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권씩

 

 

갑자기 기분이 그랬다. 빗방울도 떨어지고, 바람이 창으로 드니 커피는 더 맛있고, 책상 위에는 읽을 책이 쌓여 있고, 엄마는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조국은 부지런히 이야기를 하고, 친구는 읽던 책에 감동을 받아 말을 걸어오고, 저녁은 새우볶음밥이고, 아래층 사는 내가 그걸 퍼먹는 동안 위층 아이는 유튜브에서 먹방을 하고 있는 듯하고,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니 엄마가 나 모르는 사이에 자기 수술 날짜를 내 방 달력에 표시해놨고.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에버노트에 들어가서 그간 옮겨 놓았던 인용문들을 통째로 다 지워버렸다. 수백 개의 책 이름이 휴지통 폴더로 쏟아졌다. 다시, 처음부터 읽고 옮겨놔야지


갑자기 기분이 그렇다. 엄마 입원 물품들은 하나하나 택배로 도착하고, 그 상자들 사이에 내가 새로 산 <독일 관념론 철학>도 들어 있고, 같이 사지 못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장바구니에서 아쉬운 내색을 하고 있고, 오늘을 재활용 쓰레기 내 놓는 날이고, 그 쓰레기에 실어서 같이 내 놓고 싶은 마음 있고, 여자친구는 다른 지붕 아래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고, 일기를 쓰다가 하루가 바뀌고, 나도 어떻게든 바뀌고 싶고.

 

 

 

--- 읽은 ---

+ 전쟁 말고 커피 / 데이브 애거스 : 279 ~ 430

+ 가와바타 야스나리 / 허연 : 131 ~ 297

 

 

--- 읽는 ---

=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 168 ~ 336

=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장석주 : 130 ~ 260

= 혐오 / 김종갑 : ~ 96

= 이렇게 쉬운 통계학 / 혼마루 료 : ~ 148

= 한번은 경제 공부 / 로버트 하일브로너 외 : ~ 107

= 왜 칸트인가 / 김상환 : ~ 93

 

 

 

 

이 아래를 읽는 일은 허망한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


스와로브스키와 57분 교통정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저 그런 인간이다.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사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그저 그런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혹은 되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착각이다. 몹쓸 착각.

 

그저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뭐든지 적극적으로 못해야 한다. 타고난 소질이 없거나 있더라도 천하에 쓸모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은 바로 시대를 잘못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호날두나 메시처럼 공 하나 잘 차서 수천억을 벌어들이는 재능을 타고날 수는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14세기 봉건왕국에 태어나야만 한다. 드리블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도록, 트래핑을 과도하게 잘했다가 적그리스도의 졸개로 몰려 화형당할 위험이 있으니 최대한 몸을 사리도록, 옐로우 카드도 오프사이드도 없는 그런 험한 시대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 끼 때울 빵 쪼가리나 이웃 나라를 덮쳤다는 흑사병 같은 것들을 걱정하며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저 그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까딱 시대를 잘 만나면 모조리 끝장이다. 나는 그저 그런 인간으로서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매일 노력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소질이 보이면 무슨 일이던 즉시 때려 칠 각오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뭐, 그럴 일은 없었다. 이렇다 할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천운이다.

 

그렇지만 이런 스스로가 처음부터 마냥 당당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내게도 철모르는 어린 시절이라는 게 있다. 그때는 내 자신이 참 많이도 부끄러웠다. 그저 그런 내 외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오래 짝사랑한 여자 대신 괜히 그 옆자리 앉은 여자에게 들이대는 일도 있었다. , 기억난다. 옆자리 그 여자는 콧구멍이 가로로 넓었는데, 사실 내 이상형은 짝사랑 그녀와 같은 세로로 긴 콧구멍이었다. 그렇지만 그땐 내 와꾸가 그저 그래서 긴 콧구멍은 가질 수가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다고 오래 꿈꿔 온 콧구멍을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방법이 바로 내 고개를 왼쪽으로 꺾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왼쪽 귀를 왼쪽 어깨에 붙인 것이다. 나는 내 눈이 세로로 서면 세상 가로들이 세로로 보일 줄 알았다. 인정한다. 그게 쉽진 않았다. 게다가 짝사랑 그녀가 이런 나를 보더니 스티븐 호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잔뜩 나서 미친 듯이 소주를 들이켰다. 고개를 꺾고 마시려니 절반은 입에 들어가고 바닥으로 흘렀다. 그러자 짝사랑 그녀는 종업원을 불러 저 스티븐 호킹이 우주를 멸망시키기 전에 얼른 빨대 하나 갖다 주라고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한테는 몰라도 최소한 스티븐 호킹 박사한테는! 위대한 호킹 박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미안해서 눈물이 다 고였다. 그런데 그 김에 한 두어 병 쯤 더 먹었을까, 나는 기어이 가로 콧구멍을 세로 콧구멍으로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건 곧 세로 콧구멍이 가로 콧구멍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 더는 슬프지 않았다. 세상에 술이 해내지 못하는 일이란 없구나. 어깨에서 고개를 떼는 순간 지금 이 회전감각이 물거품처럼 흩어지기라도 할까봐 굉장히 조심스레 의자를 돌려 그녀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눈을 두세 번 비비고 다시 봐도, 이제 가로가 세로였고 세로가 가로였다. 그 순간 내 짝사랑이 끝났다. 짧은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 술자리가 파했을 때, 어떻게 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를 내가 살던 오피스텔에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청춘 남녀가 술에 잔뜩 취해 침대가 하나 뿐인 방에 들어섰으니, 그 뒤에 생겼을 뜨겁고 끈적한 사연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착각이다. 슬픈 착각…….

 

그녀는 말했다. 57까지 세었어. 내가 대답했다. 안 싼 거 아냐? 취해서 하다가 잠든 건데 너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어. 넌 분명히 쌌고, 싸고 난 다음 후레이! 라고 외치며 콘돔을 벗겨서 저쪽 벽으로 집어던졌어. 나한테 몇 방울 튀더라. 으웩. 저기, 보이지? 보였다. 내가 저걸 집어 던졌다고? 정말 내가? …… 후레이? 아놔, 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담담했다. 네가 던졌어. 로데오를 마친 카우보이처럼 당당하게. 좋았었나보지. 너라도 그랬다니 참 다행이지. 나는 다시 물었다. 네가 57까지 세었다고 꼭 57초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네가 무슨 스톱워치는 아닐 거 아냐. 너 술도 꽤 마셨고……. 미안, 그럴 리는 없어. ? 내 고등학교 때 별명이 뭔지 알아? 뭔데. 스와로브스키. 스와로브스키? . 스탑워치로봇새끼라는 뜻이지. 3분 내라면 오차범위 0.5초의 정확도로 시간을 잴 수가 있어 나는. 너는 정확히 57초짜리였어. 그 점에 대해서라면 넌 스와로브스키의 정품 보증서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나는, 네가 콘돔을 까는 순간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그건 네가 57초를 풀로 다 쓴 게 아니라는 뜻이야. 나는 고개를 양손에 파묻었다. 그만 해. 이러다 나 울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야…….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나는 인간은 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말인데. 하지 마. 너 말야. , 하지 말라고! , 콘돔 까서 한 번에 못 끼우더라. 안쪽이랑 바깥쪽을 잘 모르더라고. 24초쯤 걸렸어. 그런 시간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넌 애가 왜 이렇게 잔인해……. 울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울었다, 확실히. 그러자 그녀가 선심 쓰듯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안 한 걸로 쳐 줄게. 안 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 됐지? 우리 안 한 거다? 그리고 그녀는 테이블에 던져놓은 가방을 손에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수치심에 침대에 몸을 던지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래, 꺼져, 꺼지라고 이 나쁜 년아. 어차피 네 콧구멍은 가로였어! 가로였다고!

그 순간 내 두 번째 사랑이 끝났다. 역시 짧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순간이 바로 내 마지막 사랑이 끝난 순간이었다.

 

그녀가 안 한 걸로 쳐주는 바람에, 내가 과연 해 본 놈인지 안 해 본 놈인지 나조차 헷갈리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으로 해 본 놈으로 결말이 나게 되었다. 남자들끼리 술 마시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남자들은 늘 자신의 섹스능력 프리젠테이션 대회를 열곤 하는데, 주요 채점 항목은 사이즈(추호도 알고 싶지 않다), 테크닉(무협지가 따로 없다), 횟수(내 알 바냐), 상대 여성의 반응(알고 보면 착각일 확률이 높다. 여자들 연기력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속력……. 한 놈인 듯 한 놈 아닌 한 놈 같은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생이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제발 내겐 물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불똥은 나에게 튀었다. , 솔직히 45분 저 말 믿냐? 무슨 AV배우냐? 안 그러냐? 나는 가만히 있었다. 넌 왜 가만히 있냐, 뭔 말을 해 봐. 나는 소주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어쭈, 폼 좀 잡는데? 너도 그 정도는 한다는 뜻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 아니야! 57? 5757? 57! 나는 분명히 분이 아니라 초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57분을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우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 봐봐. 이렇게 얌전한 애들이 보면 진짜배기 정력가라니까! 진짜배기 아니었다. , 쩔지 않냐? 쩔지 않았다.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 놈이 야, 난 정말, 언젠가 얘가 해낼 줄 알았어. 해낼 줄 알았다니까…… 라며 눈물을 훔치는 바람에 티슈를 뽑아주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내게는 57분 교통정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영광이라면, 모든 영광을 스와로브스키의 가로 콧구멍에 돌리고 싶다.

 

그저 그런 놈으로서의 인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저거 다 부질없는 짓이고, 진실이 57분이든 57초든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 1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저 진실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찾아올 혹시 모를 기회를 위해, 나는 늘 지갑에 콘돔을 챙겨 다닌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끝난 콘돔을 이용해, 안팎을 착각하지 않고 단번에 착용할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 지금은,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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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9-03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왜 ㅋㅋㅋㅋ57이죠? (이런 거만 궁금해.) 교통방송 때문이면 싱거워요. 저는 오늘 자의는 아니고 타의로 기기 안에 글 파일과 메일앱까지 싹 비워야 했는데 머리로는 클라우드에 있어, 사라진 게 아냐, 하면서도 막 심란했거든요. 그런데 클라우드를 다 비워버리시면....설사 인용문일지라도 한땀한땀 적은 걸...syo님 괜찮아요?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져서 잠이 안 오는데.

syo 2019-09-03 10:11   좋아요 0 | URL
싱거운 맛을 떠먹여드려서 어쩌죠? 57분 교통정보 때문에 57로 한 거 맞는데 ㅋㅋㅋㅋㅋ
56? 57? 58? 이러다가 골랐어요. 단지 57분 교통정보가 존재한다는 이유에서.

저야 원래 책을 재독 삼독하는 스타일이라서요. 다음 번에 다시 읽을 때 또 쌓아놓으면 되죠.
어차피 제가 인용을 따는 게, 나중에 써먹으려고 그러는 것보다, 일종의 필사 개념이거든요.
좋은 문장을 천천히 옮겨적으면서, 부디 내 개똥같은 문장을 조금이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시옵소서- 하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독서괭 2019-09-03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은 진지한데 아랫글은 ㅋㅋㅋ 그사랑이 마지막이었다는 거 보니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 같은데, 왠지 박민규가 떠오르네요. 재밌어요~~^^

syo 2019-09-03 10:06   좋아요 0 | URL
네. 에세이 아니구 앉은자리에서 만든 100% 개소리입니다.
박민규 ㅎㅎㅎㅎㅎ 100년 쯤 연마하면 초창기 박민규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당^-^

로쟈 2019-09-03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그런 소설보다 재밌습니다. 지방가는 시외버스에서.~

syo 2019-09-03 10:02   좋아요 0 | URL
이 태풍 속에서도 아침부터 열일하시는군요.
칭찬 말씀 감사합니다.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ㅎㅎ

다락방 2019-09-0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8년 개봉한 영화 [데스티네이션 웨딩] 에서는 키에누 리브스가 위노나 라이더에게 ‘나 2006년에 한 게 마지막이었어‘ 라고 합니다. 네, 뭐, 그렇습니다.

syo 2019-09-04 09:45   좋아요 0 | URL
키에누 리브스도 12년을 못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에 사는 거니까 매사에 조심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2019-09-03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9-0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 보고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주섬주섬하다가(아니 내 주제에 누굴...) 아랫글 보고 뭐야, 살아있네~ 하고 갑니다. 흣.

syo 2019-09-05 11: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반전이 또 쫄깃쫄깃한 맛이 있잖아요!