만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신도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목사의 가르침을 혼동하며 그를 추종한다. 서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벌어진 덴마크 신문사의 마호메트 만평 파문은 독일, 영국, 프랑스로 이어졌고, 결국 유혈 폭력 사태를 낳았다. 미국의 부시는 하느님 운운하며 이라크를 친다. 이성은 아직 감옥에 있다.

   중세 이후의 인문주의라 불리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지나가고, 합리주의가 등장하며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종교의 거센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성이 종교를 대체했다. 볼테르는 <광신주의자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형 집행자들에 의해 지탱되며 화형의 나무 다발에 둘러싸인 불합리하고도 잔인한 교의이자 그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는 무리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승인받을 수 있는 교의, 그리고 오로지 세계의 작은 일부분에서만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교의를, 사람들은 무지몽매하게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종교보다 더 선호한다." (p176)
 
  사상의 자유를 어떻게 정당화 할 것인가. 합리주의의 시대에 볼테르와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끄집어냈고 사상의 자유를 이루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로이 의견을 낼 권리에 대해 "매번 논쟁을 해봐도 전혀 논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논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을 위해 우리의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 위에서도 인간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는 옳음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p263) 라고 말하며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에 대해 정당화를 시도했다.

  이 책은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올라오며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되었고 또 신장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나긴 역사를 서술하며 지금까지 살펴봐왔던 것이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이 아이를 낳고, 내 생명을 지킬 만큼의 자연적인 권리는 아니다. 아이를 낳고, 생명을 지키는 권리는 동물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내 생각, 내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관용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수의 사람들과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 절대로 안된다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된다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의견에 온갖 욕설과 비난과 인격모독 등의 테러를 하는 행위는 '불관용'적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불관용적인 사회이다. 이것은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권리가 실현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의견을 자유롭게 낸다는 것,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와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사상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에도 사상의 자유는 주어졌다. 하느님은 없다, 고 '말'하고 화형당하면 되니까. 그래서 사상의 자유는 존중과 관용을 포함해야 한다. 

  국가 보안법과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종교와 정치가 뒤섞인 민감한 문제에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 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볼테르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라고. 비록 의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역자 박홍규는 친절하게도 '해설' 을 덧붙이며 우리나라의 억압된 사상의 자유의 현실을 꼬집어 주고 있다. 교육에서, 헌법에서, 국가보안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그는 이성이 감옥에 갇혀있는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 100년된  <사상의 자유의 역사>라는 책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번역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에서의 사상의 자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땅에 사상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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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사상의 자유의 역사' 메모장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기 위한 메모 몇 가지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 과거 서양사회에서 종교의 자유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사상의 자유를 논함에 있어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비기독교 신자인 나로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므로 꽤나 낯설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또 철학과 관련해서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차이점이 정확히 뭔지,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몇몇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 책을 읽는데 있어 많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변신론(辯神論)

영어로는 Theodicy  독일어로는 Theodizee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와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Dike

의미 : 악이라는 현상에 관련해 신을 변호하려는 입장

변신론은 세계 속에 창궐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전가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말은 <신의 선함, 인간의 자유, 세계의 기원에 관한 변신론>(1710)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책 제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둘. 무신론(無神論)

영어로는 Atheisme 독일어로는 Atheismus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가 붙음

의미 : 신의 존재나 신이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
           신에 대한 거부로부터 세계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은 우주와 인간의 시원, 진화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무신론은 불가지론과 구분된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실천적 유물론은 일종의 윤리학이며, 도덕적, 정치적 참여에 연관된다. 니체의 주장처럼 "신은 죽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거부함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은 마르크스에서처럼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사르트르에서처럼 인간의 절대적 사유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상은 <철학사전>,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이정우 역, 동녘  참조)

 

셋. 이신론(理神論)

  이상주의적 입장에ㅓ 종교를 생각하거나 자연종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종교를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을 말한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고 인정하긴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또 일단 창조된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 정해진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면서, 기적이나 예언과 같은 불가사의한 요소는 배척한다.

(본 책 P 91 역주 참조)

 

넷. 설계논증

  설계논증이란, 세계는 목적에 적합하게끔 수단이 끝없이 조절된다는 명백한 설계의 흔적을 나타내 보이는데, 이는 강력한 지성의 의식적인 계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단순한 지성적 존재는 그러한 결과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추론을 논박한다. 왜냐하면 설계논증에 따를 경우 물질세계의 체계는 그 원인으로서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인 체계 역시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결국 원인의 무한소급에 빠져들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본 책 P184 본문 참조)

 

다섯. 불가지론(不可知論)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특히 종교에 관한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이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급진적 회의주의와 동의어이다. (<철학사전> 참조)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네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형이상학자와 신학자의 태도.

  둘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부정이 오로지 형이상학적 논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형이상학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태도.

  셋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뭔가 알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

  넷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지론자.

  * 셋째도 넓은 의미에서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의 차이는, 무신론자가 인격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반면 불가지론자는 그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책 P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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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 :23)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기독교와 나의 첫 만남은 사탕과 웨하스의 유혹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름성경학교에 쫓아가면 과자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전도사님의 감언은 동네꼬마들로써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큰 도화지에 써있는대로 '밀과 보리가 자라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등 찬송가를 율동과 함께 큰소리로 따라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생활은 중3때 멈추게 되었다. 수백명이 참석한 예배였던걸로 기억한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기원하기 시작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기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숭고함... 신성함. 솔직히 이런 감정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세련된 현대식 건물에 모더니티한 십자가상, 그 일사분란함과 하나로 모여진 군중의 힘은 나로 하여금 전체주의의 선입견을 주었다. 또 마음 한구석에서 '만약 이게 허상이라면..?'이라는 질문이 들었다.

그이후 보충수업은 종교논쟁의 장이 되었다. 교회다디던 친구들은'악마가 널 유혹한거다' '하나님이 널 시험에 드시게 한거다.'라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해댔다. 물론 어느 순간 더 이상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다. 모든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니 무슨 논리와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찌 인간이 알랴? 라고 답을 하는데 더 이상 논쟁은 소모적이었다.(그리고 지금도 주변의 기독교인과의 종교에 대한 논쟁은 대개 그렇게 끝이 난다.) 대학을 다니며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현실의 문제,세계의 인식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며 당연히 소모적 종교논쟁은 기억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예수는 없다>는 더 인상적이다.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종교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책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보수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기독교 상업주의에 대해 질책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세계 기독교를 믿는다는 나라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종교양식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선 성경에 대한 절대적 신봉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성경에 모든 진리의 말씀이 있다는 종교인들을 자주 만난다. 저자는 이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있음으로 생기는 성경무오류설에 대해 비판한다. 이어서 4복음서에 대한 인식오류. 복음서는 초기 교회의 윤리적 이상, 신앙고백이 실현된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이 덧붙여지고 또 유력한 권력들이 합리화시키며 신성화한것으로 파악한다.

저자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일원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현재 우리 기독교에서 보자면 이는 당혹스런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신학적 연구성과를소개하며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베들레헴 출생, 동정녀, 병자들에 대한 기적, 부활등 기독교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절대가치로 믿고 있는 일들을 하나 하나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기독교가 가치 없는 거짓 종교임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진정한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한다. 즉 민중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기신 예수, 율법과 사이비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예수, 상식과 편견을 뒤집어 엎고 혜안을 여는 예수...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교회의 가르침, 교회의 권력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말하고 실천했던 그 길을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복락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거시적 전복보다 현재의 계급적 모순들을 그대로 좌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아야할 것이다. 기독교의 비극은 '예수 자체의 가름침보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굳게 믿게 만든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 줄곧 이 책은 기독교인들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왜냐면 <예수는 없다>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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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불합리한 종교에 던지는 진지한 종교적 질문들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영국 BBS 방송국에서는 예루살렘 부근에서 발견된 팔레스타인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예수의 모습을 복원한 적이 있었다. 뭉툭한 코와 거무튀튀한 얼굴은 여지없이 시청자들의 기대를 져버렸을 것이다. 파란 눈에 금발의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의 주장이다. 다소 선정적인 책제목이 거슬린다 해서 이 책을 놓쳐선 안 된다. 이 책의 제목에 목소리를 높여 주위의 이목을 끌어보겠다는 명민한 상략(商略)이 작용했다는 것은 지레짐작이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요란한 책 제목은 부실한 내용으로 이어진다는 선입견을 이 책은 깨끗하게 불식시킨다. 논의는 진지하고, 진지한 만큼 깊이가 있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금발인 예수가 실제의 예수가 아니라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그것은 서구인에 의해 '해석된 예수'일 뿐, 실제의 예수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다석 류영모. 함석헌, 그리고 민중신학자 안병무 이래로 꾸준히 성장한 토착신학의 성과에 일정하게 빚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배적인 서구의 그리스도론이란 성서를 해석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 로마적인 세계에서 일반적이었던 신격화된 구원자 상을 예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라는 것이 안병무의 주장이었다. 안병무는 불교가 중국에 가서 그 문화에 섞이면서 선불교를 탄생시켰듯이, 예수교가 만일 서구의 그리스 로마 문명권 대신 중국 등 동북아 문화에 먼저 유입됐더라면 어찌됐을까 하는 점을 평소에 환기시켰었다. 모든 텍스트에 대한 읽기는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의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읽는 자'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면 이런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어느 종교를 갖게 되는 것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만약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독일에서 났으면 개신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에서 났으면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인도에서 났으면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가 거기 태어나서 그 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 종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백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백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미국 남부지방 KKK 단원들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차별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 성경도 역사적,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역사적 과학적 정확성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나름대로 깨달음을 주기 위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을 비유와 은유로 구성된 하나의 철학적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기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피를 취하지 말라는 구절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받은 벌이 해산의 고통이기 때문에 산모의 고통을 덜기 위한 어떤 조치도 해서는 안된다는 교파 등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씌여진 축자적(逐字的) 의미만으로 성경의 의미를 고정시킬 때, 성경은 신비화․절대화되고 신학은 토론과 대화를 거부하는 닫힌 체계가 된다.

이 책은 시종일관 주류(主流)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과 배타주의적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성경은 한 점 한 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성경 무오류설, 타종교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종교 다원주의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하는 근본주의, 이런 신앙관을 가진 국가는 지구촌에 한국 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서구만 해도 옛시대의 독선적인 `종교적 제국주의` 를 내던진 지 오래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가난한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런 배타적 신앙관을 벗어던진 지 오래인데도, 95%내지 90%에 해당하는 국내 기독교 신자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 탓이며, 이런 신자들은 서구에서 들려오는 신(新)신학의 소식을 사탄의 음모라고 규정하는 `대단한 영적 오만과 신학적 무지` 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잘못된 신관보다 차라리 무신론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비교종교학자이자 신자이기도 한 필자의 선언이다. 그러한 선언에는 배타적 신앙관을 가진 신자들의 신앙적 성숙과 성장을 바라는 필자의 간곡한 충정이 담겨져 있다.

올해로 회갑을 맞은 저자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이 같은 책을 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97년 캐나다 최대 개신교 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가 기자회견을 통해 “예수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밝힌 것에 대해, 한인교회 목사들이 이를 비난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 유아기’와 ‘정신적 식민지성’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왕의 신학이론서들이 어렵고 딱딱하여 대중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쉽게 읽히면서도 선명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 어렵고 딱딱한 문제를 우화와 비유를 적절히 들어가며 풀어간 저자의 글솜씨가 글을 읽는 속도감을 누그러 뜨리지 않는다. 중간중간 나오는 관련서적 소개와 뒤에 실린 참고문헌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한껏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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