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판력보다 떡국을
해가 바뀌고, 뭐 한 것도 딱히 없는데 어쩐지 민족의 큰 명절 설이 시작된 눈치다. 큰 명절은 과연 어마어마 커서 그런가 syo가 사는 좁은 방문을 통과해 들어오지 못했고, 창 밖으로는 4층 높이의 허공만 보이는데 텅 빈 것이 역시 오늘이나 어제나 그제나 별로 다른 게 없다. syo도 그렇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판력과 석명권에 대해 생각하고 말았다. 으윽, 당했군. 물론 느즈막히 일어나 기지개를 펴면서 민사소송법 판례를 읊조리는 인생은 세상 사람들 눈에 좀 불쌍해 보이지만, 심지어 새벽같이 일어나 똑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의실에 바글바글 모여 앉아 명절을 새하얗게 불싸지르는 노량진의 유예된 청춘들을 스케치한 기사는 마치 작년 추석의 것을 복붙한 것마냥 똑같다. '3년째 7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박 씨(29)'가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박 씨(30)'으로 바뀌었을 수는 있겠다. syo는 단지 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늙었고, 그래서인지 법조문들한테는 더 무시당하고 판례들하고는 더 서먹서먹한 느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인생이고, 역시 그런 명절이다.
떡국이라는 것이 맛있겠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_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마광수보다 만두국을
며칠 전에 썼던 일기 속의, 그 옛날 달달했던 우리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싶어 여친에게 그 글을 보여주었는데 되돌아온 답변이 충격이었다. 너무 야해서 아무한테도 못 보여주는 글을 썼군. 그 사람 생각 난다. 그 자살한 교수 이름 뭐지?
대박사건.
물론 가슴 이야기 좀 나오고 엉덩이 이야기 좀 나왔지만. syo에겐 그저 야릇하고 나른한 글일 뿐이었는데 그게 그녀에겐 마광수를 떠올릴 만한 스케일이었다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9년을 만나도 알 수 없는 연인의 마음이여.
만두국이라는 것도 맛있겠다.
가능한 여러 차원의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한 장소에 대해 알게 된다. 한 장소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방에서 그 장소를 향해, 또한 그 장소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으로 다시 가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장소는 우리가 파악하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통해 서너 번은 우리에게 달려든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불알친구 귀 빠진 날보다는 눈꽃치즈치킨을
벌써 2월의 절반이 영면에 드셨다.아놔, 뭐 한 것도 없는데! 어제의 syo는 달력을 넘기며 도대체 시간은 왜 이렇게까지 급하게 내게서 도망치는가, 나는 왜 그저 빛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말고는 속수무책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를 한탄했다. 달력의 날짜를 거꾸로 짚어가며,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지, 어제는 K의 생일이었군, 8일은 H의 생일이고, 7일은 엄마 생일, 우리 기념일...... 그러다 1일까지 짚었는데, 아뿔싸, 그러고보니 1일은 syo의 고환친구 三(이름입니다. 3명도 아니고, 친구 No.3도 아닙니다)의 생일이었다. 이놈이랑은 3일에 한 번 꼴로는 톡을 주고 받았었는데, 그러니까 三의 생일을 생까고 지나간 후에도 우리는 몇 번의 대화를 나눈 셈이 된다. syo는 무심해서 생일을 말하지 못했고, 三은 모양 빠져서 생일을 말하지 못하는 등신같은 침묵의 대치관계 속에서. 고환친구라는 관계의 이 가벼움으로 미루어보건대, 역시 고환이라는 건 달고 있다고 뻐길만큼 대단한 물건이 아니군, 하는 의미있는 깨달음도 있었다. 하여간, 차라리 제발 1일날만은 대화가 없었기를 바라면서 三과의 톡을 뒤집어 보는데, 아뿔싸, 있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어떤 대화가 떠오르면서, 제발, 제발 그 이야기를 그날 했던 것만은 아니기를 절실히 기도했다. 오 하나님, 지금도 똥인 저를 더 거대한 똥덩어리로 만들지는 말아주세요......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러니까 이것은 三의 생일날, 25년지기 친구의 생일도 잊고 언급조차 하지 않은 버러지 같은 syo와, 그런 syo를 꿋꿋이 버티며 25년을 한결같이 착취와 고난의 인생을 묵묵하게 걸어온 재림성자 三의 대화 일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syo의 인성입니다
돈 벌었으면 치킨 내놓으래 ㅋㅋㅋㅋ 심지어 개념이 없대 ㅋㅋㅋㅋㅋㅋ 하다하다 주문도 자기 손으로 안했어 ㅋㅋㅋㅋㅋㅋㅋ 완전 쓰레기 ㅋㅋㅋㅋㅋ 안 타는 쓰레기 ㅋㅋㅋㅋㅋㅋ 지 생일날 치킨 삥뜯기는 저 멍청하게 착하고 착하게 멍청한 놈ㅠㅠㅠㅠ 나같은 놈이 불알친구라 이번 생은 폭망한 저 불쌍한 놈 ㅠㅠㅠㅠㅠㅠ
아 근데 이 와중에 눈꽃치즈치킨 맛있겠다.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내 편이 없어. 그걸 이제야 알았네.
_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은 읽어도 읽어도 재미지다.
루쉰, 『루쉰 전집 1 : 무덤 열풍』을 팍팍 읽어나가다.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의 반환점을 지나다.
존 치버,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마치며 손쉽게 치버 입덕.
이웃님들 모두 모두, 명절 잘 쇠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같은 친구 있으시다면, 올해는 기필코 인연 끊으시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