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t-able

 

 

1

 

시간이 좀 생기면 꼭 역사책에 욕심이 난다. 특히 사소한 것들의 역사에.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뇌를 달고 사는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인정받는 역사에 몰두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이랄까. 뭘 이런 것까지 책으로? 싶은 것들을 읽을 때 얻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다. 그것은 지금 이 독서의 시간이 다른 무언가를 위한 씨앗이나 거름이 되지 않고 그대로 삭아 없어질 것이며 기꺼이 그래도 된다는 익명의 너그러움에서 생겨난다. 가끔은 책이 나를 읽도록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암기며 토론 같은 것들은 멀찍이 밀어두고, 순해지는 것이다. 하다는 것은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거스르고 거슬리는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조차 늘 나를 거스른다면 내가 너무 불쌍해지니까.

 


자신의 여가를 의식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여가를 즐기는 것이지요그러나 반쯤만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의 상태를 알려면 남의 안내가 필요하거늘그런 사람이 어찌 자기 인생의 어떤 순간에 대해서든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어요?

세네카인생이 왜 짦은가


 

2

 

결국 사람을 바꾸는 것은 사건 아니면 습관이다. 의지가 아니라. 빨아서 말린 옷을 개켜서 정한 자리에 두자, 바닥청소를 거르지 말자, 먼저 읽어야 할 책을 먼저 읽고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하자, 이런 소소한 리스트들을 만들고 지키는 데 망설이지 않는 것.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문득 공()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 그르니에


 

 

3

 

허경 선생님은 섹슈얼리티는 번역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셨다. 번역할 수 없는 말을 만났을 때 겸손하게 에두르고 싶다. 그것도 능력이다. 번역할 수 없겠구나- 알아채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번역할 수 없는 것이 말뿐만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늘 벽이고, 마음은 마음에게 늘 절벽이다. 겸손하게 에두르고 싶다. 거기에 그대로 두고 빙글빙글 돌아 전모를 파악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옮기지 않고 침묵하고 싶다.

 


잊기 위해 두고 왔는데 두고 와서 잊을 수 없게 된거기서우리의 모든 창문을 타고 또다시 미끄러져내려올 때 그게 너와 나의 한때소나기라고 하자 그리하여 이곳이다 네가 너를 버린 실종의 곳간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는 소음을 들으며 여전히 숨어 잠이 드는

최현우오늘」 부분


 

 

4


 

홀링데일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젊은 니체가 한때 앓았던 질병으로 취급한다. 그의 서술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모순으로 가득 찬 한없이 비루한(그러나 그 문장만큼은 높이 살 수 있는) 교설로 그려낸다. 그 영향 아래서 탄생한 니체의 비극의 탄생역시, 부분적 성취는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극복할 수 없는 이분법에 사로잡힌 망작으로 여기는 듯하다. 애와 증이 섞인 그런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깔아놓은 서술의 포석이 정교한지 아닌지는 전공자가 아닌 syo가 차마 알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홀링데일이 니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그리고 심지어 그 말들을 이제껏 많이 해 와서 꽤 익숙하기도 하다는 것은 알 수 있겠다.

 

 

 

 

--- 읽은 ---

 


99.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지음 / 김지영 옮김 / 앳워크 / 2019

 

검과 비교했을 때 창이 가지는 장점은 단연코 간격이라 할 수 있다. 창이 아닌 무기를 든 적은 그 간격을 이겨내기 어렵다. 무기를 든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내 손에 든 것이 창이라면 선제공격은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점 역시 간격이다. 검을 든 상대가 창날 안쪽으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창의 효용은 극히 떨어진다. 창은 찌르는 무기이므로, 근거리에서 베거나 두들겨 패는 무기와 맞서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인간은 저마다의 기량과 선호에 따라 창과 칼 중 어느 하나를 더 잘 다루게 된다.

 

무기의 세계는 폭넓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무기가 이럴진대, 삶이라는 거대한 관념을 사냥하기 위한 비가시적 무기는 또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지 알려주겠다는 책은 대체로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데 그친다. 1. 독학은 어쨌든 삶의 무기가 되긴 한다. 2. (저자)는 독학을 이렇게 삶의 무기로 썼다. 이 두 사실이 합쳐져서 3.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당신도 독학을 벼려 삶을 찌르고 베는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낳아주면 참 좋겠으나, 그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활을 잘 다룰 수 있도록 살아온 당신에게 이 책이 철퇴를 쥐여줄 수도 있다. 결국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 그건 자명한 일이다. 독학의 독은 홀로독 자를 쓴다.

 

 

 

100. 100개의 명언으로 보는 철학

개러스 사우스웰 지음 / 서유라 옮김 / 미래의창 / 2019

 

100개의 명언으로 보려 들면 잘해봐야 100개의 명언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지? 철학이 우리 삶에 손길을 뻗치는 장면을 잘 관찰해보면, 뜻밖에 그것은 하나의 생각이라기보다 한 줄의 문장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하나의 문장도 충분히 사람을 바꿀 수 있다. 단지 그런 문장을 만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 책 안에 있는 100개의 문장이 당신의 구미에 딱 맞아들어가는 지혜였으면 좋겠다. 어려운 바람이다.

 

 



101. 처음 읽는 논어

공자 지음 / 홍승직 옮김 / 행성B / 2016

 

논어책은 세상에 많다.

 

 



102.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캐슬린 배리 지음 / 정금나, 김은정 옮김 / 삼인 / 2002

 

발췌를 위해 총 70페이지 정도를 사진 찍었다. 그 속에서 한 문장을 따온 경우는 거의 없다. 문단 전체를 챙기거나 심지어 페이지 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다.

 

 

--- 읽는 ---

생쥐 혁명 / 민지영

프로이트 심리학 강의 / 베벌리 클락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인생을 바꾸는 건축 수업 / 김진애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 사라 밀스

니체 그의 삶과 철학 /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생전 유고, 어리석음에 대하여 / 로베르트 무질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 갖춘 ---

헤겔 또는 스피노자 / 피에르 마슈레

세계 경제가 만만해지는 책 / 랜디 찰스 에핑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 조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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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8-20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좀 무서워요.

syo 2020-08-20 22:34   좋아요 1 | URL
응?? 어디가요?? 😂

반유행열반인 2020-08-2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권 돌파를 축하하며...올해는 제가 조금 더 먼저 돌파 ㅋㅋㅋ 무기가 필요없고 싸움이 필요 없는 세상에 살고 싶은데...저 비겁한가요ㅠㅠ

syo 2020-08-20 22:35   좋아요 1 | URL
100권도 겨우겨우 왔어요. 벅찬 한 해네요.
어우렁더우렁 사랑하며 삽시다....

수이 2020-08-20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짱인데

syo 2020-08-20 22:35   좋아요 0 | URL
🤔🤔🤔🤔

비연 2020-08-2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 하는 페이퍼.. 흠..

syo 2020-08-22 00:04   좋아요 0 | URL
<섬>은 두고두고 읽는 책이지요!

단발머리 2020-08-2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쇼님 감상 읽고 나니 더 읽어보고 싶어요.

결국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 쩜쩜쩜.

syo 2020-08-22 00:04   좋아요 0 | URL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은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치만 알아서는 너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