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가부장의 코골이

 

 

 

1

 

전공 이야기만 나오면 눈알이나 데굴데굴 굴리는 신세에서 탈출하고 먼 옛날 초라하게 말라 죽어버린 공대생의 야성을 회복하겠다는 포부 아래, 2021syo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바로 <반도체 책 읽고도 리뷰할 수 있는 남자>였는데, 그중 현재까지 달성한 것은 남자. ……, 첫술에 배부른데? 나머지는 쉬엄쉬엄 해 보기로…….

 

그러고 보니 전에 한 이웃께서 반도체 책 리뷰하시는 거 보고 기함한 기억이 있다…….

 

 

 

2

 

아주 어릴 적에, 아이들에게 슬기로운 생각을 전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이야기들이 잔뜩 든 두꺼운 만화책을 가지고 있었다. “명줄이나 부지하려거든 놀 생각 말고 그저 쉴 새 없이 열심히 일이나 해라 이 아랫것들아”(개미와 배짱이), “목숨을 구해줬으면 갚을 때도 목숨 정도는 내놓아야지 이 미미한 것들아”(은혜 갚은 까치), “살던 대로 쭉 살아라, 깝치지 말고 이 무지렁이들아”(서울쥐와 시골쥐).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 겨울날, 한 굶주린 남자가 제비 나는 거 보고 드디어 겨울이 끝나는구나 싶어 한 벌 뿐인 겨울옷을 팔아 그 돈으로 신나게 술과 고기를 사 먹은 거라, 근데 그럴 리가 없지, 다음날 한파는 여지없이 몰아치고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면서 남자는 마지막 힘을 모아 어제의 그 제비를 원망해보는데, 자세히 보니까 저쪽 구석에 그 제비도 얼어 죽어 있더라- 하는 이야기. 어린 syo는 역시 이 이야기도 한없이 고까왔지만 그래도 한 가지 교훈을 얻었는데 그건, 봄은 올 때까지 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사람은 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라는 문장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클리셰로 쓰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저 문장을 보고 어떤 시련의 끝과 새로운 행복의 시작을 자동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그런가, 한참 춥다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날을 만나면, 이 온기가 사실 겨울의 후퇴를 뜻하는 게 아니라 기후 위기의 습격을 의미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런 말을 꼭 하게 되는 것 같다. “, 봄이네 봄.”

 

안녕? 봄이야, 헤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니?

 

 

 

3

 

우리 집-도보-전철-전철-도보-토익 시험장 경로로 총 45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네이버가 알려줬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침 920분까지는 입실해야 하는데,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동 시간을 넉넉히 한 시간으로 잡으면 820분까지는 나가야 하고, 그러면 최소 720분에는 일어나줘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문제는 근래 syo의 수면 패턴이 03:30-09:30으로 고착되었다는 데 있었다. 아무래도 720분까지 일어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렇게 일어나면 몸뚱이는 일으켜도 뇌는 여전히 베개 베고 있을 각이라, 오랜만에 집에 온 에게 아침에 시험장까지 태워주십사 공손하게 요청해보았다. 차로 가면 20분 안으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강조했지만, 은 시험장이 어딘지 물어보기만 하고 위치 검색도 해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서울은 차 끌고 다니기 정말 위험한 도시야, 라고. 위험이란 어떤 것인지 즉시 가르쳐주고 싶은 욕망이 불처럼 일었지만 잘 참아냈다. 그래도 내가 아침에 깨워는 주께, 몬 일나서 시험 몬 보면 안 되지. 그러면서 자기 핸드폰을 이래저래 만지는 .

 

패턴이 왜 패턴이냐 하면 애를 써도 벗어나기 어려워서 패턴이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아니나 다를까 잠들지 못했다. 전날 아침 11시까지 자고 일어났던 역시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 같더니 2시를 넘어서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핸드폰 시계로 3시까지는 확인했는데, 어떻게 정신줄이 겨우 끊어졌다가 알람 듣고 일어났다. 은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고 그의 핸드폰은 아예 울리지도 않았다. , 어제 핸드폰 만진 거 그게 알람 설정한 게 아니라 주식 확인한 거였구만. 나는 씻고, 커피를 마시고, 빵 한 조각을 욱여넣고, 준비물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마스크를 차고, 820분에 집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를 난 널 믿어 잘 할거야 화이팅으로 애써 통역해보았다.

 

1210. 시험장을 나오며 핸드폰을 켜고 음악을 틀었는데 가수가 한 음절을 내뱉기도 전에 전화통이 울렸다. 이었다. 나는 찡한 감동을 느꼈다. , 이 새끼, 아침에 미안해서 차 끌고 근처에 데리러 왔구만 이거! 나는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syo : .

- 三 : , , 니 왜 전화기 꺼놨노.

- syo : ……뭐라카노, 니 토익 시험 안 쳐봤나.

- 三 : ? 시험 언제 끝났는데?

- syo : ……지금.

- 三 : ? 이상하네. 11시 끝나는 거 아니었나?

- syo : ……11시면 뭐 듣기는 끝났겠네.

- 三 : ? 9시에 시작해서 두 시간이면…….

- syo : ……내는 니한테 시험 시작이 9시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 三 : …….

- syo : 950분이라고 임마.

- 三 : ……맞나.

- syo : 내가 니한테 920분까지 데려다주면 된다고 어제 분명히…….

- 三 : , 그래,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

- syo : ……그래서 니 지금 어딘데?

- 三 : ? 집이지.

- syo : ……와 전화했는데?

- 三 : 아니, 나는 11시 끝나는 줄 알고, 언제쯤 오나 싶어가 전화했지.

- syo : 그게 와 궁금한데.

- 三 : 어제 니가 오늘 점심 차린다매. 배고프다 빨리 온나.

- syo :……?

- 三 : , 근데 오늘 메뉴 뭔데, 기대하고 있다.

  

밥하러 들어가는 언덕길은 어찌나 봄이던지, 슬프고 따스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함께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가는 문화는 수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노력에서 나옵니다신뢰는 신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자연조건에서 비롯되지도 않습니다사람들이 삶 속에서 부딪치고 깨지고 노력하면서 서로 쌓아가야 해요서서히 발전시켜야 합니다덴마크 사람들 사이의 신뢰는 수 세기 동안 쌓여온 것이죠협동조합 문화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에."

오연호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몰입 상태를 하이데거는 퇴락이라고 옮기기도 하는 탐락(耽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배역과 가면은 이 세계가 주었습니다이것들을 벗을 수 있느냐 없느냐이것들이 올바른가 아닌가와는 별도로 우리는 가면을 쓴 자신을 본래의 자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이 세계에 '기투'되어 어떤 배역에 따른 자기를 '탐락'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 배역이 이미 세계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은, ''의 의미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가 아닌 '세계'라는 뜻입니다더구나 세계는 인격을 수반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실제로는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이 내가 보이는 방식을 결정할 것입니다.

다카다 아키노리나를 위한 현대철학 사용법 

 

-무감하다관심이나 감각이 없다.

-다감하다감정이나 감수성이 풍부하다.

유선경어른의 어휘력

 

 

 

--- 읽은 ---



23. 궁금했어, 뇌과학

유윤한 지음 / 나수은 그림 / 나무생각 / 2020

 

나도 나도 궁금했어! 이러면서 골랐다. 애기들 보는 책인 줄 까맣게 모르고서 사이언스 틴스’ 6권을! 30분쯤은 읽었나?

 

밀리의 서재의 단점이 이거다. 책을 신중하게 고르지 않는다는 것. 빨리 결혼한 친구는 지금 틴스를 기르는 마당에 사이언스 틴스라니……. 알찬 것 같긴 한데, 사실 이 책이 어떻니 저떻니 판단하기가 쑥스럽다. , 말투도 삽화도 편집도 다 귀엽긴 했다.

 

사실 금이든 실리콘이든 무언가를 뇌에 심으면 상처가 나고 흉터가 생겨이런 흉터는 뇌와 컴퓨터 사이에 주고받는 전기 신호를 방해할 수도 있어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뇌에 이식해도 흉터를 만들지 않는 특수 물질을 개발하려고 애썼어덕분에 먼지처럼 작고흉터도 만들지 않는 물질을 뇌에 심을 수 있게 된 거야만일 내 머릿속에 이런 먼지를 뿌려 인터넷과 연결된 뒤뛰어난 인공 지능을 내 것처럼 쓸 수 있게 된다면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겠지?

유윤한궁금했어뇌과학

 

 

 


24. 다시, 헤겔을 읽다

이광모 지음 / 곰출판 / 2019

 

헤겔의 전체 철학에 대한 입문서는 아니고, 정신현상학만 다루는 책이다. 다른 건 그 범위 안에서 도움이 될 만큼만 거들 뿐. 쉽고, 헤겔 책 입문서답게 지루한 동시에 헤겔 책 입문서치고는 덜 지루한 편이다. 재독, 구판까지 포함하면 3독이고, 딱히 더 얹을 평은 없다

 

진리도 마찬가지일 터이다인간은 그 종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진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까지의 시행착오는 새로운 길로의 약속이 될 수 있으며그 길은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희망의 길일 수도 있다그러니 진리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이름을 사랑하고 노력할 일이다.

이광모다시 헤겔을 읽다

 

 

 


25. 때론 대충 살고 가끔은 완벽하게 살아

구선아 지음 / 임진아 그림 / 해의시간 / 2020

 

에세이를 많이 읽은 탓일까, 참 이런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할지 늘 난감하다. 안 좋은 것은 아닌데, 딱히 뭐가 없는 느낌이랄까. 예를 들어 한 꼭지의 마무리가 이런 식이라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두었거나 정력이 좋아서, 진짜 용기가 충만해서가 아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 그때 해 볼걸……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나서 이게 아니었네혹은 실패했어도 그래도 재밌었지라고 돌아보거나 운이 없었어라고 핑계를 대 보는 게 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생각보다 멋지게 해낼 수도 있으니까.


뭐랄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의 문장으로 써낸 것에 그친 건 아닐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이라는 물건에 대해 어떤 과도한 욕심을 들이대고 있는 걸까? 그림 그리신 임진아 작가님의 에세이 『빵 고르듯 살고 싶다』는 읽으면서 마음이 훈훈해지고 그랬었는데….  

 

  오늘은 나를 위해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읽고 쓴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 위대한 글을 쓴다면나는 상처 없이 조용히 읽고 쓰는 삶을 살고 싶다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그리고 잠깐의 스치는 바람과 아름다운 문장 하나로도 웃을 수 있는 오늘을 위해.

구선아때론 대충 살고 가끔은 완벽하게 살아

 

 

 


26. 공부하기가 죽기보다 싫을 때 읽는 책

권혁진 지음 / 다연 / 2019

 

저 제목은 뭔가, 책에 대해서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느낌이다. 딱 그래서 읽었다. 얼마 전에 읽은 같은 장르의 다른 책에 비해 훨씬 실용적이다(근데 그 책이 훨씬 잘나가는 중). 마음가짐, 믿음, 우주의 도움 뭐 이런 허망한 소리라든가,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라, 겸손해라,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 뭐 이런 추상적이면서 당연한 소리만 늘어놓는 책은 아니고, 요런 방식으로 해봐라, 나는 요렇게 공부했다, 요럴 땐 요렇게 극복했다 뭐 이렇게 정말 액션 단위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실용서다.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멋진 일이다누군가가 먼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결과만 보고 그러한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하지만 그건 대개 살면서 어떠한 노력도 해보지 않은 사람의 말일 것이다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현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당신이 어떠한 이유에서 공부하든 상관없다자신의 삶에 충실한 모습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고 누구도 뭐라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당신의 그러한 삶을 응원할 것이다.

권혁진공부하기가 죽기보다 싫을 때 읽는 책

 

 

 

--- 읽는 ---

무질서의 효용 / 리처드 세넷

그래도 우리의 나날 / 시바타 쇼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덧없는 꽃의 삶 / 피오나 스태퍼드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 강신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안드레 애치먼

육식의 성정치 / 캐럴 J. 아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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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1-24 2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를 읽는 길은 어찌나 웃음길인지. . . 봄날의 처녀처럼 깔깔대며 웃었어요. 고마워요. syo님. 덕에 잠깐이나마 한 30년 전으로 돌아갔음요 ㅋㅋ 글구요, 전 syo님이 셤을 잘봤을거라 믿음요^^

syo 2021-01-24 22:11   좋아요 2 | URL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깔깔글이 잘 안 되네요. 그냥 손 가는 대로 쓰면 웃기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없었나?
읽기님께 소소한 웃음이라도 드렸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구슬펐지만 ㅎ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1-24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시 밖에 나갔는데, 오늘은 정말 봄이 온 것 같이 따뜻하고 하늘이 파란 좋은 날이었어요. 토익 준비하는 와중에도 많이도 읽으셨다. 난 뭐 한 겨...

syo 2021-01-24 22:13   좋아요 2 | URL
남쪽 동네 나무에는 빨갛고 예쁜 꽃이 피고 그 사이로 벌이 날았다네요. 좋은 날이었어요.

제 네 권은 정말 마음 먹고 읽으면 하루에 다 읽을 수도 있는 경량의 책들입니다. 무거운 책들을 끈기 있게 읽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네요.

2021-01-25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1-2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syo님이랑 저랑 공통점 발견!! 3:30~9:30!! 저도 첫술에 배부른 걸요? 그럼 됐죠, 뭐!!ㅎㅎ

syo 2021-01-25 13:16   좋아요 1 | URL
그럼요! 중요한 건 배부른 거죠. 숟가락 숫자는 숫자일 뿐입니다! ㅎㅎㅎㅎ

2021-01-25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7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운 2021-01-26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三씨 내가 때려줄게

syo 2021-01-27 01:40   좋아요 0 | URL
저래봬도 이 집 가장이다. 밖에 나가서 돈 벌어옴.
역시 자유와 인권은 경제력이다.

비연 2021-01-2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三님이 귀여운 걸까요.. 휘리리릭 =3=3=3=3

syo 2021-01-27 01:41   좋아요 1 | URL
왜냐면 같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할 것 하나 없어요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