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정해졌다

 

 

 

낮잠을 자려고 누웠거든. 비몽사몽 골짜기를 헤롱헤롱 지나고 있는데 누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거야. 반품 택배 신청하셨죠? 내일 오실 줄 알았는데요. 코로나라서요. ? 코로나요. ……?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 나니 잠이 달아나고 말았지. 아무 생각 없이 폰을 들고,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네이버에 들어가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뉴스를 보다 보니, 아 글쎄 경기도에서 배달특급이라는 공공 앱을 출시했다는 거야. 이재명 지사가 배달특급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더라고. 거대 배달 서비스 업체의 전횡으로부터 소상공인과 도민을 지키려고 만들었대. 그런 훌륭한 취지를 감지했는데, 훌륭한 경기도민으로서 어떻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우리 도의 공정한 경업질서 확립과 소비자 편익 증대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당장 치킨을 시키기 위해 앱을 설치했지. 그런데 앱을 켜 보니까, 내가 사는 성남시는 아직 서비스 전이네? 서비스 일정표를 봤는데, 2021 일정에 우리 동네는 없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의 사명감과 당황해서 눈알만 굴리는 나…….

 

그렇게 잠깐의 패닉 상태가 지나갔고 남은 거라곤 뜨거운 원망과 분노뿐이었어. 어떻게 이 사회는,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시민의 참한 마음을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는 데 능숙한가. 도대체 왜 이 사회는, 거룩한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좌절하고 상처 입을 개인의 여린 감성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무심한가. 도대체 왜, , ! 참을 수 없다! 이대로라면 큰 사고를 칠 것만 같아! 도저히 안 되겠다, 사고를 칠 바엔 차라리 치킨을 시키자! 좋아! 도시의 평화를 위해 나는 오늘 치킨을 시키는 거야! 두 마리를 시키자! 이 태산 같은 울분을 누르고 태평양 같은 분노를 잠재우려면 닭 다리가 족히 네 개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대의명분 빌드업 G렸다.

 

 

 

다시 말해 진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이익이 되는 특성은 무조건 선택된다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이를테면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 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하겠군좋아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톰 필립스인간의 흑역사


최근에 내가 말이야꿈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그 의미를 알려 주는 책 몇 권을 읽었어그런데 간밤에 자네가 돼지 머리를 하고 있는 꿈을 꾸지 않았겠나그건 자네가 돼지라는 소리라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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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아하는 것에는 손이 저절로 가는 법이지어쩔 수 없어돼지는 손을 내미는 대신 코를 내밀지돼지는 말이네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두고 코앞에 맛있는 음식을 놓아두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 코끝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더군맛있는 음식에 닿을 때까지 늘어나는 거지정말 집념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니까.”

나쓰메 소세키산시로


  

 

--- 읽은 ---

 


229. 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

 

스무 살, 그것은 정말 설레는 단어다. 아직 스물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벌써 스물을 지나온 이들에게도. 표제작 스무 살에 아무래도 녹아있을 김연수 선생님의 자전적 정보를 읽으며, 나는 스물에 어디서 뭘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다가 기분이 더러워졌다. 젠장, 그 좋은 스무 살을 암담에 참담을 얹고 비참에 비루를 더하면서 소진했단 말인가. 그대로 책을 집어던지려다가 내 스무 살을 망친 건 책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에 책을 그대로 내려놓고 나를 집어 던졌다. 침대 속으로. 한잠 자고 좀 눅눅해진 마음으로 다시 읽었는데, 과연 좋았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읽느라 수고했다며 선생님께서 약을 발라주셨다.

 

생에서 단 한 번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모두들.

김연수스무 살

 

처음 읽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요즘 사는 꼴이라는 게. 부디 잘 살아야겠다.

 

 

 


230.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

 

syo란 놈의 성벽이란 저런 아련한 제목을 만나면 여지없이 흐물흐물 왈카닥 무너져내리는 물벽돌이라서, 작가가 설터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들춰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쓰지 않으면 사라져요라는 말이 설터의 입에서 나왔으니(그렇다면 “젊은 친구,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지.” 정도가 어울릴까?) 즉시 장바구니로 갈 밖에. 그런데 잡은 물고기의 운명이 늘 굶주림으로 귀착되듯, ‘산 책역시 언제나 읽을 수 있으니 언제나 읽지 않는 기이한 운명을 두르고 책장 속에서 먼지만 뒤집어 쓴다. 그렇게 천대의 세월이 축적되고, 어느날 우연히 책장을 뒤지던 주인의 손에 재발견되어 애절한 표정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읽지 않으면 말일세, 젊은 친구, 확 사라져 버릴 걸세. 좋을 줄 알았지만 좋았다.

 

설터 할아버지께 죄송스럽게도, 스키로 유명한 도시에 대한 리뷰랄지, 미국 육사에 대한 홍보글이랄지 하는 것들은 그냥 넘겼다. 설터 할아버지가 아니라 설터의 할아버지가 온대도, 안 읽어도 될 글이나 읽어도 뭣도 안 될 글은 읽지 않는다.

 

거투르드 스타인은 왜 글을 쓰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찬사를 받으려고요." 로르카는 사랑받으려고 글을 쓴다고 말했다포크너는 작가란 영예를 얻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나도 가끔은 이런 이유들로 글을 썼겠지만콕 집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대체로 내가 글을 쓰는 까닭은 어떤 대화로도또는 어떤 일련의 사건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세상비록 위대한 소설들이 감행하는 시도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기는 하지만어떤 소설도 완벽히 옮겨낼 수 없는 세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설터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231. 사치와 평온과 쾌락

장자크 상페 지음 / 이원희 옮김 / 열린책들 / 2018

 

안다. 이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고, 그의 그림이, 그림 옆에 붙은 촌철살인의 말들이 든 책에 소장한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알게된 지 벌써 한참 되었는데도, 그래도 이걸 사서 집에 두면, 아 차라리 다른 책을 사서 볼 건데- 하는 후회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그간 없었던 것이다. 밀리의 서재 사랑해요…….

 

언제나 똑같은 꿈이에요펠레가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플라티니에게 공을 패스하면플라티니는 골인을 시킬 수 있는 기차게 좋은 상황에서 내게 공을 차주죠나는 냅다 슛을 날려요비웃으면서 한 손으로 공을 막는 골키퍼는 내 마누라예요.

장자크 상페사치와 평온과 쾌락

 

 

 


232.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지음 / 강유나 옮김 / 열린책들 / 2010

 

내가 앞으로 한동안은 극문학은 읽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 등등이 휘몰아쳤다라고 쓴 게 고작 닷새 전인데……. 나조차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개똥 같은 결심을 뭉개고 읽게 되었는데, , 좋았다. 부디 syo님이 이번 주 안에 리뷰를 작성해서 올리면 좋겠다(유체이탈).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건 큰 실수예요갈매기나 물고기였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지금의 나는 한 번도 진짜 집을 느껴 보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아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고 어디에도 녹아들지 못하고 언제나 약간씩 죽음을 갈망하고 있는 인간일 뿐이죠!

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

 

 

 

--- 읽는 ---


마흔에는 잘 될 거예요 / 권수호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 정인성

혼자 있기 좋은 방 / 우지현

도시로 보는 유럽사 / 백승종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 이보람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 정상훈

나는 수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 롭 이스터웨이

공부는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 이종훈

베르그손 / 황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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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2-0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임스 설터 별로였는데 인용해주신 구절 읽으니 관심이 생겨요. 설터는 표지는 제 스타일인데 아직 한 권도 안 읽어봤네요.
닭다리 네 마리로 태평양 분노가 잘 마무리되었다죠! 기분 좋게 두 마리 시켜라. 세리 언니 말씀 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12-03 21:58   좋아요 1 | URL
설터를 한 권도 안 읽어보셨다면, 단편집 <어젯밤>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작가들의 작가라는 칭송을 받는 설터의 아름다운 문장을 노리신다면 장편 <가벼운 나날>을 추천합니다.

레삭매냐 2020-12-0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터 자신은 <스포츠와 여가>와 <가벼운 나날>
을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더군요...

syo 2020-12-06 21:4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마음이 어쩐지 이해가 갈 것 같아요.
<스포츠와 여가>는 본격적으로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첫 작품일 테고,
<가벼운 나날>은 정말, 정말 아름다우니까요.....

cyrus 2020-12-03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보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저는 설렜다고 하기 보다는 ‘설레발’친 것 같아요. 진짜 스무 살이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라고 떵떵거렸는데, 정작 제대로 한 건 없었어요. 이제야 정신 차리고 시작하려고 하니까 군대 영장이 날아와서 또 물 건너갔죠.. ㅎㅎㅎ

syo 2020-12-06 21:50   좋아요 0 | URL
그때 하고 싶은데 못하고 지나친 것 중에 아직 못했거나 이제는 못할 것들이 많아서 서글프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12-04 0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킨은 옳으니 옳은 일 하셨어요 꿀꿀

syo 2020-12-06 21:5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치킨의 ㅊ만 나와도 침이 고인다니까요. 침킨인가

2020-12-04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6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0-12-0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진 오닐 극 사랑하지만 읽다보면 우울함에 풍덩 ㅋㅋ

셜터 할배 콜로라도에서 빵집(베이커리 샵) 하셨어요.
아주 오랫동안 ,,,,
빵 반죽하다가 또다시 글쓰기로,,,
쓰고 또 쓰고 또 쓰는 삶이 자신에 운명이라고 하쉼 *ㅅ*

syo 2020-12-06 21:52   좋아요 0 | URL
설터옹이 직접 빵 반죽을 했다구요? ㅋㅋㅋㅋㅋㅋ
아 멋지긴 한데 왜 되게 맛없을 것 같지?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