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의 모양 7

 

 

 

목련도 남았는데 라일락이 다 피었네요. 오르막길에 향이 온통 어지러운 계절입니다. 바람도 따라 걷는 산책길이 빗방울에 젖으면 또 무언가 향기 나는 것들이 자라나겠지요. 비가 자주 들릅니다. 좋은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마음은 잘 있습니다. 나는 늘 잘 있는 마음입니다. 약속하지 않는 마음에는 실망도 없는 법이어서 나는 여전히 기대하기보다 기대면서 삽니다. 내일은 잘 모르겠어요. 알 수 없는 것들을 당신은 미워했는데 그 미움이 용케도 나를 향한 미움이 되지 않도록 이 악물고 뭔가를 지켜냈던 그때의 당신을 가끔 생각합니다.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그 이 악문 마음을 생각합니다. 지키려는 마음을 지켜주지 못했던 마음을 생각하고 기대려는 마음에 기대지 못하게 했던 마음도 생각합니다. 왜 그런 생각은 오르막을 오를 때만 하게 되는지, 내리막에서 우리는 왜 내려가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하지 못하는지, 나는 늘 궁금합니다. 하지만 답 없는 질문은 모든 것이 답인 질문이나 마찬가지라서, 질문하는 마음이 더욱 어지러운 계절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잘 있습니다. 끼니를 잘 챙기고 커피를 줄였습니다. 미운 것들은 아무래도 알 수 없어서, 그런 마음에 기대지 않고 사는 삶을 생각하지요. 쌀을 안칠 때는 잡곡을 많이 섞으려고 합니다. 크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수록 작게 실망하니까, 실망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파와 달걀을 아낌없이 써서 상을 차리고, 다 먹으면 바로 일어나 삼십 분쯤 걷습니다. 마을을 에우는 길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다 있어서 잠깐을 걸어도 나는 오르락내리락해야 합니다. 오늘부터는 내려가는 길 위에서도 내려가는 것 말고 무엇이든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리막에도 이 봄은 묻었겠지요. 비가 또 그쳤습니다. 라일락이 다 피었는데 목련도 남았네요.


아득합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이 뭔지 알아? 사랑한다는 말이었어."

  "아마 다시는그 말을 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말은 뭘까?"

  "다시는 할 수 없는 말."

  "다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이란 말은 뭘까?“

_ 정영수, 우리들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물론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감각마저 잃는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

_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답은 없었다. 대단히 어렵고 풀기 힘든 질문에 인생이 던지는 일반적인 답을 제외하고는. 그 답은 이것이다. 하루하루 그날 할 일을 한다, 즉 잊는 것이다. 잠을 통해 잊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적어도 밤이 될 때까지는 귀여운 유리병 여인들이 불러주던 음악으로 되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 삶의 꿈으로 잊을 수밖에.

_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 읽은 ---



134. 나만의 사적인 미술관

김내리 지음 / 카시오페아 / 2020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을 공유하는 우리는 모두 우리 안의 고독한 미술관을 들여놓고 산다. 미술이 하는 일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마음의 어떤 공백이나 흉터, 얼룩을 작품으로 채우고 보듬고 닦아냈다면, 미술관을 들러 작품을 보고 오는 일은 내 안의 사적인 미술관에 새로운 작품을 거는 일이 된다. 미술이 미술관보다 완벽할 수는 있어도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책은 김내리 선생님의 사적인 미술관의 도면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읽어야 할 것은 그가 그 안에 지은 미술관이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의 미술관을 짓는, 혹은 이미 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 그림을 채워나가는 방법,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아래 예문은 단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미술관 역시 내게는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과 다를 게 없는 것. 나만의 사적인 미술관에 걸릴 작품들은 나의 덧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혼자서 할 일이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절망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회색빛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밤이 지나간 후에는 따스한 햇살이 반겨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어둠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럴 때 저는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그래,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다짐을 해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합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정리됩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바꿔봅니다. 내 마음만 달리 먹어야 한다니 조금은 억울한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순응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봅니다. 회색빛 밤 속에 반짝이는 별들이 이토록 크고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길 바라봅니다.

_ 김내리, 나의 사적인 미술관

 

 

 


135. 69_sixty nine

무라카미 류 지음 /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18

 

- 일독(기억도 안 나는 멀고 먼 옛날)

- 재독(기억날 듯 말 듯 한 먼 옛날)

- 삼독(210417)

 

지금 여기에다가 느낀 점을 뭐라뭐라 쓰고 있었는데, 한 서너 줄쯤 쓸 때마다, 음 이건 리뷰에 써먹는 게 좋겠군, 하면서 ctrl+x, ctrl+v로 옮기고 다시 썼다가 또 옮기고, 또 쓰고 옮기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에 쓸 말이 없어졌다. 남은 말은 재미있고 허망하다는 것. 뭐니뭐니해도 류는 역시 허망맛이지.

 

  "미안해."

  "?"

  "모처럼 데이트에서 그런 영화를 보게 해서."

  "그렇지만 명작이잖아?"

  ", 어떤 잡지에 소개되어 있더라."

  "과연 필요한 것일까?"

  ", 뭐라구?"

  "그런 명작이 필요 있을까 말이야."

  "무슨 의미?"

  "그 사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며?"

  ",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왜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영화로 만들지? 난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고?"

  "이 세상에는 잔혹한 일이 있다는 걸 난 알아. 베트남이나 유대인 수용소라든지, 그렇지만 난 일부러 그런 영화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왜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만 할까?"

  나는 할말이 없었다. 천사의 말뜻은 잘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보기 싫은 것, 더러운 것을 일부러 보여주는 것일까?' 아기사슴 같은 눈동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대답할 말을 잃고 만다.

  마쓰이 가즈코는 상냥하고, 예쁘고, 머리 좋고,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이다. <냉혈>에서 묘사된 셰게가 평화로운 생활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잠복해 있다고 해도, 또 그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천사가 한 말, "난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어"라는 것이다.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겨울 바다를 뒤로했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_ 무라카미 류, 69_sixty nine

 

 

 


136. 그때 너에게 같이 가자고 말할걸

이정환 지음 / 김영사 / 2021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곳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도 훌륭히 본업을 해나갈 수 있는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다시 나를 부르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그럴 수 있는 데에 용기와 의지 말고 다른 것이 필요치 않다면, 그걸 입증한 것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가 않아서 그럴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사실 작가 선생님도 그걸 입증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것. 아름다움까지는.

 

 

 

--- 읽는 ---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찾아서 / 존 그리빈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

화재 감시원 / 코니 월리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 이라영

걸어 다니는 어원사전 / 마크 포사이스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 아네르스 블록, 토르벤 엘고르 옌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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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8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밤의 연애편지? 남의 연애편지를 읽는건 적당히 멜랑꼴리해질 수 있어서 좋네요. ^^

syo 2021-04-18 02:06   좋아요 1 | URL
연애를 꾸준히 팔아서 적당한 멜랑꼴리를 사드리겠습니다ㅋㅋ 😂

2021-04-18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0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1-04-18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니? 가 또 문득 떠오르는 페이퍼네........... 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4-19 10:19   좋아요 0 | URL
자니 페이퍼 쓰기로 된 거 아니었어? ㅋㅋㅋㅋㅋ

수이 2021-04-19 10:21   좋아요 0 | URL
자니..... 페이퍼 안 쓴 이들 누구누구인지 체크중입니다. 제일 아련한 자니-로 당첨! 쇼님 완료 ✅ 락방님 완료 ✅ 누가 안 쓴 거 같은데....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4-18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고등학생 때 69읽고 따라한다고 학교 급식 거지 같다고 교장선생님한테 항의하는 자보 붙이고 수배됐잖아요 ㅋㅋㅋ저런 달달한 부분이 있었나 싶게 내가 뭘 읽은 건지 ㅋㅋ다시 읽어 볼까...

syo 2021-04-19 10:19   좋아요 1 | URL
그 이야기는 정말 언제 들어도 찰떡이라니까요, 반님 이미지랑.
곧고 굳건하게 잘 자라나셨네요^-^ㅋ

비연 2021-04-18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월의 결과는 어떤가요?

syo 2021-04-19 10:20   좋아요 1 | URL
좋지요~ㅎ

비연 2021-04-19 22:01   좋아요 1 | URL
굿. 8월 홧팅!

Angela 2021-04-2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뷰~~

syo 2021-04-22 18:04   좋아요 0 | URL
해발고도가 지나치게 높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