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마, 읽었으면 읽은 걸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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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쓴 글들을 후루룩 훑어보다가 이것들 속에 책 이야기가 병아리 콧물만큼도 들어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주로 내가 뭐랜다) 알라딘 서재는 책 이야기를 쓰는 공간이다. 글 안에 책을 어떤 레이아웃으로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리뷰, 페이퍼, 리스트로 장르가 나뉜다. 게다가 글에 엮어놓은 책에 내가 쓴 글이 꿰어지므로, 결국 책 입장에서는 내 글이 책을 홍보하고 내 입장에서는 책이 내 글을 홍보하는 공생관계가 semi-운명적으로 맺어지는 플랫폼인 셈이다. 돌려 말하면, 내 글이 잡스러우면 그만큼 알라딘이 앓는다는 이야기겠다. 유별난 악어새가 지금부터 사람고기만 골라서 뽑아 먹겠다고 결심하면 결국 악어 이빨이 차근차근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물론 syo가 글로 징징거리고, 가끔 실화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요사스런 글로 질척거리는 동안, 오색빛깔의 찬란한 깃털을 가진 성실하고 속 깊은 악어새님들이 양질의 리뷰와 페이퍼를 꽝꽝 올리고 계시므로 알라딘이 틀니를 착용할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분명히 페이퍼에 읽은 책, 읽는 책만 등록하지 그 내용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글은 이 생태계를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 ‘작은 생태계의 꼬마 요정’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이러는 건 치명적인 실책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책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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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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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에게 책 이야기는 되게 어렵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려면 스토리에 대해 조금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고 하면 내 안의 무언가가 내부에서부터 멱살을 잡는 기분이다. 이러지 마. 왜뭐왜.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고 말하지 마. 안 해. 아이가 귀신을 본다고 말하지 마. 그것도 하지 마? 하지 마. 그럼 뭘 해? 하지 마. 아니, 브루스 윌리스가…. 하지 마. 뭐? 브루스 윌리스 하지 마. 야, 그래도 브루스…. 브루스 하지 마. 미친, 브루…. 브루 하지 마. 야,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난 널 잘 알아, 넌, 브루 하면 브루스 하고 싶고, 브루스 하면 브루스 윌리스 하고 싶고, 브루스 윌리스 하면 결국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고 하고 말 놈이야. ……맞는데?
아주 가끔 리뷰라는 것을 쓰기도 하는데 그 중 절반은 역시 리뷰를 빙자한 일기나 회고담이다. 그리고 남은 절반 가운데 또 절반은 리뷰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후드러 패는 글이다. 남은 반의 반 가운데 또 절반은 함량 미달의 논할 가치도 없는 글이며, 결국 리뷰랍시는(문법파괴범) 글 가운데 반의 반의 반 정도만이 그래도 ‘리뷰’라 불러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인데, 이런 애들은 일 년에 한두 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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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간만에, syo가 할 수 있는 유형의 책 이야기를 몇 개 하고 가야겠다.
독일 관념론 철학 / 니콜라이 하르트만
피 같은 돈을 주고 책을 사기 전에, 특히 그 책이 3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귀족적인 녀석이라면, 반드시 도서관에서 최소 5페이지를 꼼꼼히 읽어 본 다음 사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고 있다. 이 교훈을 위해서라면 3만원이 아깝지 않다.
이 책의 문제는 역자 선생님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모든 질료는 수용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달리 파악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표상의 모든 질료는 동시에 “주관적으로 규정된다”. (36)
라인홀트는 애초부터 너무도 연역과 체계를 겨냥했었고, 전혀 개별 문제의 난점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40)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지만, 앞으로 남은 900페이지를 읽어나가는 동안 마주쳐야 할 심각한 역경의 서곡 같은 느낌을 주는 데는 충분한 문장이다.
우리가 헤겔 논리학의 어떤 사변적 감정을 도외시한다면, 동일한 문제 노선이 강화되고, 다양하게 변한 형식으로 독일관념론의 전 시기를 통해서 보존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이라는 이원론으로써 동일한 방침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나중에 다른 연속적 문제가 얻게 되는 매우 우월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모든 사상가가 그들의 이론적 관념들을 주장하게 되는 추진력과 관점상의 예리함은 라인홀트가 칸트 해석에서 불러일으킨 물자체에 대한 논쟁과 가장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우리는 진실로 갖지 않을 수 없다. (32-33)
그러니까 이 문단은,
1. 헤겔이 좀 사변적이라서 티가 덜 날지 몰라도, 실은 독일관념론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제 의식이 모양만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헤겔이라면 학을 떼던 쇼펜하우어조차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2. 그리고 그 문제의식이란 칸트의 ‘물자체’와 관련된 논쟁인데,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라인홀트 철학의 큰 의의라 하겠다.
정도로 읽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읽으려면 읽힌다. 그렇지만 대체 “나중에 다른 연속적 문제가 얻게 되는 매우 우월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은 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연속적’은 ‘뒤따르는’ 정도인 것 같고, ‘얻게 되는’은 ‘가진’ 정도인 것 같고, ‘우월한 점’은 물자체 논쟁 이상의 논쟁거리가 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니까, 추후에는 물자체 이상으로 뻑적지근한 한 판이 벌어지는 논제가 등장한다는 말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문제점은 이 책이 다름 아닌 헤겔과, 헤겔까지 도달하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그 독해하기 독하다는 사상들을 설명하려고 태어났다는 사실과 맞물리면 걷잡을 수 없는 쓰나미가 되어 독자를 덮친다. 정말 친절한 한국어로, 심지어 귀여운 만화까지 동원해 설명해도 헤겔은 어렵다. 그런데 이런 독해적 불확실성과도 일일이 싸워 나가며 읽어야 한다니. 이런 식이면, 그럼 나는 이제 뭐 그냥 울어야지. 도리가 없네.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따로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는 한 대목만.
루저 문화의 한 예로 2009년 11월 KBS2 오락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남자 루저’ 발언을 들 수 있다. 이것이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냥 웃어넘겨도 좋은 가벼운 발언이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 여대생의 평범한 한마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일파만파 가져온 엄청난 효과다. 그렇게 민감한 반응 자체가 매우 증상적이었다. 남자의 사회적 우위가 확고한 사회라면 그런 말이 가벼운 농담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2000년대의 남자들은 그러한 여유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도 외모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점에서 루저 발언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은 혐오가 아니라 분노라고 말해야 옳다. (170-171)
이 문단의 결론은 차치하기로. 인용을 생략한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이 문단은, 이제 남자들의 ‘여유’가 예전 같지 않으므로, 오늘날에는 예전처럼 남녀 간 일방적인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삽입되었다. 물론 저자도 아직까지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젊은 청년 세대에서의 불평등은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실이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나보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나보다 위 세대에서 자행되어 온 불평등보다 심하지 않다는 명제 자체는 진실로 보인다.
문제는 저 ‘루저’ 예시를 그 징후로 제시하는 게 어디서 나온 해석이냐는 점이다. ‘남자의 사회적 우위가 확고한 사회라면 루저 발언이 가벼운 농담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하다.’ 는 문장이 진실일 때, 다른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노비에 대한 양반의 사회적 우위가 확고한 신분제 사회에서라면 ‘솔직히 소과 이상 급제 못한 양반은 루저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노비를 멍석말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노비의 가벼운 농담으로 취급될 거니까. 야, 솔직히 박정희 걔 키보면 남자로서 루저 아니냐? 랄지, 전두환 걔 머리 보면 루저 아니냐? 랄지 하는 말들을 종로한복판에서 떠들어도 남산이니 남영동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유’를 가진 두 분께서 이를 가벼운 농담으로 취급할 것이 분명하니까.
혐오는 약자를 향한 강자의 감정이고, 분노는 강자를 향한 약자의 감정이라는 정의는 표면적으로 보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국면에서 강자인 사람은 드물다. 어떤 강자는 어떤 국면에서 약자다. 따라서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키라는 잣대에 관해 대다수 남자들은 약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약자인 그들의 감정을 혐오가 아니라 분노로 읽어내는 것도 무리한 시도는 아니다. 저자와 부족한 독자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정반대의 감정일 것 같은 분노와 혐오도 공통점이 있다. 두 감정 모두, 표출되고 표현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 여성의 가치가 외모로 정의되고, 평가되고, 비하되고, 혐오되는 사건에 대해 규탄하는 목소리가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리기까지, 무지막지한 세월이 필요했다. 반면 루저 사건이 터졌을 때, 남성의 분노는 즉각 표출될 수 있었다. 저자와 부족한 독자가 갈라서는 지점이다.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어휴. 이제 쉬었다 가죠. 우리 사유가 긴장할 수 있는 지속시간은 호흡의 길이와 같다고 누가 얘기하더군요. 그 호흡이 끝나면 생각은 이미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나요. 그런데 요가를 하면서 호흡의 길이를 증가시키면 사유의 긴장시간도 확장된답니다.
그래서 제가 요가를 배웠는데 그것도 요가 지도자 반에 들어가서, 헬스와 무용으로 단련된 젊은 여성들과 더불어 배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여성들이야 굳이 요가를 할 필요도 없어요. 온 몸이 부드러워서 모든 동작이 저절로 다 되더라고요. 그들은 단지 자격증이 필요해서 참가했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이미 온 몸이 굳어버린 저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조차 따라갈 수 없더군요. 사유의 고수들은 고행을 하지 않고서도 좌선을 통해서도 호흡을 확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저 같은 사유 초보는 요가의 고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호흡 확장이 불가능하죠. 그래서 참고 또 참으면서 요가를 배웠습니다. 오직 호흡을 길게 하고, 사유를 확장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점차 회의가 들었습니다. 차라리 사유를 하지 말지, 육체를 고문하는 가혹한 고행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요가 지도자 자격증, 이 멋진 자격증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49-5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친구 병창이’ 이병창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자꾸만 늘어간다. 이광모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아는’ 이병창 선생님은, 알고 보니 요가 지도자 반에 들어가서 고행도 하셨던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 선생님, 거기 계신 그 젊은 여성분들도 ‘젊은’ ‘여성’이라 몸이 부드러워서 그걸 다 하신 게 아닐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덜컥 지도자반에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선생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도하시고 싶으셨어 ㅋㅋㅋㅋㅋㅋㅋㅋ ‘차라리 사유를 하지 말지’ 대박. 핵공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읽은 ---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248 ~ 392
+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 336 ~ 479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심보선 : 221 ~ 327
+ 이렇게 쉬운 통계학 / 혼마루 료 : 148 ~ 276
--- 읽는 ---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 ~ 136
=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 ~ 191
=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 오노 후유미 : ~ 278
= 독일 관념론 철학 / 니콜라이 하르트만 : ~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