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야 메리 하니? 너라도 메리 하면 나는 됐단다 허허허

 

 

1

 

설날에는 윷놀이, 추석에는 강강술래, 단오에는 쥐불놀이,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연등 날리고.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에는? 단연 공기놀이다.

 

크리스마스 세시풍속으로서 공기놀이는 유서가 깊다. 그러니까 때는 지난 세기, 노스트라다무스가 어쨌다더라 밀레니엄 버그가 저쨌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난무하던 흉흉한 시절이었는데, 때마침 중2병을 대차게 앓던 syo와 그의 친구 일당들은 죄다 솔로였으니, , 연애 같은 거 우린 몰라요 컨셉이라 평소에는 게임에 노래방에 행복하기만 했던 그들도 들은 풍월은 있는지라 크리스마스만 되면 마음이 참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시내는 미친 캐롤의 파도와 그 위를 서핑하는 커플과 커플과 커플과 커플들이 점거하여 우리 같은 아이들은 죄도 없이 죄지은 모양으로 방구석에 숨어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syo와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 이누, 호밀 등등은 syo의 집에 모여 치킨 다리를 죽창처럼 허공에 찔러가며 크리스마스를 탄핵하고 혁명을 도모했다. 그래봐야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올해는 지구가 멸망한다 그래가지고 크리스마스 이런 거 안 올 줄. 왜 안 해, 멸망?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오지 않고 지나간 멸망을 아쉬워하며, 우리는 두 마리 치킨을 조졌으니 묻고 다시 피자 더블로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던 동생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사뿐사뿐 제 책상으로 다가가 그즈음 한참 버닝하던 공기, 공깃돌을 챙겨 들었다. 역시 그즈음 내 동생이 한참 귀여워 어쩔 줄 모르던 이누가 자기 몫의 닭다리를 동생에게 주었는데, 얘가 꽤 감동을 받은 눈치로 닭다리를 받더니 대신해서 공깃돌을 이누의 손에 건네놓고 후다닥 방 밖으로 나갔다.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때부터 해서 syo가 솔로로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던 2005년까지, 크리스마스만 되면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다들 내일 뭔 날인지 알지?), 웬만한 약속은 취소하면서까지(엄마 미안, 연말 가족여행도 좋지만 나는 공기놀이를 해야 돼서요), 어딘가에 모여 치킨 두 마리 피자 두 판을 시켜놓고 1000점 내기 공기 필리버스터를 벌여왔던 것이다.

 


 

2

 

2015년에는 이 풍속을 각색하여 아래와 같은 짧은 글을 썼고, 5만 원인가에 팔아먹었다(문 작가님 눈 먼 돈을 인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 보니, 써선 안 될 단어들이 몇 개 보이지만 그게 다 syo의 후진 인성이 지나온 궤적이므로 이번에는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리는 것으로.

 

 

공기 삼각지대

 

시커먼 남자 셋이서 크리스마스면 골방에 모여 앉아 공깃돌을 놀리는 이 패색 짙은 연례행사가 어느덧 15년째로, 세 친구는 무사히 서른이 되었다. 지나치게 무사히. 기를 쓰고 열심히 살았건만, 손닿는 데까지 여기저기 껄떡거려도 보았건만, 돌아온 것은 소소한 쌍욕들이고 남은 것은 개도 안 핥을 지저분한 평판뿐. 결국 올해도 이 자리까지 오고야 말다니, 그야말로 코끝이 찡하다. 도대체 무슨 문제로, 내리 15년을?


결국 남자는 돈이라니까. 두 알 잡기를 성공한 A가 세 알 잡기를 위해 공깃돌을 뿌리며 말했다. 드문드문 몇 번의 짧은 연애를 겪은 A는 연말만 되면 산란기 연어처럼 솔로 부대로 복귀하는 자신의 희한한 팔자를 한탄하며 이 시대 여성들에게 만연한 물신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는 여자들이 자신을 돈 없는 놈으로만 볼 뿐, 진정한 가치를 몰라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자들은 그를 돈 없는 고릴라로 보고 있다는 지점이 문제적이다.


그러니까. 여자들 마인드가 구리다니까, 오 년. 채어 잡기를 무난하게 성공하는 A의 손등을 보며 B가 점수를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B는 구애 활동을 활발히 펼치지 않은 지가 꽤 되었는데, 이는 몇 해 전 오늘, 손등에 올린 공기 다섯 알을 강하게 채어 잡는 A의 굵은 손목과 그 손등에 난 검은 터럭들이 문득 섹시해 보이고부터였다. 미친 게 분명하다며 스스로를 강하게 꾸짖던 시간도 있었으나, 이틀에 한 번 꼴로 꿈에 등장해 묵묵히 공기알을 잡아채는 A의 우직한 공세에 B가 어느덧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상태라는 것이 문제적이다.


난 이제 인생에 여자가 꼭 필요한 건가 싶다? 좋은 친구만 있어도 충분히 성공한 인생 아니냐? 말을 마친 C는 그러거나 말거나 A만 보고 있는 B를 본다. C에게 이제 여자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C는 요즘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병신 같은 이 두 친구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매년 자기 방에서 열리는 이 병신같이 안정적인 공기판이 주는 말 못할 소속감은 또 어떻고. 어떻게든 지키고 싶다, 이 병신들과 병신 같은 시공간을. 그러나 얼마 전부터 A를 보는 B의 눈빛이 사뭇 달라진 것이 C의 고민이다. 긴 세월 정삼각형이었던 그들의 앉은 꼴이 요즘 들어 자꾸 심각하게 이등변삼각형으로 변형되는 것이 불안하다. 게다가 B, 저 병신이 아무래도 오늘에야말로 뭔가를 고백하리라 마음먹은 것 같다! A에게 다가앉으면 다가앉을수록 뭔가 그 사이로 터져 나올 것처럼 달싹거리는 B의 저 주둥이야말로 문제적이다.


A가 저 혼자서 30년의 점수를 쌓아올린 시점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우와, 발 꼬랑내 작렬, 창문 좀 열고 하지? 추워, 이년아. 오빠들, 올해도 또한 열라 한심하거든요? , 닥치고 치킨이나 내려놓고 꺼지지? , 저 되바라진 년. 저러니 시집을 가나. 자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나가는 동생의 행태에 C가 혀를 찬다. , 니 동생 머리 길렀냐? A가 묻는다. 십 년째 저 머린데? C가 대답한다. 그래? 그랬나? 그렇구만, , 근데 니 동생 올해 몇 살이었더라? A가 또 묻는다. 100년이고 200년이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A의 공기놀음이 놀랍게도 한 알 잡기에서 실패로 끝나자 B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깃돌을 쥔 손을 흔든다.


B의 섬섬옥수가 공깃돌과 함께 허공을 노닌다. 그러나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B의 눈빛이 자꾸만 A를 향하는 건 뭔가를 말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B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C, B의 입이 열리기 전에 B에게 뭔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C 여동생의 등장 이후부터 괜히 다리를 달달 떨고 머리를 박박 긁어대는 A 또한 C에게 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치킨은 저 혼자 서서히 식어가고,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세 친구는 아직 말이 없다.


아슬아슬 30년째를 채어 잡은 B가 공깃돌을 올려놓은 손등을 바들바들 떨다가, 아차, 툭 하고 공깃돌은 바닥에 떨어지고, 그 순간 세 친구가 동시에 입을 여는데,

 

, 과연 내년에도 이 공기판은 열릴 것인가?

 

 

 

3

 

공기판은 2005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2006 크리스마스부터는 syo가 늘 연애 상태였기 때문인데, , 2019는 다시 공기판을 오픈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이누는 장가를 갔고 이누의 아이는 이누에게 닭다리를 받던 당시의 내 동생과 나이가 얼추 비슷하다. 호밀이는 비싸고 바쁜 몸이 되어 정신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1도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그리고 앞으로도 어쩐지 변함없이 지켜줄 것만 같은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 이여, 내가 다시 돌아왔다. 너 있는 이곳으로. 언제나 이곳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나의 친구여, 공깃돌을 들고서 내가 간다네.

 

 

 

--- 읽은 ---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 156 ~ 234

: 어제 모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이번에 지원한 소설들 거의 대부분은 세 가지 카테고리 중 하나에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게 퀴어’, ‘SF’, 그리고 이라고. 최근에 크게 인기를 끌었던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기에 생각해 보니 답이 선명했다. 박상영, 김초엽, 그리고 장류진. 그러니까 2019 문청들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는 3대장 중 한 분이시다……. 개인적으로는 박 > > .


라디오 데이즈 / 하재연 : 54 ~ 122

: 닮은 데를 찾거나, 인과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느낌과 인접한 느낌 사이에 가상의 선을 그어 별자리를 만드는 일 속에 오만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하재연이 끊고 자르고 떼어놓은 연결들, 각자의 시공간으로 돌려세운 저 많은 각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글쓰기가 무서워진다.


 

한권으로 끝내는 경제학 명저 50 / 가게야마 가츠히데 : 209 ~ 322

: 한 권으로 어찌저찌 하겠다는 책을 이제 읽지 않겠다고, 특히 그게 일본에서 건너온 책이면 그냥 거르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는데, 왜 이렇게 맨날 걸려들까? 뭐 엄청 쓰레기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제목의 책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이 책보다는 내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일의 기본기 / 강재상, 이복연 : 210 ~ 326

: 이제 곧 일이다. 기본기라기에 읽었는데, 읽는 도중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훨씬 더 생생하고 현장에 가까운 기본기들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책 표지가 어쩐지 풀이 잔뜩 죽은 표정으로…….

 


 

--- 읽는 ---

금융 지식이 이렇게 쓸모있을 줄이야 / 김현섭 외 : 111 ~ 223

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 105 ~ 209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 김재인 :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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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2-2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6년부터 공기놀이 할 새 없던 게 더 놀라운데...올해는 공깃돌 들고 보신각 종 땡땡 치는 거 보시나요? 손등 손바닥 훽훽 뒤집으며? ㅎㅎ 장에 대한 혹평만 보다 쟝쟝님이랑 syo님이 읽을만 하다-는 시그널을 주시니 믿고 봐야겠네요. 그나저나 메리크리스마스!

반유행열반인 2019-12-25 15:29   좋아요 0 | URL
아이참 서재의 달인 북플 마니아 선정도 진심 축하드립니다. 핵인싸 syo님!!!

syo 2019-12-26 19:08   좋아요 1 | URL
인간의 앞날이란 정말 변화무쌍한 것이죠? 으하하하 내년 크리스마스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메리크리스마스는 이미 늦었지만 반님도 행복한 연말 뜨거운 연초 만드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당.

Comandante 2019-12-2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시 공무원이시면 선 보실 준비부터 하고 있으셔야죠^^ 기득권층(?)진입을 축하(?)드립니다 ㅎㅎ
금융지식 전 쥐뿔도 없는데 읽어보면 좋을까요?
해피할러데이입니다^^

syo 2019-12-26 19:10   좋아요 1 | URL
으하하하하 최말단에 나이까지 많은데 선이 들어올까요?
결혼은 없지만 시끌벅적하게 늙어가는 미래의 syo가 그려집니다.
Comandante님의 독서력/학습력이라면 뭐 금융지식 회계 이런 거 그냥 후딱 씹어드시지 않겠습니까?
좋은 연말 보내시구요 ^-^

다락방 2019-12-25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공기놀이 재미지네요 ^^

syo 2019-12-26 19:12   좋아요 0 | URL
무려 5만원짜리입니다. 하하하.
5만원 하니까 생각나지만, 이제 제 5만원은 그냥 안전하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ㅋ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9-12-2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서재의 달인에 s를 빛냈던 분이 두 분 계시더군요.
그중 한 분이 syo님이더군요.
저도 됐더라면 3s가 됐을 텐데 저는 올해 미끄덩입니다.
그래도 두 분이 되셔주셨으니 s가문의 명맥은 유지했다고나 할까요? 허허허
암튼 축해요.^^

syo 2019-12-26 19:13   좋아요 0 | URL
내년에도 열심히 활동하여 3s의 일익을 담당하고 싶습니다만,
직장인 + 게으름뱅이 콤비네이션에 아무래도 내년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스텔라님이 활약하셔서 2s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ㅎ

암튼 감사합니다^-^

2019-12-26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6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운 2019-12-27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고료 10만원이었어요 선생님. 공기도 즐겁고 크리스마스도 메리했고 참 좋았네.

syo 2019-12-28 12:54   좋아요 0 | URL
두 배로 감사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글팔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