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KT&G)말고 에세(몽테뉴)를 사야 합니다

 

 

 

1

 

내 안의 나를 얼마나 온전히 꺼내어 세상에 내보일 수 있고 또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것이 진정한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는 그저 표현의 문제일 뿐, 그와 별개로 내 안의 나, 그러니까 진짜 나라는 건 나 혼자, 그리고 오직 나만이 빚어나갈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나라는 것이 내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잘 만드는 것과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하는 것, 그 두 가지겠다고 판단했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저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것 이상으로 더 나아갈 수는 없겠다고 진작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syo는 반드시 몽테뉴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생각하기라는 이상하고도 재미난 과정에 즐겨 빠져들지만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은편 사람에게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 [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으며또 펜에는 그 나름의 습관과 격식이 있다펜은 독재자처럼 군림하여 보통 사람들을 예언자로 만드는가 하면통상 머뭇거리게 마련인 인간의 언어를 엄숙하고 당당한 행진으로 바꿔 놓는다몽테뉴가 뭇 망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단연 생생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그의 책이 그 사람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의심할 수 없다그는 가르치기를 거부했고 설교하기를 거부했다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거듭 말한다그의 모든 노력은 자기 자신을 글로 쓰고 전달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었으며바로 그것이 <보기보다 거친 길>이다.

자신을 전달한다는 어려움 너머에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더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버지니아 울프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1,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몽테뉴의 두꺼운 중역본을 껴안고 뒹굴기에 반지하 하숙방만큼 적절한 곳은 없었다. 어차피 하루에 한 꼭지 이상을 읽지 않았으니 차라리 도서관 서가에 꽂아놓고 읽으러 다닐 수도 있었지만, 굳이 빌려와 읽고 반납하고 다시 빌려오기를 반복하며 한 계절 긁었던 이유는 그 책이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것들을 다 제외한 공간에서 길고 느른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기보다 그 문장을 곱씹고 있는 자신을 곱씹으며 읽어야 좋을 그런 책. 몽테뉴의 에세는 그렇게 읽을 글이고, 동시에 그렇게 읽을 글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글이어서, syo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syo가 원하던 syo가 되고 있었다. 내 안의 나를 만들고, 드러내고.

 

 

 

1.3

 

그 시점을 반환점으로 찍고 삶을 반으로 접어서 끝과 끝을 맞대면, 지금 syo의 나이는 아마 처음 글자를 읽기 시작하던 즈음의 나이와 맞닿겠다. 오늘의 syo가 생각건대, 온전한 나라는 것은 내 안에 없다. 내 안에는 물론 다량의 내가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 내가 한 일들, 쓴 글들, 뱉은 말들 속에 소량의 내가 흩어져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좌표로 찍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장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이 최근 몇 년 syo가 딛고 있는 존재론이다. 자기장自己場.

 

그러니까 나는 나만 뒤져서는 죽는 날까지 나를 다 알 수가 없다. 내 밖에도 나에 대한 진실은 산재해 있다. 그것이 나의 파편임을 인정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불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나만이 나를 독점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한 오만이다. 세상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나에 대한 나의 오해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섬처럼 내가 있고, 아직 그 섬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나에 대한 타인의 관념이 나에 대한 나의 관념과 다르더라도 그 양쪽이 모두 부분적인 나며, 그 불일치를 일치시키기 위해 내가 애를 쓴다면, 그건 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나를 고쳐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자기변호는 사실상의 자기계발이고,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한 만들기인 셈이다.

 

 

 

1.8

 


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왔더니 신간이 산간처럼 쌓였는데, 그 중 에세가 제일 눈에 띈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읽을 때가 왔다. 2,000페이지짜리 책에서 몽테뉴는 자신의 이야기만큼이나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는 그런 대목들을 읽을 때 눈에 힘을 좀 주고 읽어야겠군.

 

 

 

1.9

 

사려고 봤더니 적립금이 좀 부족하다. , 이대로 7월까지 글을 써서 8월에 적립금을 탄 다음 이 책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이 책을 지금 사서 읽고 그 글로 8월에 적립금을 탈 것인가, 지금 김칫국을 사발에 받쳐 들고 되게 진지하게 고민 중이오니, 떡 줄 사람이시여…….

 

 

 

2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결국 복잡한 과정을 통해 단순한 명제를 전달할 뿐인 책들- 철학책들이 있다. 반면 일어난 일들은 또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 역시 언젠가 일어나는 것이 세상이며, 따라서 세상은 클리셰를 답습하는 클리셰와 클리셰로부터 도망치려고 애를 쓰는 클리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들- 소설이 있다. 내 마음이 지금 어떤 꼴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타인의 마음이 지금 왜 저런 모양인지 바깥에서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우리는 보통 클리셰에 의존한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저게 다 열등감 때문이다. 저게 다 어릴 적 부모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저게 다……. 편한 말이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편한 말은 다 후려친 말이다. 모든 쉬운 말은 쉬운 진실의 부분만을 겨우 포착하고, 심지어 어려운 진실 앞에서는 종종 틀린 명제가 되기도 한다. 어렵고 세밀한 진실에는 어렵고 세밀한 말이 필요하다. 쉬운 말로 캐치한 진실의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일이 잦아지면, 자기가 캐치하지 못한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 습관이 생긴다. 그런 습관은 언어 사용자를 어려운 말로부터 멀리 달아나게 만들고, 진실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점점 더 요원하게 만든다.

 

소설이 그런 편한 말 중독증을 치료한다.


 


레스터 영은 지금 이런 상황이다.

 

 - 점검!

 라이언 중위가 레스터의 사물함을 획 열어젖히고는 그 안을 들여다봤다. 거드름 피우는 중위의 지휘봉-레스터는 늘 그것을 지팡이라고 불렀다-은 사물함 문 안쪽에 붙여진 사진 한 장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한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 자네 사물함인가? .

 - , 그렇습니다. 중위님.

 - 그럼 자네가 이 사진을 붙였나?

 - 그렇습니다. 중위님.

 - 이 여자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었나, .

 - ?

 - 이 여자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되었는가?

 - , 머리에 꽃을 꽂고 있습니다. 중위님.

 - 그 밖에는?

 - ?

 - 내가 보기엔 이 여자는 백인이다. 젊은 백인 여성이란 말이다. . 자네 눈엔 어떻게 보이나?

 - , 제 눈에도 그렇습니다. 중위님.

 - 자네는 깜둥이가 사물함 안에 백인 여자 사진을 몰래 붙이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레스터의 눈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라이언의 군화가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서 발가락에 닿고 있음을 보았다. 중위의 콧김이 다시 느껴졌다.

 - 내 말 들리나? .

 - 예 들립니다. 중위님.

 - 결혼했나?

 - 예 했습니다. 중위님.

 - 그런데 아내 사진 대신에 백인 여자 사진을 붙이고 밤에 이 사진을 상상하면서 자위라도 하나?

 - 저 사진 속 여인이 제 아내입니다.

 레스터는 가능한 한 공격적인 말투로 들리지 않게 하려고 그 사실을 조용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의 무게는 경멸에 대한 반항을 전하고 있었다.

 - 중위님이라고 안 붙이나?

 - 그녀는 제 아내입니다. 중위님.

 - 사진 뜯어내게. .

 - 예 알겠습니다. 중위님.

 - 지금 당장.

 라이언 중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사물함으로 가기 위해 레스터는 기둥처럼 서 있는 중위를 돌아서 다가가 아내 사진의 모서리를 잡고 회색 금속 테이프를 뜯어냈고 사진은 찢어졌다. 찢어진 사진은 손가락과 사물함 문 사이에서 매달려 있다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구겨져 버렸다.

 - 구겨서 버리게……. 지금 쓰레기통에 버려.

_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

 

라이언 저 새끼는 지금 왜 저러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xx같은 쉽고 뭉툭한 명사 하나가 떠오르고 말아 버리는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소설은 다음과 같이 어렵고 세밀한 일을 한다.

 

신병에게 모욕감을 줄 때 아드레날린이 강하게 몸을 휘감는 정상적인 경험 대신에 라이언은 그 반대의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전체 중대 앞에서 스스로를 창피하게 만든 것이었다. 레스터의 얼굴은 자존심, 자긍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공허한 표정이었고 상처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자 라이언은 심지어 영의 노예와 같은 비참한 굴종마저도 반항이나 저항의 한 형태가 아닐까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그는 그 모습이 추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영을 그 어느 때보다도 증오했다. 그는 여성을 대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여자들이 울면 때리고 싶은 충동이 최고조에 올랐다. 전에는 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영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라이언은 이처럼 무력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힘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었지만 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부적절하고 무의미해 보였다. 반역자, 주모자, 폭도들…… 그들은 모두 상대할 수 있다. 그들은 군대를 정면으로 대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해 보고자 행동한다. 하지만 강력한 당신, 바로 군대는 그들을 꺾어 버린다. 그러나 약함, 그것은 군대가 마주할 때 무력해지는 존재다. 왜냐면 그것은 힘에 의존한 대립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_ 같은 책

 

왜냐면 그것은 힘에 의존한 대립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장이 단지 이 한 장면만을 위해 마련된 일회용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작가 슨생님도 공을 들인 바가 있겠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 저 라이언 새끼가 왜 저러는 줄 알아? 라는 질문에 빡치고 쪽팔려서라고 쉽게 대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중간 과정 다 잘라먹고 영의 약함이 힘에 의존한 대립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대뜸 대답하지 않는 것. 이런 지점들에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할이 있는 것 같다.

 

  

 

--- 읽는 ---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 버지니아 울프

그러나 아름다운 / 제프 다이어

행동경제학 / 리처드 탈러

쓸모 있는 음악책 / 마르쿠스 헨리크

이렇게 인간이 되었습니다 / 박재용

올 댓 이즈 / 제임스 설터

쓸모없는 수학 / 김동진

시소 첫번째 / 김리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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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6-29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ㅋㅋ 나 지금 딱 에쎄 앞에 두고 소요님 같은 생각중이었어요 ㅋㅋㅋ 공공장소에서 혼자 미친듯이 웃고 있음요 ㅋㅋㅋ

syo 2022-06-30 15:22   좋아요 1 | URL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에쎄를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물론 몽테뉴 말고 KT&G를 ㅎㅎㅎㅎㅎ

KT&G쪽이 더 지명도가 높겠죠??

반유행열반인 2022-06-29 1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전 수능 철학지문 싫어요 병이랑 쉬운 말 병 걸려서 진지한 글 못 읽는다구요…예쁘고 재미있고 하여간에 syo님 잘하는 감각적인 글을 내놔라! 는 농담이고 할 일 힘내서 하시면서 더운 여름 건강히 무사히 잘 보내세요 ㅎㅎㅎ

syo 2022-06-30 15:21   좋아요 3 | URL
아니 반님 같은 오구오구 전문가가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이번 글은 확실히 망했나보네요. 으아아아아....
비 엄청 내리는데 건강이며 안전이며 이래저래 조심하시옵소서.

그레이스 2022-06-30 0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
사세요!
ㅎㅎ
syo님 반갑습니다~^^

syo 2022-06-30 15:19   좋아요 2 | URL
샀습니닼ㅋㅋㅋㅋㅋㅋㅋ
적립금 있는 거랑 뭐랑 뭐랑 털어서 사버렸어요 ㅎㅎ.

그레이스님 반갑습니다!

공쟝쟝 2022-07-01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는 에쎄는 담배… 아 그런 에쎄가 있었단 말인가 ㅋㅋㅋㅋ 쇼님 컴백?

얄라알라 2022-07-2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잘 쓰시지 않으십니까?

˝그 책이 그런책˝ ㅋㅋㅋ ˝떡 줄 사람이시여!˝ ㅋㅋㅋ 간만에 읽어도 역시 syo님 스퇄은 유쾌크리에이티비티!!

에세3권 표지가 syo님 포스팅에서 더 새로와보입니다. 플친님들 요새 에세가 대세인가봐요^^

syo 2022-07-21 22:28   좋아요 1 | URL
얄라님 감사합니다ㅎ

그동안에 뭐랄까, 믿고 읽을 만한 에세가 없었다고 할까요.
드디어 갖춰놓고 볼 만한 책이 등장한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