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바이
1
시작과 동시에 금방 끝날 것만 같아 사람 불안하게 만들던 연휴가 금방 끝났다. 여지없다. syo는 마카롱을 씹어먹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네 개만 사도 두 사람이 호주산 소고기로 한 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가격이 나오는 미친 간식 마카롱은 커피와 같이 먹으면 맛나다. 일주일 전쯤 얼음 곽을 구매한 덕에 커피는 아이스커피. 어쩐지 비리다. 마카롱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부지런한 나의 룸메 三이 얼음 곽을 비틀고 흔들어 통에다 얼음을 모으고 있다. 가끔 저렇게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실할 때, syo는 많은 것들을 용서하게 된다. 그의 무심함, 그의 불결함 등등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저 정갈한 연속 동작을 좀 보라지. 얼음 곽을 비튼다. 큰 그릇에 얼음을 쏟는다. 얼음 통에 붓는다. 얼음 통의 뚜껑을 닫는다. 싱크대 수돗물을 튼다. 얼음 곽을 가져다 댄다. 곽에 물이 가득 차자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그걸 냉동실에 넣고 앉았다……. 그래. 아이스커피가 비린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커피 머신에 수돗물 넣어서 만든 커피에 수돗물 얼린 얼음을 띄워놓고 고급지다 폼난다 아주 좋다고 마셨던 모양이다.
저놈의 무심함과 불결함을 용서하기가 힘들다. 마카롱, 마카롱…… 마카롱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한다. 살인을 면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단돈 8,000원. 三의 목숨값은 헐하다.
2
저와 제 가족 중 누구 하나 크게 아파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본인한테는 행복한 일이겠지만(그걸 알긴 알는지), 같이 사는 사람한테는 불쾌한 일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사건이 터지고 한 달이 지나도록, 저 친구는 집에 돌아와도 손을 씻지 않았다. 그냥 옷 갈아입고, 컴퓨터 하고, 드러누워 있고, 그러다 요리나 하게 되면 흐르는 물에 잠깐 손을 적셨을 뿐. 쟤가 마스크라는 걸 차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에, 세상에는 이미 마스크 5부제가 실행되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정말 무서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아파 본 적이 없어서 아픈 게 얼마나 무섭고 지치는 일인지 쟤는 모른다. 위생 관념 없는 인간으로 35년을 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그가 전생에 쌓았을 공덕에 무한한 갈채를 보낸다.
3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 윤곽선을 그려나가는 데서 책은 시작한다. 그것은 지난한 일이다. 증거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내놓아야 하는 법이다 보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 하나도 없는데. 인간이여, 인간의 불상사란 내가 내 주변이 어떤지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는데도 나만은 그걸 다 안다고 착각하다가 터지기 마련이라오. 각설.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해 본 이들이 듬직하다. 운이 좋아 온몸에 이런저런 증명들을 바르고 태어나는 바람에 증명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의 말보다 무겁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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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좌절은 지식과 정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조명의 문제이지 사물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량을 늘린다고 삶의 자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식의 축적이 곧바로 좋은 삶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인문학자 자신의 삶이 보여준다. 게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제도와 관행이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인문 지식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인문학자 자신이 그런 지식의 생산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_ 고병권, 『묵묵』
이는, 다시 한번 맑스의 문장으로 말한다면,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세계 질서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생산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 비-철학(프롤레타리아!)을 통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탄생시켰고 자신을 말 그대로 무산자(프롤레타리아)로서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창조하는 것.
_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4
아무것도 증명해보지 못한 사람보다 더 어려운 적은 피나는 노력으로 한두 가지를 증명해 본 사람 중에서 나온다. 내가 직접 증명한 것들이 내가 아직 증명하지 않은 것들의 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 내가 증명한 것에 비하면 네가 증명할 것은 작고 가벼운 것일 뿐이므로 나는 증명 없이 너를 증명할 수 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5
야구 시작한 모양이다. 봄이군.
6
연휴라고 간만에 여유롭게 책을 좀 읽을 수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급한 대로 어느 정도 수혈은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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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고민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아마 내가 망가지면 그건 책을 못 읽어서야.“
_ 김필균, 『문학하는 마음』
7
철학책을 (다시) 시작할 때는 스피노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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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하면 기냥 스티븐 내들러 선생님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하긴 한데 낡을 대로 낡아서, 거기서 시작하면 오히려 그들의 위대함을 느낄 수 없고, 다른 철학책을 읽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쳐다볼 때에서야 간신히 위대하다. 그 다음으로는 데카르트가 눈에 띄긴 한다만, 21세기 사람들이란 정규교육만 마쳐도 데카르트 쌈 싸드시는 회의懷疑의 인간이 되는데, 심지어 여기가 코리아인지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회의/의심을 넘어 불신의 달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주민등록증을 받는다. 그 바람에 데카르트는 연구의 대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독서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삐꾸다. 멍뭉이는 기계라는 둥,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전제를 싸그리 의심해가며 내린 결론이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둥, 읽고 있으면 회의/의심을 넘어 불신이 생기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가 있다. 무엇보다 감정과 욕망을 똥으로 본다.
여혐을 하면서도 여혐인 줄 모르고, 자본의 방식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하여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가장 입에 많이 올린 단어가 ‘객관적’, ‘중립적’, ‘논리적’이었으므로 syo는 그날 이후로 그 단어들이 기본적으로 역겹다. 그리고 그가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며(그것이 그 나이에 그만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며) 같잖게 데카르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이후로, syo는 데카르트가 해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같잖은 인간에게는 모든 철학이 해롭다.
스피노자를 읽기 전에 스피노자를 읽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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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가 대답했다. 「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나는 음식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저 소년이 우뚝 선 것처럼 당신도 혼자 힘으로 서십시오. 나는 당신을 구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시를 숭상하는 사람은 정신과 진실 속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_ E. M. 포스터, 「천상의 합승 마차」
어떤 사람이 경계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작은 기술이라도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스스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믿게 되면 점점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되면 작게는 욕과 비난이 온몸을 덮고, 크게는 재앙과 환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제 그대가 날마다 문자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힘써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만들자는 것인가?" 이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말했다. "감히 경계하지 않겠는가."
_ 이덕무, 『이목구심서 4』
--- 읽은 ---
40. 사랑 밖의 모든 말들 / 김금희 : 128 ~ 231
말들이 있었던 것이다. 풀어놓기 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안에 있음으로써 삶을 충만하게 하고 충만함으로써 안을 부딪는 말들이 있었던 것이다. 생의 어느 곡면을 휘감고 도느라 알록달록 물든 말들. 어느 날은 젖었다가 어느 날은 메말랐다가 꾸글꾸글 주름으로 남은 말들. 종이 한 장 마주하고 앉은 어떤 날, 맑았거나 흐렸거나 했을 어떤 시간에 나는 뭔가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뭔가 말했고, 그 순간 내 삶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회전했을 것이다. 자기 안에 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다시 그것을 모르던 때처럼 살 수는 없다. 결코.
사랑 안에서든, 밖에서든, 누구도 모든 말들을 다 할 수는 없어서, 이 책이 있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내가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무엇까지 말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이 책은 존재할 수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겨냥한다면, 우린 모두가 이 책을 함께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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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 ~ 96
그게 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교과서로 배웠던 시를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일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학창 시절 싫다고 싫다고 손사래 쳐도 지겹도록 달라붙던 그 아이를, 교복을 벗고 다시 만났는데 그 찰랑대는 숏컷하며, 봄빛 같은 분홍분홍 입술하며, 왼손으로 머리를 넘기는 자태하며, 우와, 얘를? 얘를 깠다고? 내가? 하게 되는 그런 느낌 비슷하달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비슷한 일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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